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

by 역맥파인더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재건해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전비(戰費)를 마련해 달라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부탁을 받은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이 실크로드 상방의 차산업 (茶産業) 독점 전쟁에 첨병(尖兵)으로 나선 법상종 승려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문무대왕의 청(請)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곳은 바로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갔던 명주(溟州: 강원도)였다. 속초(束草), 양양(襄陽)이 그 시작이었다. 의상은 그곳에서 자장율사가 자살하기 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헌신적 노력으로 이룩한 내륙 횡단 차(茶) 무역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에서 발견한 사실이었다.

의상대사는 자장율사가 구축한 소백산맥 이북의 명주(지금의 강원도 영동)와 삭주(지금의 강원도 영서, 충북)의 사찰들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소백산맥 이남의 사찰(寺刹)들을 만들어 갔다. 그 당시 차(茶)를 제조(製造)할 수 있는 원료인 찻잎을 가질 수 있었던 곳은 일본 찻잎 무역선이 오가는 명주(동해안)와 남해안의 낙동강과 섬진강 그리고 자생(自生) 차(茶) 나무들이 기후변화에도 살아남아있던 지리산이었다. 의상대사는 섬진강 무역로와 승평(순천) 무역로를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들과 지리산에서 채엽(菜葉) 되는 찻잎들을 구례 화엄사에서 모아서 남원- 함양- 거창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전하고 이들을 부산 범어사와 고성(固城) 옥천사에서 출발한 낙동강 무역로의 찻잎들을 공산(지금의 대구) 미리사(美里寺)에서 모두 합쳐 차(茶)로 만들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茶)들을 낙동강을 올라가 고창(古昌:지금의 안동) 북쪽의 영주(榮州) 소백산 서북쪽에 창건한 부석사(浮石寺)로 옮겼고 이 차(茶)들은 마구령(馬驅嶺)을 통해 소백산을 넘은 뒤 남대천을 경유해 남한강 수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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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만나 하나의 강(江)이 되어 황해(黃海)로 나가는, 김포반도(金浦半島) 북변(北邊)의 강(江)을 조강(祖江)이라 하는데 이 조강(祖江)의 밀물과 썰물(潮汐)이 순차적(順次的)으로 일어나는 물때를 맞추면 한강(漢江) 하구(河口)에서 임진강(臨津江) 하구(河口)로 옮겨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과 밀물이 반복해 발생하는 바다의 물때를 맞추기 위해 한강 하류의 마지막 지류(支流)인 창릉천(昌陵川:德水川)이 흐르는 부아산(負兒山:北漢山) 기슭, 진관(津寬)에 청담사(靑覃寺)를 지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중 최북단(最北端)에 위치한 청담사(靑覃寺)는 그러나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의 화엄(華嚴) 사상(思想)을 수행(修行) 하기 위한 사찰(寺刹)은 아니었다. 오랜 운반(運搬)으로 산화(酸化)가 일어난 찻잎(茶葉)들을 숯불 화로(火爐) 위 배롱(焙籠)에 올려 서서히 다시 건조(乾燥)시키는 홍배(烘焙)를 하기 위한 사찰(寺刹)이었다. 그리고 차(茶)를 운반(運搬)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식(宿食)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다. 2007년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津寬內洞)에서 삼각산청담사삼보초(三角山靑潭寺三寶草)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암키와가 발견되어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건물지(建物址)가 일반 사찰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결과가 발표된 연유(緣由)였고 사면(四面)에 회랑(回廊)이 설치(設置)된 독특한 건물 구조(構造)를 가진 연유(緣由)였다. 회랑(回廊)은 기둥과 지붕만 있는 낮게 지은 루(樓)로서 복도(複道)처럼 보이는 구조물인데 홍배(烘焙)를 마쳐 뜨거워진 찻잎(茶葉)을 신속히 냉각(冷却)시키기 위한 통풍(通風) 시설이었다. 건물지(建物址)가 사찰(寺刹)로 보기 어렵고 당시의 공공(公共) 여관(旅館)인 원(院)으로 쓰였을 거라고 주장된 연유(緣由)였다. 홍배(烘焙)는 탄배(炭焙)라 불릴 정도로 숯(炭)이 가장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는 차(茶) 가공공정(加工工程)인데 창릉천(昌陵川)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가면 지금은 사기막골로 불리는 청담골이 있었다. 사기막골(沙器幕谷)이라는 이름도 사기(沙器)를 굽던 가마(窯)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사기(沙器)를 굽기 전 그곳은 숯(炭)을 구워내던 숯가마터(炭窯地)였다. 청담사(靑潭寺)는 사실 청탄사(靑炭寺)를 뜻하는 암호였다. 담(潭) 자가 사성음으로 탄(tan)으로 발음되기에 이루어진 작명(作名)이었다. 숯(炭)을 사용한 홍배(烘焙) 공정을 마치면 산화(酸化)가 진행되어 누렇게 변해가던 찻잎(茶葉)들이 다시 푸르러(靑) 졌기에 청담사(靑潭寺)라 명명(命名) 한 것이었다. 홍배(烘焙)를 마친 찻잎들은 회랑(回廊)에서 신속 냉각(迅速冷却)된 뒤 다시 배(船)에 실려 조강(祖江)이 밀물로 바뀌기 전 창릉천(昌陵川)에서 한강(漢江)으로 나아가 곧 밀물로 변할 조강(祖江)에 다다랐다. 지금 강화도 동쪽 끝 연미정(燕尾亭)이 있는 앞바다에서 닻을 내린 채 만조(滿潮)가 올 때를 기다렸다. 조강(祖江)이 황해(黃海) 만조(滿潮)의 힘으로 임진강(臨津江) 오두산성(烏頭山城:關彌城) 앞을 지나 연천(漣川) 어유지리(魚游池里)까지 올라가는 걸 이용해 차(茶)들은 손쉽게 철원읍(鐵原邑)까지 운반(運搬)되었다. 이들 차(茶)들의 일부는 패강(浿江)을 거쳐 대방(帶方:지금의 황해도)으로 넘겨져 발해만을 통 해 고막해(庫莫奚)에게 인도되었고 대부분은 대동강 지류인 남강을 통해 대동강(大同江)으로 올라 초원로(草原路)에 유통될 차(茶)들로 거란에게 팔렸다.

한강하구와조강,청담사(1) (1).jpg 한강 하구와 조강

천문학과 조선술이 일천(日淺)해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것이 어려울 때 모든 교역은 강과 골짜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남쪽의 낙동강과 섬진강, 영산강과 금강에서부터 시작된 차(茶)의 운반은 한강과 임진강, 남강(대동강 지류)을 거쳐 결국 대동강으로 모두 모였다. 황산진(黃山津)이라 불린 낙동강, 웅진(熊津)이라 불린 금강, 그리고 임진(臨津) 강은 고래로부터 차(茶)를 나르던 물줄기여서 진(津)이란 글자가 강 이름에 아예 포함되어 있었다. 대동강 상류의 개천(价川)에서 신라인들이 만든 차(茶)들은 초원로(草原路)로 자신들을 유통시켜 줄 거란인 머천트(Merchant)들에게 인도되었다. 개천(价川)에 가격을 뜻하는 개(价) 자가 쓰인 연유였다. 영주(榮州)의 부석사(浮石寺)를 시작으로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은 후일 해운(海雲) 최치원에 의해 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통해 정리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차례로 창건했다.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부산의 범어사, 경남 고성의 옥천사, 구례 화엄사는 찻잎들이 처음으로 집산되는 곳이었다. 화엄사는 합천 해인사로 이어져 의상대사가 창건한 공산(지금의 대구)의 미리사(美里寺)에 다다랐다. 범어사와 옥천사는 낙동강을 타고 역시 공산의 미리사에 닿았다. 미리사에서 만들어진 증차(烝茶)는 낙동강을 타고 올라 고창(古昌:지금의 안동) 북쪽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울진(蔚珍)과 삼척으로 들어오는 찻잎은 의상에 의해 창건된 울진의 불영사(佛影寺)로 모였고 차(茶)로 만들어져 부석사로 옮겨졌다. 부석사(浮石寺)에서 그들 모두는 마구령을 통해 소백산을 넘었고 남한강에 실렸다. 한강 하류 북한산에 있는 청담사(지금의 은평구 진관동)에서 탄배(炭焙)를 마친 차(茶)들은 임진강과 대동강을 거쳐 거란인 머천트들에게 인도되었고 그 자금(資金)은 군자금이 되어 문무왕이 당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후일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남원 아막성과 합천, 공산(대구) 미리사 앞과 고창(안동)에서 그토록 싸운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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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개척한 차령로(車嶺路)에 올라온 오대산 이남 지역의 모든 찻잎들은 영월과 단양의 경계선에 있는 태화산(太華山)으로 모였다. 명주(溟州)의 거의 모든 해안에서 거둬들인 찻잎들이 의상대사가 창건한 태화산(太華山) 비마라사(毘摩羅寺)에서 증차(烝茶)로 만들어졌다. 그 후 부석사에서 만들어진 차(茶)처럼 남한강에 실려 그 옛날 고인돌에서 만들어진 삼한의 차(茶)들처럼 그들도 임진강을 통해 대동강을 탔고 마침내 초원로(草原路)에 올려졌다. 오대산(五臺山) 이북 지역의 해안에서 거둬들인 찻잎들은 낙산사에 모여 홍천(洪川) 홍양사(洪陽寺)를 거쳐 원주 구룡사(龜龍寺)로 옮겨졌다. 모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었는데 구룡사에서 찻잎들은 증차(烝茶)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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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강(江)을 이용한 물류(物流)에는 퇴적(堆積) 같은 작용으로 지형(地形) 변형(變形)이 일어나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섬강(蟾江)에서 남한강으로 수로(水路)를 변침(變針)할 때 섬강의 물줄기가 남한강과 거의 수직(垂直)으로 접하는 지형상의 문제 때문에 좌초(坐礁)가 많이 발생했는데 결국 월지국(月支國)이 다스리던 삼한(三韓) 시대 때 사용했던 방법이 다시 채택되었다. 찻잎들을 제천(堤川)까지 가져온 후, 의림지(義林地)의 저수문(貯水門)을 열어 그 수량(水量)을 활용해 주포리(周浦里)에서 배를 띄워 주포천(周浦川)을 통해 남한강 수로(水路)에 올리는 방안이었다. 의림지는 원래 관개(灌漑)를 위해 축조된 것이 아니라 차무역(茶貿易)을 위해 축조(築造)된 선당(船塘)이었다. 의림지(義林池)에 가둬둔 물을 흘려 수위가 낮은 주포천에서도 차(茶)를 실은 배를 띄울 수 있도록 수위(水位)를 높여 주어 주포리(周浦里)에서 출수(出水)한 배들이 주포천을 통해 남한강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의림지가 본래 수리관개시설(水利灌漑施設)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선당(船塘)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걸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찻잎들이 고인돌들을 이용해 차(茶)로 만들어져 카라코름(Kharakhorum)까지 보내지던 시절처럼 원교국사 의상이 신라의 차(茶)들을 임진강과 대동강을 통해 대륙 북쪽으로 유통시키는 고래(古來)의 교역로를 뚫어 차(茶)를 유통시키자 차(茶) 무역을 독점하려던 당나라는 대군을 보내어 이를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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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 당 태종은 당시 신라의 전권특사로 장안에 온 김춘추에게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 전쟁에 참전하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의 옛 땅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소속으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웅진 도독(都督)이 되어 다스리는 땅이 되었고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 이번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었다.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격하시키더니 안동도호부가 웅진도독부와 함께 계림대도독부를 관할한다는 당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당나라에 의해 계림 대도독(大都督)으로 격하된 문무왕은 전쟁을 결심했다. 전쟁은 돈이 있어야 하는 법. 문무대왕은 의상대사에게 군자금 마련을 부탁했고 의상대사는 화엄십찰(華嚴十刹)과 자장율사가 이미 창건해 놓은 동해의 삼화사(三和寺), 영덕의 유금사(有金寺), 포항의 천곡사(泉谷寺), 울산의 태화사(太和寺), 단양의 대흥사(大興寺)등 교통의 요충지들을 연결한 차(茶) 수출로를 만들어 이에 호응했다. 기벌포와 덕물도를 장악해 금강과 한강을 막아 신라의 교역로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 당나라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공주와 청주, 천안과 서산 등지에 건설된 무역기지들이 사용되지 않은 건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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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 유민군 1만이 압록강 건너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삼한 통일을 확정 짓는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을 지키고자 벌이는 전쟁에 문무왕이 압록강 건너로 군대를 진격시킨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나라의 전쟁을 지휘하는 안동도호부는 압록강이 아니라 평양에 있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당나라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진격한 것이 아니었다. 신라 전역에서 온 국력을 기울여 만든 차(茶)를 초원로의 머천트(Merchant:茶상인)들에게 수송하는 상단(商團)을 보호하는 군대였다. 670년 고막해(庫莫奚)와 거란(契丹)인들로 주로 구성된 초원로 머천트들과의 그 한 번의 차(茶) 무역을 통해서 문무왕은 7년에 걸친 나당전쟁을 감당하는 초기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백제 무왕이 그토록 원했던 옥천- 보은 무역로가 무시된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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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 이루어진 차(茶) 무역으로 신라 차(茶)를 얻게 된 토번(吐蕃)이 계속적인 신라 차(茶) 공급을 전제로 당나라를 공격하는 신라의 연합군으로 참전한 것은 사실 나당전쟁의 결정적인 승인이 되었다. 당나라의 기미(羈縻) 정책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차(茶)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격앙한 토번군(吐蕃軍)의 진격이 장안을 위협하자 당 고종은 압록강에 배치된 평양공(平壤公) 설인귀가 지휘하는 안동도호부의 정예군 십만을 토번 전선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 십만의 정예기(精銳騎)들이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몰살을 당해 버리는 참변이 일어났다. 대비천(大非川) 전투라고 기록된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전선에 투입되어야 할 정예 병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게 되었다. 이후 훈련이 충분치 않은 병사들로 조직되어 나당전쟁에 투입된 당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라가 거란과 고막해의 차(茶) 상인(머천트)들과 차(茶) 무역을 할 수 없도록 임진강 무역로를 막는 일이었다. 나당전쟁의 주전장(主戰場)이 발해만(渤海灣)으로 나가는 길목인 황해도 서흥(瑞興)과 대동강으로 나가는 경기도 연천(漣川)이 된 연유였다. 결국 석문(石門:지금의 서흥) 전투에서는 졌지만 매소성(買肖城:지금의 연천)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가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마저 승리하며 7년 전쟁의 승리를 가지게 되었다. 전쟁은 정당하게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과 돈으로써 만이 승부를 볼 수 있는 처절한 피싸움이었다.

문무대왕은 죽으면서 신문왕(神文王)에게 법상종 승려 경흥에게 국사(國師)를 맡기라고 유언했다. 실크 로드 상방을 위해 말을 타고 다니는 경흥(憬興)은 경주의 삼랑사(三郞寺)에 국노(國老)가 되었다.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은 소백산 끝자락 부석사(浮石寺)에서 입적(入寂)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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