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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17. 2023

진상 손님과 자장가의 유래

 자장율사 3

5. 진상 손님과 진상 떤다의 유래


실크로드 상방(商幫)을 이루는 두 개의 축(軸)인 진상방(晉商幫)과 소그드(Sogd) 상방(商幫)중 소그드인들을 볼 수 없었던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의 차(茶) 산업을 말살(抹殺)하고 차(茶) 무역을 독점하려는 세력이 오직 진상방(晉商幫)인 줄만 알고 진상(晉商)만을 원망(怨望)하고 저주(咀呪)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진상손님’과 ‘진상 떤다’라는 말은 임금에게 공물(貢物)을 바치는 진상(進上)에서 유래( 由來)된 말이 아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심심산골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누볐던 절세의 애국자 자장(慈藏) 대사를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한 진상(晉商)들을 신라인들은 사람들을 막 대하는,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뻔뻔하게 구는 철면피,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을 상놈 중의 상놈이라고 하여 진상이라 하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진상 떤다라고 혐오(嫌惡)했다. 방언(方言) 연구가 김성재 씨가 “‘진상’과 ‘진상 떨다’라는 방언(方言)을 쓰는 지역은 경북(慶北)과 충남(忠南)이다. 경북에서도 청송·의성·예천·봉화 같은 북부지역과, 충남과 접경을 이루는 문경·상주 등에서 널리 쓰인다. 충남에서는 거의 전역에서 쓰는데, 대표적인 지역으로 공주·부여·논산 등지와 대전을 꼽을 수 있다.”라고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최태호 교수의 글에서 발췌)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장대사가 개척한 차령로(車嶺路)로 수송(輸送)된 신라의 증차(蒸茶)가 전 세계로 수출되는 곳이었던 충남에서 그리고 통도사에서 만들어진 증차(蒸茶)를 보령(保寧)으로 보내는 계립령(鷄立嶺)이 있는 문경(聞慶)과 보은(報恩)을 통해 공주(公州)와 보령(保寧)으로 연결하는 상주(尙州)에서 ‘진상’이라는 방언(方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덕여왕대 차무역로(녹색선)과 대국통 자장율사의 차무역로(적색선)

 신라인들이 ‘진상이다’ 또는 ‘진상 떤다’ 라며 혐오(嫌惡)하던 진상은 진상(進上)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차(茶)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신라의 차(茶) 산업을 부당하게 힘으로 말살해 급기야 자장대사를 죽음으로 내 몬 진상(晉商)들에 대한 신라인들의 평가(評價)에서 유래한 것이다. 차령로(車嶺路)의 주 무대였던 충남사람들과 경남 해안에서 집산된 찻잎(茶葉)들을 차령로(車嶺路)로 수송하던 역할을 담당하던 경북 북부 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업(生業)을 부당하게 파괴(破壞)하는 진상(晉商) 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일이었다. 이를 좀 더 상세히 알아보면 당시 차령로(車嶺路)로 차(茶)를 보내는 영남지역의 수송로는 크게 세 개였다.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산현(靈山縣:지금의 창녕)의 영축산(靈蹙山)에 있던 보림사(寶林寺)를 떠난 수송대(輸送隊)가 김천(金泉)의 직지사(直指寺), 옥천(沃川) 상원사(上院寺), 대전(大田)을 거쳐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해 자장대사가 새로 건설한 차령로(車嶺路)에 통도사(通度寺)의 증차(蒸茶)를 유통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고려말의 개혁가 신돈(辛旽)의 사찰이었던 밀성군(密城郡) 계성현(桂城縣)의 옥천사(玉泉寺)에서 떠난 양산(梁山)의 증차(蒸茶)가 청도(淸道)의 운문사(雲門寺)와 달성(達城)의 소재사(消災寺)를 거쳐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하는 두 번째. 그리고 영덕(盈德) 유금사(有金寺)에서 떠난 차(茶)들이 상주(尙州)와 보은(報恩)을 거쳐 청주(淸州)의 동화사(東華寺)를 거쳐 역시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하는 세 개의 경로였다.


6. 우리는 왜 아이를 재울 때 자장가를 불러줄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그렇게 절벽에 스스로를 던져 죽은 다음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헌신(獻身)이 보람 없이 사라진 것을 원통(怨痛)해 한 강원도 사람들은 그의 애국애족 정신(情神)을, 그의 헌신(獻身)을 대대(代代)로 전하고자 ‘자장자장’으로 시작하는, 아기 재울 때 부르는 ‘자장가(慈藏歌)’를 만들어 그의 염원(念願)을 아이들에게 알렸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잔다/ 금자둥아 은자동아 만고청산 보배둥아 / 금을 주니 너를 사랴 은을 주니 너를 사랴 / 금두나 다 싫고 옥도 다 싫다 나는 나는 네가 좋아/ 하느님 전엔 충신동아 나라님 전엔 보배둥아 부모님 전엔 효자둥이 일가일신 우애둥아 동네방네 이심둥아/ 인심 좋아 말끝마다 영화로다 너를 사랴” “국가에는 충성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동기간에 우애동이 일가친척 화목동아 동네에는 유신동이 태산같이 굳세어라 악대같이 실하여라 하해같이 깊을 거라, 유명 천하 하여보자”라고 하는 가사(歌詞)들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강원도에서 아기 재울 때 부르는 노래였다.

결국 이 ‘자장자장 소리’는 온 신라에 퍼져 모든 신라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들의 자식들인 아이들에게 불려졌다. 제주도까지 건너간 이 자장자장 소리가 자랑 자랑으로 변해 불려질 정도로 자장대사의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은 온 민족을 감동(感動)시켰고 그의 인생은 실패였으나 자랑으로 기억되었다. 아이들을 재우는 노래를 자장가라고 쓰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뿐이다. 중국인들은 요람곡(搖籃曲)이라고 쓰고 일본인들은 고모리 우다(子守歌)라고 쓴다. 자장가는 한자가 없는 순우리말이 아니다. 자장가는 자장歌가 아니다. 慈藏歌다.


7.  아리랑의 유래


자장대사가 절벽에 떨어져 생을 마친 강원도 정선(旌善)에서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시작된 건 그래서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정선 아리랑의 가사 중 1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慕春) 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울어 / 영감은 할멈치고 할멈은 아치고 아는 개치고 개는 꼬리 치고 꼬리는 마당치고-

여기에서 언급된 만수산(萬壽山)은 다름 아닌 충남(忠南) 보령(保寧) 성주면(聖住面)에 있는 만수산(萬壽山)이었다. 만수산(萬壽山)은 자장대사(慈藏大師)가 개척(開拓)한 새로운 차(茶) 교역로인 차령로(車嶺路)를 완성시키는 보령(保寧)에 있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의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보령(保寧)과 부여(扶餘)의 경계(境界)에 서있는 산(山)으로 후일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터 잡은 성주산(聖住山)은 이 만수산(萬壽山)의 서쪽에 연이어 있는 산(山)이다. 동해(東海)와 삼척(三陟)을 통해 들어온 일본 찻잎(茶葉)들이 아우라지로 집산(集散)되는 곳이 정선(旌善)이었고 그래서 정선 사람들은 자장대사의 좌절(挫折)을 애도(哀悼)했다. 그리고 자장 죽음의 책임은 진상(晉商)과 당(唐) 나라가 져야 함도 알고 있었다. 영감은 할멈치고 할멈은 아치고 하는 마지막 가사에 담긴 논리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진상(晉商)을 압박했고 진상(晉商)이 다시 당(唐) 나라를, 당나라가 신라지배층을, 신라 지배층이 신라의 하급관리들을 차례로 압박했고 그 결과 하급관리인 세작(細作)들이 자장대사(慈藏大師)를 죽게 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노래에 남긴 것이었다. 정선 아리랑과 밀양 아리랑과 함께 3대 아리랑으로 꼽히는 진도 아리랑 가사에는 진도(珍島)에서 멀리 떨어진 문경(聞慶)의 고갯길이 언급된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또한 3대 아리랑 모두엔 신기하게도 똑같은 가사가 하나 있다. 서산에 지는 해가 지고 싶어 진 게 아니라는 가사다. 자장대사가 절벽에 몸을 날린 것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신라인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는 게 아리랑이었다. 그의 정신을 그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아리랑이 그토록 사무치고 그토록 가슴을 치는 이유가 그래서 겨레의 노래로 남은 연유였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 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정선아리랑 이별 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간 날 두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간. (밀양 아리랑)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두고 가신 임은 가고 싶어 가느냐. (진도 아리랑)


 자장대사는 잃어버린 대승통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자장대사는 잃어버린 대국통(大國統)의 승직(僧職)을 되찾기 위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려 한 것이 아니다. 자장 대사는 깨달음과 득도만을 위해 그토록 헌신(獻身) 한 것이 아니다. 자장 대사가 그때 무슨 마음으로 가리왕산(加里旺山)의 절벽에 몸을 던졌는지 잊어버렸기에 우리 스스로도 산맥이 아님을 알면서도 차령로(茶嶺路)를 차령산맥(車嶺山脈)이라 그저 계속 외우게 되었다. 더이상... 아리랑은 겨레의 노래로 일상(日常)에서 불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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