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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Nov 07. 2022

선덕여왕과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의 진실 2

첨성대(瞻星臺)를 지어 동짓날을 정확히 가려내도록 했다. 동짓날을 정확히 가려내야 동짓날 이후 140번째 해돋이가 청명(4월 5일)이 되고 그 후 20번째 해돋이가 곡우(4월 20일)라는 걸 틀림없이 계산해 언제 찻잎을 따야 하는지 일본에 가있는 사신(使臣)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진평왕이 이미 583년부터 설치해 운영해 온 선부서(船府署)에 명령해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기간 동안 채엽(菜葉)되는 많은 찻잎(茶葉)을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선박들을 더 많이 조선(造船)토록 해 일본으로부터의 찻잎(茶葉) 수입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선부서(船府署)에서 개발한 평저선(平底船)은 조수(潮水) 간만(干滿)이 커서 뻘(갯벌)이 많은 신라의 해안(海岸)을 모두 천혜(天惠)의 항구(港口)들로 만든 걸작(傑作)이었다. 아버지 진평왕이 584년 선부서(船府署)에 이어 설치한 승부(乘府)에 명령해 가공이 끝난 차(茶)를 신속히 실직주(悉直州:동해 삼척)와 하슬라주(何瑟羅州=명주溟州:강릉)로 수송할 수 있도록 수레(車)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지금의 동해항과 강릉항을 떠난 배들이 울릉도(鬱陵島)를 거쳐 연해주의 혼춘(琿春:Hunchun)으로 입항해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하(Buerha: 포미합통하)를 통해 목단강(牧丹江:Mudanjiang)으로 연결되었다. 목단강은 송하강(松花江) 하류와 합해져 흑수(黑水)로 흘러갔다. 흑수(黑水:Amur Riber) 이북으로 차(茶)를 수출하는 해상 무역로가 개척되었던 것이다. 계절풍(季節風)과 해류(海流)때문에 봄에만 출항(出航)할 수 있는 차(茶) 수출선(輸出船)들은 일본에서의 찻잎 채엽(菜葉) 시기와 겹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제때에 떠날 수 있었다. 

동지를 정확하게 정하기 위해 세운 첨성대             출처:위키미디어

645년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알이 뽑힐 때 완공된 85미터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은 개운포(開雲浦) 같은 동해안의 항구들을 찾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무역선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훌륭한 등대(燈臺) 역할을 해냈다. 먼 훗날 무스캇(muscat)에서 온 처용은 이 목탑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신속한 찻잎(茶葉) 가공을 위해 그리고 여왕의 차(茶) 산업을 유지하겠다는 강건한 의지를 선포하기 위해 당 태종이 향기(香氣) 없는 모란(牧丹) 그림을 보낸 2년 후인 634년에는 분황사(芬皇寺)가 창건되었다. 황제가 없다던 향기가 여기 있다며 분황사는 그렇게 당 태종을 조롱하듯 세워졌다. 632년에 즉위한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 태종이 죽기 2년 전인 647년에 죽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해 죽어가는 와중에도 신라에서 차(茶)의 향기를 없애기 위해 비담(毗曇)을 646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상대등(上大等)으로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이끌던 비담은 당나라에 신라 사신으로 가서 태종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해야 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차(茶) 무역을 파괴시키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는 것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태종은 아홉째 아들 위진왕(魏晉王) 이치(李治)에게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幇) 대표들 앞에서 의식(儀式)까지 올리게 한다. 그런 그에게 황위가 이어지게 하기 위해 626년부터 황태자였던 이승건(李承乾)과 넷째 아들 복왕(濮王) 이태(李邰)가 희생(犧牲)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비담(毗曇)은 칠숙(柒宿) 이후 또다시 강력하게 차(茶) 무역 폐지를 주장했다. 심상치 않은 신라의 움직임에 일본 또한 그해 가을(646년 9월), 사신(使臣) 타카무코도 쿠로마로(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 정확한 신라의 입장을 확인하려 했다. 일본 찻잎(茶葉) 수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하겠다는 선덕여왕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국서를 들고 일본 사신은 귀국했다. 결국 비담(毗曇)은 일본 사신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된 선덕여왕의 차(茶) 무역 고수(固守) 결정을 듣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반란의 와중(渦中)에 선덕여왕은 죽었고 반란이 진압되자 김춘추는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선덕여왕의 차(茶) 무역 고수 정책이 철회(撤回)되었음을 통보했다. 통보받은 일본은 김춘추를 억류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일본서기 (日本書紀) 고우토쿠 천황 편에는 김춘추의 솔직한 찻잎(茶葉) 수입중지(輸入中止) 통보에 대한 일본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었다. ‘김춘추는 용모와 얼굴이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했다.’ 그때가 647년이었다.  다음 해인 648년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데리고 함께 당나라 장안을 방문해 차(茶) 무역을 중지했음을 알리고 당 태종에게서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이끌어 냈다. 643년에 장안을 방문해 군사동맹을 제의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어 남들이 우습게 본다는 모욕을 주며 거절했었다.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 가공해 차(茶)를 만들고 이 차(茶)들을 해상 무역으로 전 세계에 판매하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으면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 신라왕을 시키겠다는 협박(脅迫)마저 서슴지 않았던 당 태종이었다. 일본 찻잎(茶葉) 수입 중지 조치는 자신의 아들 대(代)에도 지속(持續)될 것이라는 것을 김춘추가 약속해도 믿지 않았던 당 태종은 함께 간 김춘추의 셋째 아들 김문왕이 면전에서 조아리며 약속하자 믿어 주었다. 그 증표(證票)로 진덕여왕 이후 신라왕은 김춘추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선덕여왕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지켰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여왕이 죽고 일 년이 채 안되어 사라졌다. 일본 찻잎(茶葉)의 신라로의 수입은 중지되었고 차(茶)를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역사 기록 속에서마저 철저히 사라졌다. 차(茶)를 실크 로드 무역로(貿易路) 위로만 유통시키려는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幇)의 계획은 성공가도를 질주(疾走)하고 있었고 신라를 사로(斯盧)라 부르게 한 시루(斯盧 si lu) 또한 그저 떡이나 찌는 기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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