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아랍을 위한 제물로 철저히 사기당했다.
661년 아랍에서 무아위야에 의해 공급된 차(茶)는 사실 백제의 희생(犧牲)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였다. 동방으로 알라의 전사들을 보내 알라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지나인들도 알게 해야 한다는 알리의 주장에 사람들을 동의하게 하는 차(茶)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차(茶)가 필요했던 실크 로드 상방은 부왕(父王)인 무왕(武王) 때부터 절대적으로 협조해 온 백제를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통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왕(義慈王)은 천사옥대(天賜玉帶) 체제(體制)가 끝난 642년부터 실크로드 상방의 지원을 받아 쿠다라 백제에 경도(傾倒)되어 마린 로드 상방과 깊숙이 연결된 소아씨(蘇我氏) 정권을 제거(除去)하는 공작(工作)을 야마토에서 해오다가 645년 마침내 소아씨 정권의 핵심인 소아입록(蘇我入鹿)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그 아버지 소아하이(蘇峨蝦夷)까지 스스로 소사(燒死)시킨 후 야마토와의 협력을 동맹 수준으로까지 높이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물론 그 성공은 일본의 찻잎을 독점적으로 중계(中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왕 때부터 협력을 아끼지 않은 터라 의심하지 않았던 의자왕이 찻잎과 차(茶)를 징발하겠다는 당(唐)의 요청에 정색(正色)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냥 밀어붙인다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사안(事案)이 아니라고 판단한 실크 로드 상방이었다. 결국 의자왕(義慈王)을 속인 후 제거(除去)하기로 결정했다.
660년 6월 18일에 봉래수성(蓬萊水城)을 떠난 13만 명의 병력을 실은 소정방(蘇定方) 함대는 그러나 규모는 사상 최대였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에는 660년 산동의 래주(萊州)에서 출발한 소정방의 함대가 천리(千里)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일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당(唐) 장군 손인사가 40만의 군대를 실은 함대를 끌고 덕적도에 상륙했을 때도 이런 천리의 표현 같은 건 없었다. 천리를 이을 정도의 바다배들이란 기록은 그건 13만 명의 병력만 실어 나르기 위해 바다로 나선 배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기록이었다. 이미 차(茶)와 찻잎을 싣기 위해 어머어마한 선단(船團)이 온다는 것을 통보받아 알고 있는 백제였다. 신, 구당서에 소정방 함대가 봉래수성(蓬萊水城)을 떠난 것은 660년 6월 18일(음력)이고 당항성(黨項城) 앞바다인 남양만(南陽灣)에 있는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한 것은 6월 21일이었다. 차(茶)를 가져오라는 당나라의 요청에 마구령(馬驅嶺)을 넘어 백 척(百隻)의 큰 배(船)들을 내어 차(茶)와 찻잎(茶葉)을 싣고 남한강을 타고 이천(利川)에 도착한 신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백제였다. 백제가 신라의 기동(機動)을 안다면 모든 일이 어그러지게 되어 있었다. 의자왕이 동의(同意)했던 양(量)의 찻잎과 차(茶)를 싣고 다시 산동반도(山東半島)로 돌아가 아랍에 보낼 차(茶)들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아랍에 보낼 찻잎(茶葉)들을 싣고 산동반도로 복귀하는, 250km에 달하는 바다배들의 행렬로 두 번을 왕복한, 총 16일이 걸린 어마어마한 해양 수송 작전이었다.
덕물도에 도착한 6월 21일, 덕물도(德勿島)로 찾아온 후일 문무왕이 되는 당시 신라 태자 법민을 만난 소정방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서 대왕의 군대를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함락시키고자 한다고 알렸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13만 명의 침공군을 이끌고 전쟁하러 바다를 건너온 군대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나 저제나 전쟁 개시 명령만 기다리는 신라군에게 무려 18일간이나 기다렸다 전쟁하겠다는 말은 세계 전사에 없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13만 명의 침공군을 그냥 군량미만 축내며 18일간 한 장소에 있게 하겠다는 얘기였다. 소정방의 말을 들은 신라 태자는 대왕이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있다. 장군께서 온 걸 알면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오실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신라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얼마나 출격 명령만 기다리는지 알게 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소정방의 바다배들은 의자왕이 정성껏 마련한 엄청난 양의 차(茶)와 찻잎을 실어 나르기 위한 시간이 전쟁하기 전에 꼭 필요했다. 마지막 바다배가 차(茶)와 찻잎을 잔뜩 싣고 부여에서 래주로 다시 떠나기 전 소정방은 일만 명의 정예병을 백마강의 지류인 석성천(石城川)이 백마강과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파진산(破陣山)에 매복시켰다. 모든 차(茶)를 다 넘기고 난 후 안도하는 의자왕에게 신라군이 탄현을 넘고 있다는 전령의 보고는 청천벽력이었다. 결국 차(茶)를 실어 나르던 그 배에 의자왕도 실렸다. 백제가 허망하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망하게 된 연유였다. 의자왕은 기만당했다. 부왕인 무왕 때부터 충성을 다해 온 당나라가 백제를 대한 태도였다. 계백이 이끄는 오천 결사대의 황산벌 전투는 부끄러운 백제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었다.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부여융 , 부여연(扶餘演) 및 대신,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당나라로 다. 660년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다. 왕족의 신분은 유지되었고 함께 간 백제 유민들도 사면되었다는 사서의 기록은 백제의 마지막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게 해 주는 증거들이다. 의자왕은 사면받은 후 곧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