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야 왕조는 백제의 희생으로 세워졌다
문무왕이 죽으며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경흥(慶興) 법사에게 국사(國師)의 자리를 주라는 것이었다. 짐(朕)의 명을 잊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인 것이 681년 여름이었다. 신문왕은 경흥에게 국노(國老)의 자리를 주고 삼랑사(三郞寺)에 살게 하였다고 삼국유사는 감통(感通) 경흥우성(憬興遇聖) 조에 기록해 놓았다. 부왕(父王)이 죽으면서 국사가 될 만하다 했는데 국노를 준 신문왕이었다. 신문왕(神文王)은 경흥이 불교의 대의에 뜻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려가 아니라 속세의 고관대작에 경흥의 뜻이 있었음을 그렇게 역사에 남길 만큼 신문왕은 용의주도했다. 경흥(慶興)은 화려한 행색으로 수많은 종자들을 대동하고 왕을 만나러 궁궐에 들어올 때도 말을 타고 다녔다. 그는 삼한(三韓)의 땅에 법상종단(法相宗團)을 조직한 최초의 중이었다. 당(唐) 태종이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전폭적인 지원과 백제 무왕(武王)의 헌신적인 조력으로 현무문에서 난을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낙양(洛陽) 정토사(淨土寺)에 있던 스님 현장(玄奘)을 천축(天竺)으로 유학 보내는 일이었다. 마린 로드 상방이 중국 대승불교 최초의 종단(宗團)을 조직해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그리고 회수(淮水)와 황하(黃河)를 잇는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사찰과 사원(寺院)으로 해상 차(茶) 무역망을 조직해 내자 이에 대항할 불교종단 조직이 절실해진 실크로드 상방의 요청 때문이었다.
소그드 상방은 마린 로드 상방이 항상 대승불교의 본령(本領)과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자로 번역한 구마라습을 부당하게 탄압하고 끝내는 환속까지 강제로 시킨 자신들의 원죄에 있다고 판단했다. 천태종단은 이제 사찰을 넘어 사원까지 꾸리면서 역참(驛站)과 역원(驛院) 기능까지 겸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실크 로드 상방은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도 자신들만의 구마라습이 필요했다. 13살에 법명(法名)을 받은 현장이 뽑혔고 현장(玄奘)의 학업과 사업을 차질 없이 뒷받침할 지원단과 함께 천축으로 출발한 게 627년이었다. 그런 그가 서역 138개국의 풍토와 문화등을 조사하고 기록한 지원단과 번역할 산스크리트어 불경과 함께 귀국한 것은 645년 정월이었다. 태종은 그가 귀국한 다음 달 고구려 정벌을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동북으로 향했다. 659년 현장은 규기(窺基)의 보좌를 받으며 성유식론(成唯識論)의 한역을 완료했고 이 번역한 불경을 내세워 현장이 입적한 664년, 31살의 자은대사(慈恩大師) 규기는 대승불교의 두 번째 종단을 조직해 냈다. 법상종단이라 불린 그 종단의 신라 지부 책임자가 경흥이었다. 법상종단이 신라에 조직된 건 경덕왕(景德王) 때 진표(眞表)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신라는 그만큼 실크 로드 상방(商幇)의 법상종단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이래 천하를 호령하던 실크 로드 상방(商幇)에 문제가 생긴 것은 멀리 서쪽에서였다. 로마제국과 중국 사이에서 그동안 훌륭하게 중개역할을 수행하던 페르시아가 지역 내에서 급속하게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574년 시작된 북주(北周) 무제의 폐불(廢佛) 정책으로 페르시아에 공급되는 차(茶) 물량이 대폭 감소된 것이 시작이었다. 대량의 차(茶)를 일시에 공급해 줄 수 있는 해상운송이 북주에 의해 금지되면서 변방인 아라비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후일 이슬람을 창시하는 무함마드가 고향 메카에서 대상(隊商) 무역을 하는 돈 많은 과부 카디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청혼받게 된 일도 579년에 끝난 폐불 사건의 여파로 차(茶) 공급이 끊겨 메카지역에서 차(茶)를 구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차(茶)가 소진되자 혼란에 빠진 메카를 구한 건 시리아까지 나가서 기적처럼 샴(다마스쿠스) 지방의 특산물이라 묘사된 차(茶)를 구해 온 무함마드였다. 시리아에서 차(茶)를 구해 온 일에 깊은 감명을 받은 카디자에게 청혼받아 그녀와 결혼한 것이 595년의 일이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부담을 벗은 무함마드가 본격적인 사색의 시간으로 알라의 계시를 받은 게 610년이었다. 잡신(雜神)을 배격하고 알라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설교함으로써 카바(kaaba) 신전 순례객들로부터 수입을 얻던 쿠시라이족 상인들의 노골적 미움을 받아 박해를 당했다는 그동안의 정설은 겉만 맞는 이야기이다.
579년에 끝난 폐불조치로 인해 차(茶)를 생산하던 사찰과 승려들이 생산 현장에서 쫓겨나면서 당연히 차(茶) 생산이 대폭 줄어들었고 해상무역마저 금지되어 차(茶) 공급은 육상으로만 이루어졌다. 해상운송에 비해 낙타와 나귀에 의해 운송되는 물량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가격은 비싼 데다가 페르시아를 거쳐야만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도달하는 차(茶)였다. 페르시아를 지나가면서 그곳 사람들에 의해 우선 소비되어 터무니없이 줄어든 차(茶) 공급량 때문에 메카 같은 아라비아지역의 변방들은 차(茶)를 구경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알라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는 말에는 차(茶)를 보내주지 않고 자기들만 차(茶)를 소비하는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도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늘 수입해 왔던 양의 반도 들어오고 있지 않는 차(茶)였다. 북주 무제가 저지른 공급망 파괴 행위로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사회를 신라의 천사옥대 체제가 회복시키고 있는 동안 아랍과 페르시아는 생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격랑 속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죽고 칼리파(Caliph)가 이슬람(알라에게 복종하는) 공동체인 움마(Ummah)를 지도하는 시대에 가장 큰 논쟁은 동쪽으로의 진출이었다. 당 태종이 640년에 설치한 안서도호부가 쿠차(龜玆)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차(茶)를 독점하고 폭리를 취하는 동쪽의 지나(支那:중국)을 정벌해 알라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실크로드 상방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람들의 투쟁심은 종교적 열정까지 겸비함으로써 지나와의 전쟁 주장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지하드(성전)를 주장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唐) 태종이 이끄는 지나는 실크 로드 상방(商幇)의 나라나 다름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 지켜야 할 그들의 나라였다. 651년 파사국(波斯國)이라 불리던 사산조(Sasanian) 페르시아가 아라비아 이슬람에 의해 멸망했다. 656년 동방으로의 포교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4번째 칼리프가 되었다. 아랍인들을 만족시켜 칼리프 알리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을 정도의 대량의 차(茶)를 최적(最適)의 시기에 일시에 공급할 계획이 세워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모든 머천트(Merchant)들에게 지나의 차(茶)를 마음껏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조건은 단 하나. 쿠시라이족 우마이야(Umayyad)가(家)를 지원해 이슬람 혁명의 열기를 실크 로드가 있는 지나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랍과 페르시아의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당나라 광주(廣州)로 몰려들었다. 661년 광주(廣州)에 역사상 최초의 시박사(市舶使)가 설치되었다. 660년 백제를 없앨 때 데려온 인력(人力)들이 주축이 된 시박사는 몰려든 배들에 차(茶)들을 할당(割當)하고 싣고 출항시키는 복잡한 일들을 능숙하게 해냈다. 백제 관료들은 이런 대규모 해상 수출입 업무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661년 어머어마한 양의 차(茶)들이 일거에 아랍에 뿌려졌다. 우마이야가 출신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일인당(一人當) 똑같은 양의 차(茶)를 값싸게 판매함으로써 만인은 알라 앞에 평등하다는 교리를 실현시켰다.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정하고 서쪽으로의 포교를 선언했다. 동방으로의 포교를 통해 차(茶)를 가지고 폭리를 취하는 지나에게 알라의 뜻을 알게 해야 한다는 4대 칼리프 알리가 쿠파의 이슬람 사원에서 암살당했다. 661년 1월 29일이었다. 알리의 죽음에 분노하는 무슬림들 머리 위로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차(茶)가 뿌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