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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17. 2023

자장율사 2

3.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의 목적과 오대산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재건(再建)해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전비(戰費)를 마련해 달라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부탁을 받은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이 실크로드 상방의 차산업 (茶産業) 독점에 첨병(尖兵)으로 나선 법상종 승려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문무대왕의 청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곳은 바로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이미 다녀갔던 명주(溟州: 강원도)였다. 속초(束草) 양양(梁陽)이었다. 당 태종과 그의 사주(使嗾)를 받은 백제 무왕(武王)의 압박으로 결국 선덕여왕이 죽고 그런 그녀를 통도사(通道寺)와 태화사(太和寺)로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木塔) 건설로 뒷받침했던 자장(慈藏)이 최고(最高)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서 실각(失脚)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85 미터 높이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첨탑(尖塔)은 동해(東海)를 통해 경주(慶州)를 향해 오는 모든 무역선(貿易船)들을 안내하는 이정표(里程標)와 등대(燈臺) 역할을 했고 울산(蔚山) 태화강변(太和江邊)에 지은 태화사(太和寺)는 그런 무역선들에 실려 있는 찻잎들을 모두 인수한 후 증차(蒸茶) 제조를 위해 통도사(通度寺)로 보내는 역할을 했었다. 선덕여왕이 죽자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포기(抛棄)하는 대가(代價)로 나라의 보존(保存)을 얻어냈고 그래서 새로운 차(茶) 산업기지(産業基地)의 비밀스러운 구축(構築)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요청(要請)이 되었다. 

동에서 서로 귀결하는 자장율사의 목숨과 바꾼 명주 차 무역로

 새롭고 비밀스러운 차(茶) 교역로(交易路)를 만들기 위해 실각(失脚)한 채 경주(慶州)를 떠난 자장(慈藏)이 선택한 곳은 최오지(最奧地)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이었다. 동예(東濊)로, 하슬라(何瑟羅)로 불리던 시절부터 울릉도(鬱陵島)를 통해 일본 찻잎 무역선(貿易船)이 해류(海流)와 계절풍(季節風)에 말려 본의 아니게 들어오고 있던 명주(溟州)가 그의 목표였다. 신라 전래(傳來)의 차(茶) 산업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오대산(五臺山)까지 들어간 자장(慈藏)은 마침내 새로운 차(茶) 교역로(交易路)를 만들어냈다. 강릉(江陵)과 평창(平昌), 동해(東海)와 정선(㫌善), 영월(寧越), 속초(束草)와 횡성(橫城), 원주(原州), 단양(丹陽)과 충주(忠州), 원주(原州)와 제천(堤川), 괴산(槐山)과 공주(公州)에 사찰(寺刹)들을 새로 건립(建立)하거나 기존의 사찰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최초의 내륙(內陸) 횡단(橫斷) 교역로(交易路)가 만들어졌다.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이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같은 내륙 종단(縱斷) 교역로를 만든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횡단(橫斷) 교역로의 이름은 차령(車嶺). 수레 거(車) 자로 위장(僞裝)했으나 그것은 분명 차령(茶嶺)이었다. 피 물고 덤벼드는 실크로드 상방의 청부업자(請負業者) 법상종 승려들의 경계(警戒)를 풀기 위해 차령(茶嶺)은 차령(車嶺) 말고도 산맥(山脈)이라는 위장막(僞裝幕) 하나를 더 뒤집어써야 했다. 차령산맥(車嶺山脈). 산맥 아닌 산맥이 만들어진 연유였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그 차(茶)들을 구입(購入) 해 줄 머천트(Merchant:차상인)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만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自責)한 자장(慈藏)은 가리왕산(加里旺山)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자장(慈藏)이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苦待)하던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사실은 선덕여왕이 통치하고 있던 시절, 수많은 위험에도 신라 차(茶)를 구입해 주던 머천트(Merchant 茶商人)였고 그 머천트(Merchant 茶商人)는 싸고 질 좋은 신라차(茶)를 대량으로 판매(販賣)하는 자장(慈藏)을 신뢰(信賴)했었다.

차 교역로가 확보되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세워진 수마노탑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신라차(茶)를 구입해 줄 머천트(Merchant 茶商人)를 만나 선덕여왕의 신라 차산업(茶産業) 보전(保全) 정책(政策)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던 자장(慈藏)이었기에 선덕여왕이 없는 지금, 그때의 기적(奇蹟)을 재현(再現) 해 줄 거라는 염원(念願)을 담아 해동(海東) 오대산(五臺山)이라 명명(命名)한 그곳으로 그를 비밀리에 초청(招請)한 자장(慈藏)이었다. 선덕여왕이 없는 지금, 신라의 오대산(五臺山)으로 그를 비밀리에 초청해 신라 차(茶) 산업현황을 보여주며 정선(旌善) 정암사(淨岩寺)에 세운 수마노탑(水瑪瑙塔)을 보여주며 탑 자재(資材)를 실어올 만큼 교역로도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걸 확인시키며 중단된 차수출(茶輸出)을 재개(再開)하려던 자장(慈藏)의 계획은 그러나 실패했다. 세계 시장에 신라 차(茶)가 교역되고 있는지를 삼엄(森嚴)하게 감시하는 실크로드 상방(商幇) 때문에 접선(接線) 장소도 옮기기도 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위장(僞裝)도 하며 자장(慈藏)과 오랜 관계를 맺어 온 머천트(Merchant 茶商人)도 자장(慈藏)을 만나려 했지만 자장에게 실크 로드 상방이 심어놓은 세작(細作)의 방해(妨害)로 변장(變裝)한 머천트를 알아채지 못한 자장(慈藏)의 실수로 결국 신라 차(茶) 수출계약(輸出契約)은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을 비밀 터전으로 하여 오랫동안 자장(慈藏)과 차무역(茶貿易)을 이어온 머천트를 그가 원한 갈반지(葛蟠地)에 정암사(淨巖寺)를 창건하고 자장(慈藏)은 기다렸건만 그는 자장(慈藏)을 만나지 않고 돌아섰다. 아니 만나지 못하게 하였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버린 그였다. 그를 돌아서게 한 건 세작(細作)으로 들어와 있던 시자(侍子)의 간계(奸計)때문이었다. 그 시자는 용화향도(龍華香徒)의 화랑(花郞)이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제4권 자장정율조(慈藏定律條)에 이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의 깊은 갈반처(葛蟠處:정암사)를 찾았다. 어느 날 어떤 노거사가 남루한 가사를 수하고 칡으로 된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와서는 시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했다. 시자는 “스승을 받들어 모시면서부터 나의 스승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를 보지 못하였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러한 광언(狂言)을 하는가”라고 답했다. 이에 거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스승에게 고하여라”라고 했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니, 자장이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심각한 광자(狂者)인가 보다”라고 했다. 시자가 나와서 그를 쫓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삼태기를 뒤집어서 터니 죽은 개가 변화하여 사자보좌(師子寶座)가 되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 방광 하며 떠나갔다. 자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바야흐로 위의 를 갖추고 방광한 빛을 찾아서 남쪽봉우리(南嶺)로 황급히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묘연(杳然)하여 미칠 수 없게 되니 마침내 몸이 떨어져서 죽었다(殞身). 이에 다비(茶毘)하여 뼈를 돌구멍 가운데 안치했다.》


4.  산맥일 수 없는 차령이 산맥이 된 이유

대마난류(對馬暖流)가 대마도(對馬島) 북쪽을 지날 때 갈라져 나와 신라의 남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北上)하는 동한난류(東韓暖流)는 울릉도(鬱陵島) 부근에서 남하(南下)하는 한류(寒流)와 만나 큰 소용돌이를 만들며 환류(還流)하는데 이러한 현상 때문에 강릉과 동해, 울진(蔚珍)과 영덕(盈德) 지역에서는 피항(避港)하는 찻잎(茶葉) 무역선(貿易船)들이 많이 들어오는 포구(浦口)였다. 일본 찻잎(茶葉)을 독점(獨占) 하기 위해 신라의 차(茶) 무역(貿易)을 한사코 막아서는 실크 로드 상방(商幇)의 감시(監視)와 견제(牽制)를 뚫고 이렇게 어렵사리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들을 가공해 다시 무역로(貿易路)에 올리기 위해 자장(慈藏) 대사가 새로 만든 일명 차령(車嶺)은 강릉과 동해, 삼척(三陟)으로 들어오는 찻잎(茶葉)을 정선(旌善)과 영월(寧越)로 연결하는 주선(主線)과 속초(束草), 양양(襄陽)으로 들어오는 찻잎(茶葉)을 평창(平昌)과 원주(原州)로 연결하는 배선(陪線) 이렇게 두 개의 공급선(供給線)이 연결된 교역로였다. 영덕(盈德)과 울산(蔚山), 기장(機張)으로 들어오는 차(茶)를 양산(梁山)으로 연결하는 또 하나의 교역선(交易線)은 선덕여왕 때 가동되던 전성기(全盛期) 시절의 교역로였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친견(親見)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시대로 황룡사에 9층 목탑(木塔)을 세우고 태화사(太和寺)를 창건했던 시절의 교역로는 차령로(車嶺路)와는 별개인 소백산맥 이남의 교역로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영덕(盈德)의 유금사(有金寺), 포항(浦項)의 천곡사(泉谷寺), 울산(蔚山)의 태화사(太和寺)에서 각각 들어온 찻잎(茶葉)들을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에서 집산(集散)해 증차(蒸茶)로 제조한 뒤 밀양(密陽)의 보림사(寶林寺)를 거쳐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 청주(淸州)의 동화사(東華寺),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보령(保寧)의 무량사(無量寺)로 옮겨 수출(輸出)하는 경로(經路)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자장대사도 대국통(大國統)에서 실각(失脚)하자 결국 이 교역로는 폐쇄(閉鎖)되었다. 이후 신라의 차(茶) 산업을 지키려는 자장대사의 희생(犧牲)적인 노력으로 새롭게 개척(開拓)된 차령로(車嶺路)는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 평창(平昌)의 수다사(水多寺), 정선(旌善)의 정암사(淨巖寺), 영월(寧越)의 흥녕사(興寧寺:지금의 法興寺), 단양(丹陽)의 대흥사(大興寺) 그리고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로 연결되는 동서 횡단(東西橫斷) 무역로(貿易路)였다. 지금 산맥(山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차령(車嶺) 산맥을 굳이 산맥으로 불려지게 한 건 신라의 차(茶) 산업(産業)을 한사코 없애려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감시(監視)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위장책(僞裝策)이었다. 자장(慈藏) 대사가 결국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세작(細作)의 방해(妨害)로 정암사(淨巖寺)까지 변장(變裝)을 한 채 찾아온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 머천트(Merchant)를 친견(親見) 하지 못한 채 가리왕산(加里旺山)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신라인들의 원망(怨望)은 깊었다.

선덕여왕 생전의 차무역로(녹색선)와 사후 자장율사 차무역로(적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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