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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Jun 25. 2023

자장율사 1

백제 무왕의 정체와 누더기 장삼가사의 유래

1. 백제 무왕의 정체

대국통 자장율사 영정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말살(抹殺) 하기 위해 당(唐) 태종(太宗)이 모란도(牧丹圖)를 보내며 강력한 압살정책(壓殺政策)을 펼 때, 죽을 때까지 그에 저항(抵抗)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647년 당 태종의 사주(使嗾)로 벌어진 비담(毗曇)의 반란(叛亂) 중에 훙서(薨逝)한 이후 결국 신라가 차(茶) 산업을 포기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백제(百濟) 때문이었다. 실크 로드 상방(商幇)과 손을 잡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지원(支援)으로 끊임없이 신라를 침략한 백제 때문에 신라는 실크 로드 상방(商幇)이 원하는 대로 일본 찻잎(茶) 수입가공무역(貿易)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키워 온 백제(百濟)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가 위덕왕(威德王) 사후(死後) 갑자기 왕(王)이 되어 재위(在位) 기간 내내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익산(益山)에 동방 최대의 미륵사(彌勒寺)를 건설하고 금동(金銅)으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제작한 것은 백제가 더 이상 실크 로드 상방(商幇)과 대립각을 세우며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고집(固執) 하지 않았다는 증거(證據)였다. 코끼리와 악어, 원숭이 같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물들이 부조(浮彫)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해양무역을 통해 얻어진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담은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의 발견 경위(經緯)가 증명하듯 천태종(天台宗)이었을 위덕왕(威德王)의 원찰(願刹)은 내팽개쳐 두고 실크 로드 상방(商幇)의 표식(標識)이나 다를 바 없는 미륵사(彌勒寺)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내세운 건 무왕(武王:의자왕의 아버지)이 다스리던 시절의 백제가 어떤 생각으로 역사에 임(臨)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에서 나온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금판(金版)엔 앞 뒷면 합쳐 모두 193자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여기엔 동방(東邦) 최대 규모라 할 이 어마어마한 미륵사(彌勒寺)가 기해년(己亥年) 즉 639년에 창건(創建)되었다고 밝혀 주었다.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 없는 백제 금동대향로의 발견 순간

당시 백제 왕비(王妃)가 왕실(王室)의 안녕(安寧)을 기원(祈願)해 재물을 희사(喜捨)해 지었다고 했으니 미륵사(彌勒寺)는 당시 백제 무왕(武王)의 뜻이 담긴 불사(佛事)였다. 결국 미륵사지(彌勒寺址)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가 알려준 건 모든 해양 세력을 없애버리고 모든 차(茶)들을 실크 로드로만 교역하려는 실크 로드 상방의 독점(獨占)을 위해 가장 방해(妨害)가 되는 고구려와 신라를 없애는데 백제가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신라를 없애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남제(南齊)와 양(梁) 나라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武寧王), 성왕(聖王)과 함께 사라진 후 홀로 실크 로드 상방(商幇)의 차(茶) 독점(獨占) 공작(工作)에 맞서던 위덕왕(威德王)이 죽자 삼한(三韓)의 차(茶) 해상무역(海商貿易)을 지켜내던 백제는 없어졌다. 백제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도, 법왕의 아들도 아니었다. 즉위 과정만이 의문(疑問)인 것이 아니라 즉위 전 인생 자체가 의문투성이인 정체불명의 백제왕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와의 전쟁에만 골몰했다. 실크 로드 상방의 지원(支援)을 받아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라는 쿠데타로 626년 황제가 된 당(唐) 태종(太宗)이 국가권력을 이용해 육성한 불교 종파(宗派)가 법상종(法相宗)이었고 그 법상종의 주불(主佛)이 미륵불(彌勒佛)이었다. 해상무역에 천착(穿鑿)한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주불(主佛)은 법화경(法華經)의 주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었고 그래서 천태종단 법당엔 대웅전(大雄殿)이란 현판(懸板)이 걸린데 반해 실크 로드로의 무역만을 강요한 법상종단 법당엔 미륵전(彌勒殿)이나 용화전(龍華殿)이란 현판(懸板)이 걸렸다. 그랬던 것이 당 태종의 권력을 등에 업은 법상종단의 계속된 무자비한 탄압(彈壓)으로 절멸(絶滅)의 위기에 몰린 천태종단이 자구책(自救策)으로 내세운 게 화엄종(華嚴宗)이었고 그래서 법당(法堂)의 현판(懸板)은 화엄전(華嚴傳)이나 비로전(毘盧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보광명전(普光明殿) 등으로 바뀌었다. 화엄종단(華嚴宗團)의 주불(主佛)은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었다. 법상종을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법상종(法相宗) 개조(開祖)인 삼장법사 현장(玄奘)의 법통(法統)을 이은 규기(窺基)가 서안(西安)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천태종(天台宗) 승려(僧侶)들에 대한 학살(虐殺)을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천태종 승려들의 피를 뒤집어쓴 규기(窺基)가 자은대사(慈恩大師)로 불린 건 희생(犧牲)된 천태종 승려들에 대한 희롱(戲弄)이었다. 그는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이 한창 도륙(屠戮)되고 있을 때 새로 정립(定立)된 화엄종(華嚴宗)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원융(圓融)은 천태종(天台宗)의 가면(假面)이다.” 역시나 이 말은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불교의 지존심 성철 종정과 누더기 가사

2. 누더기 장삼과 가사, 탁발의 유래

중국 서안(西安) 동남쪽에 있는 중난산(終南山)에 화엄종(華嚴宗)의 본사(本寺)로 알려진 운제사(雲際寺) 승려 천명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원효(元曉)의 척반(擲盤) 신력(神力)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사건은 이 당시 법상종(法相宗) 승려들이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을 잡아 죽였는지 그리고 천태종단의 사찰들을 파괴했는지 은유(隱喩)하는 기록이다. 사찰은 파괴되고 학살되기 일보직전에 놓여 있던 그 천명(千名)이나 되는 천태종 승려를 신라로 데려와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해 모두 득도(得道)케 했다는 양산(梁山) 천성산(千聖山) 화엄벌 설화를 만든 건 그런 법상종 승려들에게 살육(殺戮)을 그치라 화쟁(和諍)을 외친 원효(元曉)였다.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본사(本寺)라는 부석사(浮石寺)의 법당(法堂)이 화엄종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이 아니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정토(淨土)가 있는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모셔져 있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는 현판(懸板)을 달고 있는 이유도 무자비한 자은종단(慈恩宗團:법상종단의 또 다른 이름)의 학살(虐殺)과 사찰 파괴(破壞) 때문이라는 사실은 당시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사찰(寺刹)이 법당(法堂)의 현판(懸板)을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대웅전(大雄殿)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자신들의 뿌리가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小衣經典)으로 삼은 천태종(天台宗) 임을 뒤늦게 고백하며 살육과 파괴(破壞)로 일관한 법상종단(法相宗團)의 만행(蠻行)을 고발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큰 돌들을 날아다니게 하는 기적(奇蹟)을 보이고 나서야 겨우 사찰 건립을 한사코 방해하던 도적(법상종단 승려)들을 내쫓고 건립되었다고 하여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창건설화(創建說話)도 모두 다 차산업(茶産業)을 독점(獨占)하려는 실크 로드 상방(商幫)의 지원을 받은 자은종단(慈恩宗團:법상종단)의 만행(蠻行) 때문이었다. 천태종(天台宗:해양무역파)이라면 승려(僧侶) 학살과 사찰(寺刹) 파괴(破壞)를 일삼는 법상종단의 폭력 앞에 천태종 승려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선승(禪僧)이 되는 길 뿐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스승이 누구인지도 밝힐 수 없어 나중에는 사제지간(師弟之間) 자체가 헷갈리는 것이 선종(禪宗) 수행자(修行者)가 보여야 하는 특징(特徵)이 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이었다.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던 엄연(儼然)한 사찰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압수(押收)당하고 사찰 내 전각(殿閣)들도 모두 다 파괴되어 살해(殺害)당하지 않으려면 도망을 쳐야만 했다.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장삼(長衫)을 구할 수 있는 아무 천으로나 덧대 기워 입고 탁발(托鉢) 아니고는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었던 천태종 승려였다. 성철 스님의 누더기 장삼으로 대표되는 수행선승(修行禪僧)의 이미지는 이때 고착화(固着化)된 슬픈 역사의 산물이었다. 파계(破戒)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동냥질 말고 없없던 천태종 승려들의 비극은 차산업(茶産業)을 독점하려는 실크 로드 상방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추워져만 가는 기후변화는 실크 로드(Silk Road)가 아닌 마린 로드(Marine Road)로 교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알려 주고 있었건만 기후(氣候) 온난화(溫暖化) 시절 패권(覇權)을 장악했던 실크 로드 상방(商幇)은 그 패권을 놓치려 하지 않았고 마린 로드(Marine Road) 무역을 고집(固執)했던 천태종은 그렇게 선종(禪宗)으로 옷을 바꿔 입고 고난(苦難)의 생존을 지켜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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