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과 김흠돌 반란은
아랍인들을 차(茶)로 회유하여 실크 로드를 안전하게 하려던 실크 로드 상방의 계획은 성공한 듯 보였으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바다를 통해 차(茶)를 무역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지를 무측천(武則天) 같은 사람들이 알아 버린 것이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고 알려진 무측천은 백제를 없애버리고 그렇게 가져온 어마어마한 양의 차(茶)를 백제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구성된 시박사(市舶使)를 통해 아랍과 페르시아로 선박(船舶)을 통해 수출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던 시박사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장손무기(長孫無忌)등 당(唐) 태종과 함께 정난(靖難)을 이룬 공신들은 뼛속 깊이 실크 로드 상방(商幇)이었다. 664년 당 태종의 처남이자 공신인 장손무기로 대표되는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리던 최후의 선비족 무천진(武川鎭) 출신들이 무측천(武則天)에 의해 제거되었다. 무측천은 장손무기등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북제(北齊) 출신 산동 반도가 고향인 관료(官僚)들을 대거 등용해 관료 집단의 구성 자체를 바꿔버렸다고 신당서(新唐書) 본기(本紀) 제삼 고종(高宗) 편이 기록하고 있는 연유다. 이는 마침내 마린 로드 상방에 대한 무측천의 전향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실크 로드 상방에게로만 기울어져 있던 당나라의 지배층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일이 되었다. 자은종단(慈恩宗團) 이란 이름으로 천태종 승려들을 살인하는 집단이 된 법상종단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高句麗)로 몰려 들어가 당나라에 맞서는 연개소문을 죽을힘을 다해 지원하고 있던 천태종단의 마린 로드 상방이 고구려를 떠나 당나라로 돌아간 건 당연한 수순(手順)이었다. 665년 마린 로드 상방이 사라지고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는 자중지난에 빠져 668년 멸망했다.
674년 8월, 당(唐) 고종은 자신을 천황(天皇)이라고 무측천은 천후(天后)라고 부르라고 명령했다. 무측천이 여인의 몸으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섬돌을 놓아준 조치였다. 무측천(武則天)은 법상종단과 천태종단의 경쟁이 당나라를 망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균형을 이루게 하는 장치를 반드시 확보해서 두 상방(商幇)의 대립이 불가피한 상황이 도래할 때 양측을 제어할 수 있는 지렛대로 사용해야 당나라가 위험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문제가 구축했던 천사옥대 체제를 측천무후가 발견해 내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태종무열왕이 차(茶) 산업을 포기하고 그 반대급부로 얻어낸 당나라와의 군사동맹은 문무왕의 심모원려와 의상대사의 헌신적 애국으로 오히려 삼국통일이란 위업으로 빛나는 역사(歷史)가 되었다. 경흥(慶興)이 시뻘게진 눈을 부라리며 천태종단의 신라 틈입을 경계하면서 온 사방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화엄종단마저 규찰(糾察)하던, 법상종이 신라 전체를 판치던 시대였다. 문무왕이 병석에 들어 차기 왕으로의 즉위가 확실시되는 신문왕에게 무측천이 비밀리에 보낸 제2의 천사옥대 체제 구축에 관한 제안(提案)이 도착한 건 그때였다. 무측천은 황태자 이현(李賢)을 내세워 제2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체제(體制)를 반대하는 실크 로드 상방에게 후일 중종(中宗)이 되는 이현(李顯)으로 황태자를 교체해 버림으로써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게 680년의 일이었다. 신문왕(神文王)은 태종무열왕이 선택한 차(茶) 무역 포기 정책을 되돌려서는 안 된다며 한사코 일본 차(茶) 중계무역 재개를 반대하는 왕비의 아버지, 장인 김흠돌을 모반죄로 다스렸다. 실크 로드 상방의 다른 얼굴인 법상종단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반대하는 태종무열왕 때부터 요직을 맡아오던 모든 귀족과 관료들을 모반죄로 다스리며 신문왕은 제2의 천사옥대 체제에 참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게 681년 신문왕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해인 682년, 흑옥대(黑玉帶)와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신라에 전달되었다. 후일 제2의 천사옥대 체제를 만파식적(萬波息笛) 체제로 부르게 된 연유였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엔 자세한 협약의 세부 내용이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용(龍)으로 묘사된 무측천이 파견한 사신(使臣)은 흑옥대에서 뗄 수 있게 부착된 과(窠)가 금패신표(金牌信標)처럼 사용될 것이라고 알려주며 천사옥대가 62번의 차(茶) 무역을 보장했던 반면 만파식적은 최대 18번의 차(茶) 무역을 보장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有龍奉黑玉帶來獻/ 此玉帶諸窠皆眞龍也/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弟二窠沈溪) 두 개의 다른 대나무를 수직으로 반을 쪼개어 그 반쪽끼리 붙여 만든 특수한 죽적(竹笛)에는 두 개의 대나무를 붙인 이음새를 따라 판 구멍이 9개가 있었는데 취구(吹口)와 청공(淸孔), 칠성공(七星孔)이 각 한 개씩, 지공(指孔)이 여섯 개였다. 차(茶)가 거래될 때마다 금패신표처럼 사용될 옥과(玉窠)가 하나씩 흑대(黑帶)에서 떼어져 사용되었고 죽적(竹笛)의 구멍 하나가 그때마다 밀랍(蜜蠟)으로 봉(封)해졌다. 신문왕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게 될 거라는(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용의 이야기는 죽적(竹笛)의 구멍이 모두 막히기 전까지는 차(茶) 무역에 대한 거래 안전과 보복 방지가 실크 로드 상방과 마린 로드 상방 모두로부터 담보될 거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런 포괄적 안전보장에는 단서가 있었다. 조령(鳥嶺) 이남의 지역에서 수출되는 차(茶)들에 대해서만 실크 로드 상방이 그 거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단서였다. 조령 이북에서 수출되는 차(茶)들에 대해서는 차(茶) 무역선의 나포(拿捕)와 그 안에 실린 차(茶)의 압수 등 거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거라는 경고였다.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마구령(馬驅嶺)이 아닌 조령이 북방 한계선이 된 건 당진(唐津)과 당항성(黨項城)을 포함해 차(茶) 무역항이 밀집한 한산주(漢山州)와 옛 대방군(帶方郡)으로의 차(茶) 이동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치였다. 이 조건으로 실크 로드 상방의 동의를 얻어낸 무측천이었다. 무측천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사용된 흑대의 옥과(玉窠)는 18개였고 죽적(竹笛)은 9개의 구멍을 막았다가 다시 뚫는 방법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683년에 시작된 만파식적 체제는 701년의 차(茶) 거래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신문왕은 만파식적을 갖게 된 곳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이견대(利見臺)라 이름 했다. 699년 무주(武周) 황제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여릉왕(廬陵王) 이현(李顯)을 다시 태자에 책봉했다. 당나라 황제 중종으로 퇴위되어 여릉왕으로 유폐된 그를 무주(武周)의 황태자로 봉한 것이었다. 무측천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당나라의 행운은 정관지치(貞觀之治)를 무주지치(武周至治)가 개원지치(開元之治)와 연결했다는 데 있었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충정(忠正)들의 시대였다. 무측천이 집권하던 시절 380만 호였던 당나라 호구수는 615만 호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