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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04. 2023

천사옥대의 진실 4

을지문덕과 양만춘의 정체

 성왕(聖王)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은 백제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중추적(中樞的) 기술을 보유한 과학기술자 집단(集團)을 아좌태자(阿佐太子)와 임성대군(任城大君)등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모두 일본으로 보낸 후 자신의 죽음으로 쿠다라(kudara) 토인(土人) 왕가(王家)를 스스로 폐(廢)했다. 기후 한냉화(寒冷化)로 인해 점점 얌전해진 바다는 경유(經由) 없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로 가는 항해(航海)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일본이 백제와 굳이 찻잎(茶葉) 무역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금강 이남으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차(茶) 나무가 기후변화로 점점 사라졌고 그래서 대안으로 버틴 것이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가공한 후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었던 백제였다. 쿠다라 백제가 왜라고 불리던 일본에 그토록 공을 들인 연유였다. 얌전해진 바다 때문에 이제 백제는 더 이상 경유지(經由地) 이상의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 쿠다라 백제의 주축(主軸)들이 떠난 후 서동(薯童)을 캐며 살았다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무왕(武王)이 이끌던 백제 아닌 백제는 608년 일본 찻잎(茶葉)을 중개하며 수나라와 관계를 맺은 뒤 당(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과도 연결되었다. 무왕은 이세민을 백제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역로를 확보하려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로 생각했다.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킬 때 소요된 막대한 자금(資金)의 상당 부분도 당시 백제가 하사품(下賜品) 없이 조공(朝貢)한 일본 찻잎(茶葉)을 팔아 확보한 것이었고 현무문의 변 당시 전투 현장에서 이세민의 부대원(部隊員)들이 입었던 갑옷인 명광개(明光鎧)도 무왕이 하사품 없이 조공(朝貢) 한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무왕 24년(623) 한 해에 무려 세 번이나 행한 백제의 당나라에 대한 조공(朝貢) 기록과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해인 무왕 27년(626), 뜬금없이 갑옷인 명광개(明光鎧)의 조공(朝貢) 기록이 있는 연유(緣由)였다. 그렇게 시작해 죽을 때까지 당 태종에게 충성한 무왕(武王)이 원한 건 오직 하나, 섬진강(蟾津江)을 통해 들어온 일본 찻잎들을 긴압차(緊壓茶)로 만들어 그 차(茶)를 곡성- 남원- 함양- 거창- 김천- 영동- 청주- 당진으로 이어진 교역로를 통해 전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 교역로는 당시의 조선술(造船術)과 천문학을 활용한 항해술로 백제가 무역입국(貿易立國)으로 계속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方途)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 나오는 그 수많은 성(城)들의 이름과 고구려 특히 신라와의 전투는 쿠다라 백제가 떠나고 남은 진국(辰國 chen)의 진짜 진인(辰人)들이 어떤 마음으로 백제의 이름으로 마지막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처절한 증거들이었다. 섬진강(蟾津江)으로 들어오는 차선(茶船)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사천(泗川)에 각산성(角山城)을 축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왕(武王)은 곡성의 마천성(馬川城)을 수리하고 남원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와 치열하게 다투었다. 곡성- 남원- 함양- 거창- 김천- 영동- 청주- 당진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남한강 교역로를 장악한 진평왕은 무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그를 막기 위해 결정적 시기마다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시해 천사옥대 체제 붕괴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의 자발적인 무왕 주저앉히기 전략을 실행했다. 운봉의 속함성(速含城), 함양의 마천성(馬川城), 거창의 적암성(赤嵓城), 김천의 동잠성(桐岑城), 영동의 가잠성(椵岑城), 청주의 왕재성(王在城)들은 무왕이 꿈에서도 그리던 교역로를 지키는 성(城)들이었다. 이 산성들을 확보하지 않으면 백제의 차(茶)들은 온전히 대륙으로 수출될 수 없었다. 영동(永同)의 가잠성을 두고 신라와 백제가 남원의 아막산성(모산성)에서처럼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은 섬진강을 금강과 연결하는 시작이 남원이었고 영동이 끝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령의 서곡성(西谷城)과 성주의 독산성(獨山城)은 거창과 김천을 잇는 교역로를 보호하는 성들이었고 늑노현(勒弩縣:괴산)은 신라의 남한강 수운(水運)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보루(堡壘)였기에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이게 된 지역들이었다. 그러나 무왕의 무역로를 향한 간절한 소원은 642년이 되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백인과 토인의 혼혈인 당 태종. 신라에서는 이런 토색 왕족을 갈문왕이라 불렀고 성골에서 제외했다. 진골들이다.   

 천사옥대(天賜玉帶)의 마지막 판형과 대구가 사용된 것은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인평 8년(641년) 5월이었다. 그다음 해인 642년에 대야성과 40개에 달하는 신라의 성(城)들이 백제에 의해 함락되는 대이변이 벌어진 이유였다. 천사옥대 체제를 유지시키던 금패신표가 모두 소진된 것이었다. 무왕이 훙(薨)한 건 641년 3월. 그토록 충성했건만 무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원하던 무역로를 끝내 달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은 소복(素服)으로 갈아입고 통곡(痛哭)했다고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이 기록한 연유였다. 황실 친위대나 되어야 갖출 수 있는 갑옷인 명광개(明光鎧)를 무왕(武王)이 대가 없이 조공해 준 덕분에 전 부대원(部隊員)에게 입혀 그들의 용쟁분투(龍爭奮鬪)로 승리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그 현무문(玄武門)에서 당 태종은 무왕을 위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했다고 삼국사기 백제 본기가 기록한 연유였다. 돌궐을 무릎 꿇려 천가한(天可汗)이 된 당 태종이 무왕의 죽음에 통곡하면서 결심한 건 천사옥대 체제라고 불리던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질서를 반드시 허물겠다는 것이었다. 645년 2월, 이세민이 직접 이끄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30만의 세계최강 군대가 천사옥대 체제가 끝장났음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 고구려로 진군했다. 


 수 문제가 자신이 만든 세계 질서인 천사옥대 체제를 붕괴시키려 했던 소그드 상방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자 위험해진 건 진상방(晉商幇)이었다. 진상방의 권력과 재력은 차(茶)를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양만큼 동쪽에서 받아 소그드 상방에 미리 약속한 물량을 넘겨주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험하기 이를 데 없고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쉽게 접근하기 조차 힘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소그드 상방처럼 큰 다툼 없이 이익을 내며 관리할 수 있는 상방(商幇)은 없었다. 붕괴시켜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협력자였다. 황하의 범람을 제방을 쌓아 막는 대신 산을 깎아 남쪽으로 물길을 내 황하 물줄기를 아예 바꿔버림으로써 범람을 막은 우임금 이래 동서 차(茶) 교역로를 낙양과 분점해 온 진상(晉商)들이었다. 주무왕(周武王)의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에도 낙양을 건설해 차(茶) 무역의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숙부 주공(周公)의 의도를 간파하고 동생 우(虞)에게 당(唐)이라고 부르던 지역을 책봉해 주는 놀이를 통해 차(茶) 무역로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 곳이 진상(晉商)이 터 잡은 산서성이었다. 그때부터 길러온 균형감이 수 문제를 제어(制御) 해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을 깨트린 것에 대한 징벌을 해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수문제(文帝)의 당연해서 보편적인 주장은 실제적인 세력 균형이 깨지는 것을 더 염려한 다른 세력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수문제(文帝)는 백마사에 대승불교가 들어온 이후 최초의 불교단체인 천태종단에 너무 많이 경도되어 있었다. 마린 로드 상방의 다른 이름인 천태종단의 비약적 발전을 진상방은 소그드 상방에 대한 탄압과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노련했다. 598년 30만 명의 충성스러운 정예병들을 고구려 정벌에서 모두 잃어버리고 수문제는 604년 진왕(晉王) 양광에 의해 암살되었다.

 진상방(晉商幇)의 지원으로 황제가 된 수양제는 수문제가 중단시킨 진상방((晉商幇))의 간절한 염원, 낙수(洛水)와 위수(渭水)의 물길 연결을 동관(潼關)과 장안 사이에 별도의 물길을 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는데 문제는 수양제(隋煬帝)가 이 일을 통해 차(茶)의 동서교역이 어느 정도 이익이 남는 사업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수양제는 장안과 낙양을 운하로 연결해 비용을 줄여 이익을 더 내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서서 이제 전 국토의 남북과 동서를 운하로 연결해 차(茶)를 간절히 원하는 서역 사람들에게 더 많이 공급함으로써 엄청난 재정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사업으로 차(茶) 산업을 재편하려 했다.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관리자로 초청된 사람이 이제 상인이 되어 직접 돈을 벌겠다고 나선 것에 다름 아니었다. 수양제는 실크로드 상방(商幇)과 마린로드 상방 모두의 적이 되었다. 소그드 상방(商幇)의 적(敵)이 된 것만으로도 실각(失脚)한 아버지 수문제를 양제는 잊고 있었다. 수 양제의 차(茶) 무역 황실 독점 노력에 어깃장을 놓은 건 고구려였고 그런 고구려를 없애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차(茶) 무역 황실 독점이었다. 결국 의도는 달랐지만 수문제의 고구려 정벌처럼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정벌도 천사옥대 체제의 붕괴를 가져올 사변이었다. 수문제의 고구려 정벌은 천사옥대 체제의 중요한 조약 당사자인 소그드 상방의 제거와 마린로드 상방의 세력 확대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고 수 양제의 고구려 정벌은 마린로드와 실크로드 상방 그리고 고구려라는 천사옥대 체제의 주요 참가자 모두를 제거하려는 사변이었다. 결코 이기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이었다. 113만 3800명이 참전한 이 전쟁에서 수양제(隋煬帝)는 참패했다. 지금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전쟁으로 기록된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이끈 을지문덕은 역시나 불가사의하게 이 전쟁 후 거짓말처럼 고구려 역사에서 아니 역사 자체에서 그 존재가 사라졌다. 을지문덕은 마린로드 상방과 실크로드 상방이 함께 찾아내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계가 알지 못한 여전히 모르는 세계인이었다.

 당 태종이 626년 7월 2일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마린 로드 상방에게 경도된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과 그를 그렇게 인도한 형 황태자 이건성과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을 제거하고 황제가 된 후 신라 진평왕에게 모란도(牡丹圖)를 보낸 건 진평왕이 죽기 바로 전인 631년이었다. 정변을 일으켜 새로 황제가 된 그가 천사옥대 체제라는 국제질서를 수용할 것이냐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는 와중에 당 태종 이세민은 수나라의 양견과 양광에게서 귀중한 교훈을 얻고 있었다. 천사옥대에 관한 논란에 대해 그는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천사옥대를 인정하지만 더는 연장해 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따라서 신라는 천사옥대의 사용이 끝나면 즉시 차(茶) 산업에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벌과 나비가 없는 모란도(牡丹圖)는 총명한 진평왕의 덕만공주에 의해 정확하게 해석되었고 천사옥대 이후의 차(茶) 산업 존속에 대해서는 선덕여왕이 결정하게 하고 진평왕은 죽었다. 632년 1월에 즉위한 선덕여왕은 641년 단오절에 마지막으로 남은 천사옥대의 네모난 판형과 옥대구를 그 해 차(茶) 무역에 대한 금패신표로 사용했다. 천사옥대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642년 정월 당에 조공하면서 차(茶) 산업을 포기할 수 없음을 간곡히 설명했으나 당 태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7월에 백제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당항성까지 공격했다. 8월에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品釋) 등이 희생당했다. 안된다는 당 태종의 답은 강렬했다. 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토록 했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는 거절했고 감금당했다. 여왕은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기록했다. 급박했던 642년의 신라를 담담하게 기록한 사기였다. 백제 의자왕은 부왕인 무왕이 그토록 염원하던 남원- 함양- 거창- 김천까지 연결되는 섬진강 무역로를 구축할 기회를 가졌으나 당항성(党項城)을 태종의 허락 없이 공격했다가 대역죄(大逆罪)를 반성하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철수해야 했다. 당항성(党項城)을 왜 당항성(唐項城)이라 하지 않고 당항성(党項城)이라 했는지 몰랐던 의자왕이었다. 고구려가 당성(唐城)이라고 불러 당나라 것인 줄만 알았던 의자왕이었다. 천사옥대 체제를 만들어 낸 당(黨)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한 의자왕이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의 동아시아 지역  출처:인문 360

 여왕은 당에서 돌아온 자장율사에게서 신라 차(茶)를 계속 구매하겠다는 머천트와의 계약을 보고 받고 일본 찻잎을 실어 나르는 무역선들의 야간 항해를 가능하게 하도록 황룡사 9층탑 건립을 명했다. 천사옥대를 가지고 벌어들인 막대한 보물과 비단의 일부를 풀어 643년에 시작된 역사(役事)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구층탑을 완공하면서 645년에 끝났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모든 무역선을 황룡사 구층탑을 등대처럼 사용해 울산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장율사가 새로 창건한 태화사(太和寺)에서 찻잎들을 처리하게 하였다. 644년 연개소문은 당 태종에 대한 결연한 대결 의지를 보여주었고 마린 로드 상방은 임박한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에 대해 고구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640년 설치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는 당 태종이 향후 무역로의 중심을 바다가 아닌 실크로드에 두고 있음을 명백히 한 사건이었다. 당 태종을 정점으로 한 30만 정예기(騎)는 이제 대적할 군세가 없는 천하무적이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마저 돌궐처럼 무너지게 되면 마린로드 상방의 본영(本營)으로 칼끝이 겨눠지게 될 거라는 우려가 설연타(薛延陀)까지 매수(買收)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이 모이게 했다. 수 양제에게 을지문덕이 있었다면 당 태종에겐 안시성의 양만춘이 있었다. 양만춘도 을지문덕만큼 불가사의한 역사를 만들고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마린 로드 상방은 이로써 천사옥대(天賜玉帶)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낼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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