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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03. 2023

천사옥대의 진실 3

비형랑과 온달장군의 정체 

597년 7월에 즉위했기에 즉위 원년(元年)에는 사용하지 못한 판형(版形)과 대구(帶鉤)였다. 음력 5월 5일인 단오(端午) 전(前)에 완료해야 하는 찻잎(茶葉) 가공의 특성 때문이었다. 모든 차(茶)들이 수출용으로 생산되었기에 바다 건너 오랜 기간 운반되는 것에 대비하여 수릿날(단오절) 이전까지 모든 차(茶) 생산 과정을 끝마쳐야만 했다. 생산된 모든 차(茶)들은 최소의 내수용(內需用)을 제외하고 전량(全量) 판매처가 이미 확정된 제품들이었다. 더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기에 못 만들 만큼 만들어 놓기만 하면 팔리는 건 보장되어 있는 신라로서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세월이었다. 수릿날(단오절) 축제가 그토록 성대하고 사치스러웠던 이유였다. 창포(菖蒲)라 불리며 아낙네들의 머릿결을 빛낸 풀은 풀이 아니었다. 찻잎 중 차(茶)로 만들어지지 않은 부적격 판정받은 찻잎이었다. 쑥떡이라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기록된 단오떡은 역시나 차(茶) 제조용 잎(葉)으로는 부적격 판정을 받은 찻잎으로 만든 떡이었다. 단오에 먹는 떡을 수레바퀴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수리떡이라고 하였다지만 그러나 수릿날 먹는 떡에 새겨진 문양(文樣)은 수레바퀴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로 알려진 나무의 잎을 본떠 새겨 넣은 것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리들의 깃털과 너무나 닮은, 생명의 나무 잎들의 축제일을 신라인들은 수릿날이라 불렀던 거였다. 생명의 나무 잎이 찻잎이라는 것을, 생명의 나무가 차나무라는 걸 수리떡은 증거하고 있다. 수리떡의 문양은 메소포타미아의 생명의 나무 잎을 신라인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증거 하는 것이다.

찻잎을 문양한 수리떡 - 수레바퀴 문양이 아니라 생명의 나뭇잎인 찻잎을 문양한 것이다

진평왕 2년인 580년부터 매년 단오 이후에 한 개씩 사용된 판형(版形)과 거기에 달린 옥대구(玉帶鉤)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건 641년 단오(端午:수릿날) 이후였다. 62번째의 판형과 대구가 641년까지 사용되는 동안 일본에서 찻잎을 채취하는 업자들은 모두 신라로 몰려들어 신라에게 찻잎의 가공을 의뢰했다. 북주(北周) 무제의 폐불 피해를 복구하느라 수입량에 한도를 정해 놓지 않은 관계로 신라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일본으로부터 찻잎을 수입, 가공해 고가(高價)의 차(茶)로 만든 후 대륙으로 수출했다. 580년 처음 대륙으로 수출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차수출(茶輸出)을 보호하기 위해 지증왕의 증손 김후직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583년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584년 차(茶)의 수출과 찻잎의 수입을 관리하는 조부(調府)와 수레와 가마를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각각 새로 설치했다. 585년엔 실크로드 상방(商幇)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사량궁(沙梁宮)과 마린 로드 상방 업무를 담당하는 양궁(梁宮)을 신설해 기존 궁성(大宮) 업무와 분리하고 각 궁을 책임지는 사신(私臣)을 두었다. 586년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예부를 신설하고 591년엔 기존의 왜전(倭典)을 영객부(領客府)로 승격시켜 기존 왜인을 접대하는 영(令) 외에 실크로드와 마린로드 상방의 사신을 접대하는 영(令)을 따로 두었다는 삼국사기의 빽빽하게 기록된 행정 기관 신규 설치 및 확대가 580년부터 시작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생명의 나무 잎과 수리의 깃털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주도한 양견(楊堅)의 수나라가 당국공(唐國公)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에게 망하고 당나라로 바뀐 데에는 둘째 아들인 양광(楊廣)이 형 양용(楊勇)을 제거하고 황위를 욕심낸 것에 근본 원인이 있었다. 관롱(關隴) 떤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한 향락을 추구한 관롱집단(關隴集團)의 문화를 가장 경계했던 수문제(隋文帝)였다. 황제가 여자들을 탐하는 색욕을 가장 혐오했던 문헌황후(文獻皇后) 독고가라(獨孤伽羅)였다. 이 두 사람의 정신병적 집착(執着)을 귀신같이 교묘히 이용해 형과 아버지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게 수양제(隋煬帝) 양광이었고 그의 등극이 가능하도록 신귀(神鬼)한 간계(奸計)를 꾸미고 실행한 게 비형랑(鼻荊郞)이었다. 수문제와 독고황후(獨孤皇后)의 손발과 눈들이 삼엄한 수나라가 아니라 바다 건너 신라에서 꾸며지고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실행된 일들이었기에 천하에 둘도 없을 정도로 신중한 수문제와 현명한 독고황후도 속아버린 거였다.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인물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연유였다. 삼국유사 권 1 도화녀 비형랑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비형랑이 밤마다 궁궐을 나와 도깨비들을 모아 놓고 노는 특이 행동을 한 것은 15세 때 집사라는 벼슬을 진평왕으로부터 받고 나서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

 비형랑(鼻荊郞)은 삼국유사에서 사륜왕(舍輪王)이라 기록된 진지왕(眞智王)이 죽은 지 삼 년 후 영혼으로 돌아와 도화녀(桃花女)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단순 산술로 진지왕이 죽은 지 삼 년이면 582년이고 그 후 16년을 더하면 598년이 된다. 훗날 수양제(隋煬帝)가 되는 진왕(晉王) 양광(楊廣)이 동생인 한 왕(漢王) 양량(楊諒)과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휘하의 30만 대군을 모두 잃는 무능을 보여 아버지인 수문제(隋文帝)에게 자결을 명 받는 사건이 벌어진 해였다. 어머니인 문헌황후의 도움으로 살아난 양광이 그 후 동모형(同母兄)인 황태자 양용을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온갖 속임수와 간계를 사술(詐術)로 전개하는 사단(事端)이 시작된 해였다. 진평왕은 궐(闕)에 들인 비형랑(鼻荊郞)이 각지의 절에 흩어져 있는 무리들을 밤마다 만나고 큰 다리(大橋) 하나 정도는 그 무리들을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뚝딱 건설해 버리는 걸 확인한 후 그가 추천한 길달(吉達)이라는 자를 각간(角干)의 양자로 입적시켜 조정(朝廷)의 정사를 돕도록 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그런 길달이 배신하고 도망갔을 때 비형랑은 자신의 조직을 동원해 그를 잡아들여 죽였다고도 기록했다. 삼국유사 비형랑조는 진평왕이 양광을 황제로 만들려는 비밀공작에 개입됐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양광을 자결의 문턱에서 구해내고 진평왕을 움직여 그를 황제로 올리는 공작기지(工作基地)로 신라를 참여시킨 건 사실 실크로드 상방의 소그드 상방이었다. 후일 수(隋) 나라의 2대 황제가 되는 양광은 아버지 문제가 다스리던 수나라의 진국(晉國)을 분봉받은 진왕(晉王)이었다. 진국(晉國)은 실크 로드 상방의 주축인 진상(晉商)들의 본거지인 곳이었다. 수(隋) 문제가 마린 로드 상방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북주의 수주자사를 역임한 수국공(隨國公)이었기에 그들과 쉽게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양광은 실크로드 상방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수 문제의 기반인 수주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수주는 장강, 한수와 회수를 연결시키는 중국 내륙 해상무역의 연결점이었다)

서진(西晉)이 망하고 동진(東晉)이 세워진 이후 265년간 5호 16국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란 이름으로 분열을 계속해 왔던 중원 대륙을 재통일한 수(隋) 문제(文帝) 양견은 당(唐) 태종과 혈연적으로는 같은 선비족이고 문화적으로는 같은 무천진(武川鎭)의 관롱귀족(關隴貴族)으로 여러 면에서 비슷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당국공(唐國公)으로 태원유수(太原留守)를 역임한 아버지 이연(李淵) 때문에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진상(晉商)들의 본거지인 태원(太原)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가 이종사촌동생인 수양제(隋煬帝)를 꺾고 황제가 된 후에는 섬서성(陝西省)을 봉지로 하는 진왕(秦王)에 책봉되었던 데 반해 수문제 양견은 장강(長江)의 물류(物流)가 집산되는 형주(荊州)와 무한(武漢)을 낙양(洛陽)과 연결하는 마린로드 상방(商幇)의 경제적 영향력이 압도적인 수주(隨州)를 봉토로 받은 수국공(隋國公)이었고 서위(西魏) 왕조에서는 수주자사(隨州刺史)로 직접 다스리기까지 하여 마린 로드 상방(商幇)과는 어떤 형태로든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주(隨州)는 증도(曾都)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장강(長江)을 따라 사천(四川)에서 내려온 찻잎(茶葉)들이 한양(漢陽:武昌과 합해져 武漢이 된 곳)에 하역되어 낙양으로 운송될 때 오랜 시간 장강을 따라 운반되느라 수분(水分)을 잔뜩 머금어 시들해진 찻잎을 다시 푸른빛의 향(香) 나는 찻잎들로 거듭나게 하는 탄배(炭焙)를 하던 곳이어서 증도(曾都)라 불렸다. 증(曾)이란 글자는 찌는(蒸) 모습을 상형한, 시루(甑)를 그린 글자였다. 수문제 양견은 오래전부터 마린로드 상방(商幇)과 깊은 연대(連帶)를 갖고 있는 선비족이었다. 

온달 장군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則不返也)고 선언하고 548년 이후 단 한 번도 군사적으로 분쟁하지 않은 신라에 그것도 신라가 핵심 이익이라며 만패불청(萬覇不聽)의 요지로 여기는 소백산맥 고치령(古峙嶺)과 마구령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간 게 590년이었다. 백제 성왕(聖王)이 죽은 관산성(管山城 옥천)이 섬진강과 금강을 보은을 통해 남한강과 연결시켜 주는 백제의 생명선이었던 무역로였다면 소백산맥의 계립령, 죽령, 고치령은 낙동강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신라의 생명선 같은 무역로였다. 부왕(父王) 평원왕이 인장(印章)을 찍어 준 천사옥대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던 영양왕(嬰陽王)이었지만 실크 로드 상방의 제의(提議)는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다. 장수왕 때 북연의 풍홍과 백제의 개로왕을 털었듯 신라를 털 기회를 보장한 제의였다. 게다가 온달은 소그드인이었다. 진평왕이 백제 개로왕의 죽음을 적시하며 우려했던 사태가 재연되자 수문제(隋文帝)는 격앙(激昂)했다. 국제적(國際的) 약속을 위반한 고구려를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만천하에 공표했다. 약속의 한 당사자인 마린 로드 상방은 천사옥대 체제의 유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온달장군은 고치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진평왕의 신라군은 영양왕이 생각한 이상으로 강했다. 결국 온달을 전사(戰死)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수문제의 보복이 공표된 이상 영양왕은 소그드 상방과 더욱 결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온달장군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연유였고 허망하게 사라진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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