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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Nov 07. 2022

선덕여왕과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의 진실 1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오자 왕이 그림에 등장하는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씨를 정원에 심도록 명했거니와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初唐太校勘 宗送畫牧丹三色紅·紫·白以其實三升. 王見畫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果如其言.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여쭈니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내가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했다.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畫花而無蝶知其無香斯, 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편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백성이 왕의 딸 덕만(德曼)을 세우니, 그가 선덕 여왕(善德女王)이다. 처음에 당(唐) 나라 황제가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와서 진평왕(眞平王)이 덕만에게 보여 주었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꽃이 매우 예쁘지만 그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더니 과연 그러하였고, 우리나라[東國]의 모란꽃이 이때부터 많아지기 시작했다. -동국역사 권 1(삼국기(三國記)

모란도    출처: 문화재청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아들 백결선생(百結先生)에게 구술(口述)해 남긴 역사서 증심록(證心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만년(萬年)에 가까운데 그런 만년(萬年)의 우리 민족 역사상 여왕(女王)이 나라를 다스린 건 신라(新羅)가 유일했다. 그것도 세분이나 여왕이 나와 다스렸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세 분 중 진덕여왕(眞德女王)과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사실 여러 면에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에 비해 그 중요도와 지명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그건 아마 우리 민족이 선덕여왕과 함께 극복하려고 모든 애를 썼던 민족사적 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졌다 하더라도 함께 피 흘리며 버틴 싸움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불멸(不滅)의 역사(歷史)가 된다.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수(隨) 양제(煬帝)를 암살하고 당(唐) 나라를 건국한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연(李淵)은 수(隨) 양제(煬帝)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깬 건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마저 협박해 황제가 된 일이었다.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으로 기록된 이 정변(政變)을 모든 사람들이 경악으로 받아들일 때 앞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과 당 태종의 집권이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들인지를 꿰뚫는 사람이 있었다. 17살에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왕(王)으로 산 지 50년이 넘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었다.


 632년 당나라 황제 태종이 신라왕 진평왕에게 홍(紅) 자(紫) 백(白) 세 가지 색(色)의 모란꽃 그림과 함께 그 모란 씨들을 보내왔다. 먼 훗날 고려의 대신(大臣) 김부식(金富軾) 은 그렇게만 썼다. 그러나 고려의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기이(奇異) 한 일이라며 중언부언 썼다. 630년 당 태종은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키고 초원로(草原路)라 불리던 무역로(貿易路)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실크 로드라 불리던 무역로 (貿易路)의 지배권은 이미 당 태종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칸과 황제를 한 몸에 가진 역사는 그가 처음이었다. 땅 위에 세워져 있던 모든 무역로(貿易路)를 한꺼번에 장악한 그가 이제 바다를 누비는 신라왕에게 그림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림이 당도한 건 이찬(伊湌) 칠숙(柒宿)이 아찬(阿飡) 석품(石品)과 함께 일으키려 한 반란(叛亂) 모의에 대해 조정의 이인자였던 칠숙(柒宿)을 동시(東市) 저잣거리에서 참수(斬首)하고 그의 구족(九族)을 연좌제(連坐制)로 절멸(絶滅)시킨 일명 칠숙석품의 반란사건을 진압(鎭壓)한 직후였다


진평왕(眞平王)은 할아버지 진흥왕(眞興王)이 죽고 작은 아버지 진지왕(眞智王)이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얼마 안 가 쫓겨나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때처럼 또다시 지독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고 있었다. 578년 진지왕(眞智王)은 남조(南朝)의 진(陳)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 신라에서 가공 처리한 차(茶)를 바치며 일본 찻잎을 수입 가공해 만든 차(茶)의 무역 확대를 요청했었다.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실크 로드 무역상방(貿易商幇)들에게 난도질당한 이후 폐쇄되었던 차무역(茶貿易)을 재개(再開)하려는 신라의 시도였다. 그런 제안(提案)을 한 지 일 년이 못돼 진지왕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신라의 왕위(王位)는 18살이 채 안된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아들인 진평왕에게로 넘겨졌었다. 남조의 진(陳) 나라가 실크 로드 무역상방(貿易商幇)들의 지원을 받은 수(隨) 양제(煬帝)에게 짓밟히고 수양제(隨煬帝)가 대운하(大運河) 건설 이후 해상무역 진흥에 나서는 배신(背信)으로 실크 로드 무역상방(貿易商幇)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目睹)한 진평왕이었다. 진지왕이 차(茶)의 해상무역 확대를 요청한 것이 파국적인 결말의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평왕이었다. 


 진평왕(眞平王)은 올게 왔다고 생각했다. 당 태종이 세 점의 모란도(牧丹圖)를 보내오기 직전,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가공한 후 수출하는 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을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上疏)가 올라왔다. 그럴 수 없다는 진평왕에게 이찬(伊湌) 칠숙(柒宿)과 아찬(阿飡) 석품(石品)이 반란 모의로 진평왕의 부상국(扶桑國:일본)과의 동맹 고수(固守) 정책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표면화했다. 신라 17 관등(官等) 중 두 번째 서열인 이찬(伊湌)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이루어진 신라 귀족들의 여론을 전달하는 자리였고 여섯 번째 서열인 아찬(阿飡)은 지방관(地方官) 이상의 고위 관료들의 여론을 대표하는 관직(官職)이었다. 신라 지배층을 이루고 있는 성골(聖骨) 진골(眞骨)과 6두품(六頭品)들이 일본(日本)과의 동맹(同盟)을 파기(破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진평왕은 객부(客府)가 있는 동시(東市)에서 칠숙(柒宿)과 그의 구족(九族)을 목 베어버림으로써 일본 차(茶)의 안정적 공급을 전 세계 상인들에게 특히 민감하게 주시하는 파사국(婆娑國) 상인들에게 행동으로 약속했다. 객부(客府)에 머무르는 상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신라가 만든 차(茶)를 원하는 만큼 사가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본에서 찻잎(茶葉)이 충분히 수입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코흘리개 밖에 없었다. 백제로 도망갔던 석품(石品)이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당 태종의 그림이 바다를 건너온 거였다.


당 태종이 보내온 세 점의 모란도(牧丹圖)는 태종의 의도(意圖)를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목단(牧丹)이라고 한자로 쓰이는 모란은 차(茶) 나무와 찻잎을 뜻하는 오래된 암호였다. 목(牧)이라는 글자는 소 우(牛)와 칠 복(攵)이 결합된 글자인데 인간과 처음부터 함께였다는 소(牛)를 강조하는 글자였다. 소(牛)의 제일가는 장점은 차(茶) 나무를 잘 찾는다는 것이었다. 찻잎을 제일 좋아해서 찻잎 냄새(香)를 기억해 어디서든 차(茶) 나무를 찾아내는 소(牛)는 그래서 인간에게 특별한 존중을 받게 되었다. 이름에 찻잎을 뜻하는 점 주(丶)가 있는 개(犬)나 돼지(猪)도 차(茶) 나무를 잘 찾았으나 그러나 그들은 찾아낸 차(茶) 나무에 달려들어 나무 밑 땅을 파헤쳐 차나무의 뿌리를 손상시키는 저주(咀呪) 받을 짓을 저지르는 짐승(獸)들이었다. 인도(India) 사람들이 소를 숭상(崇尙)하는 건 그들이 그들에게 차(茶) 나무 있는 곳을 알려주어 생명을 이어가게 해 준 은공(恩功)때문이었다. 단(丹)이란 삼면이 돌로 둘러싸인 고인돌(dolmen) 안에서 찻잎(茶葉)을 가공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였다. 해가 지면 찻잎들은 고인돌 안에 두고 출입문으로 쓰는 돌을 닫아 보호했다. 결국 모란도(牧丹圖)는 차(茶) 나무와 찻잎 가공을 의미하는 그림이었다.


홍(紅) 자(紫) 백(白) 세 가지 색깔의 모란(牧丹)은 일본에서 나는 찻잎을 수입 가공해 차(茶)로 수출하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상징했다. 그중 자(紫) 색의 모란(牧丹)이 백제를 의미했다. 백(白) 색의 모란(牧丹)은 고구려를, 홍(紅) 색의 모란은 신라를 의미했다. 진평왕(眞平王)의 큰 딸 덕만(德曼)은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정확히 답했다.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차(茶) 무역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茶)를 의미하는 모란꽃에 상인(商人)들을 뜻하는 벌과 나비가 꼬이지 않는 건 무역로(貿易路)를 막아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찻잎을 가공 생산해도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진평왕이 다시 물었다. 어찌하겠느냐?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겠습니다. 덕만(德曼)은 얼마 안 있어 죽은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왕이 되었다. 최초의 여왕(女王)이었다. 여왕의 곁에는 동생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 김춘추(金春秋)가 있었다. 춘추가 곁에 두고 있는 김유신(金庾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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