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국과 조령 이북에서는 소리 내지 않는 만파식적
천사옥대 체제에 대처하기 위해 행정 조직을 개편했던 진평왕처럼 신문왕도 만파식적 체제에 대비해 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신문왕의 제도 조직 개편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유였다. 682년 진평왕과 똑같이 관리들의 인사를 관리하는 위화부(位和府)부터 개편해 위화부령(位和府令)을 2인을 두어 인재 등용에 관한 업무도 관리하게 했다. 진평왕 때 고구려와 백제를 의식해 조부(調府)라는 이름으로 위장했던 탄배(炭焙)라 불리는 홍배(烘焙)하는 업무와 차(茶)를 만드는 업무를 각각 채전(彩典)과 공장부(工匠府)로 분리 독립시켜 감(監)을 각 1인씩 두었다. 686년 만파식적 체제하에서 차(茶) 무역이 활성화되자 수입한 찻잎을 보관하고 차(茶)를 제조하는 건물들을 수리하고 또 새로 짓는 예작부(例作府)의 일이 대폭 증가했다. 예작부경(例作府卿)으로 2인을 두었다. 687년엔 차(茶) 무역에 금패신표(金牌信標)로 사용되는 만파식적의 구멍을 막고 뚫어야 하는 일을 담당해야 할 음성서(音聲署)의 수장(首長) 직위를 경(卿)으로 높였다. 688년 확대되는 차(茶) 무역으로 선박을 수리하고 조선(造船)하는 선부(船府)도 예작부(例作府)와 같이 업무가 폭증하여 수장(首長)인 선부경(船府卿)을 한 명 더 두어 수리(修理)와 조선(造船)을 분리했다. 오늘날 정부의 한 부(部)에 1 차관과 2 차관을 두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삼국을 통일했기에 늘어난 일들이 아니었다. 만파식적 체제 가입으로 인한 차무역 확대에 따른 경제 활성화 효과였다. 삼국통일 후 진행된 제도 정비도 확대된 지방 통치를 위해 단행했다는 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685년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충주)을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변경해 이름에서 국원을 빼버린 일이나 서원소경(西原小京: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남원)을 새로 설치한 것은 왕경(王京)의 편재(偏在)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신라에서 만든 차(茶)의 수출항을 제한한 조령선(鳥嶺線) 때문이었다. 섬진강과 낙동강을 남한강에 연결해 임진강으로 통하게 하고 다시 대동강의 남강을 통해 임진강을 대동강과 연결되게 함으로써 삼한의 차(茶)를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하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충주가 조령선 이북에 위치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파식적 체제에 가입하라는 무측천의 제의에 김흠돌과 많은 귀족, 신료들이 반대했던 건 이런 독소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신문왕과 그의 세대들은 그러나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이런 독소적 제한에서 초래된 불이익을 줄여 나갔다. 685년 완산주(完山州)와 청주(菁州)를 새로 설치했다. 완산주는 금산사(金山寺)를 철저히 감시하는 임무가 부과되었고 청주(菁州)에는 섬진강 무역로로 들어가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차(茶) 무역선을 유치하여 바다 건너오는 동안 산화(酸化)가 진행된 찻잎을 홍배(烘焙)하고 냉각 건조해 주는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 대표적 건물이 촉석루(矗石樓)였다. 일본에서 들어온 찻잎들을 대규모로 가공 처리하기 위해 지어진 여러 시설 중 대표 시설이었다. 홍배를 마친 찻잎들의 냉각과 건조를 위한 특수 시설인 루(樓)였다. 누구라도 볼 수 있게 청주(菁州) 남강(南江)의 높은 곳에 웅장하게 지어졌다. 진주(晉州) 외에 밀양(영남루)과 삼척(죽서루), 그리고 남원(광한루)에도 촉석루와 같은 규모의 누각들이 존재하는 연유였다. 이들 누각(樓閣)들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나 그러나 그 기초는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건물들이었다. 이렇게 가공 처리된 찻잎들은 섬진강을 따라 일부는 남원에 내려졌고 나머지는 계속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 임실(任實)을 통해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에 내려졌다. 금산사에서 만들어지는 차(茶)들은 전량 실크 로드 상방에게 수출하도록 되어 있는 차(茶)들이었다. 김제의 모악산 금산사(金山寺)가 법상종단의 본산(本山)이 된 것은 백제 의자왕이 낙양으로 납치된 660년 이후부터였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설치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제 무왕이 건설한 섬진강 차(茶) 무역로를 따라 남원으로 보내지던 찻잎들을 임실(任實)로 보내 모악산으로 보내는 교역로가 건설된 것도 그때였고 벽골제(碧骨堤)가 다시 등장한 것도 그때 건너온 당나라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천태종단의 본산인 국청사(國淸寺)가 있는 절강성 태주시(台州) 천태현(天台縣) 천태산(天台山)에서 동해(東海)로 나가는 삼문현(三門縣)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가다 보면 암점촌(岩店村)이 나오는데 그곳은 국청사에서 만들어지는 차(茶)들을 싣고 삼문현으로 가는 배들을 띄우기 위해 수위(水位)를 높여주기 위한 물을 공급하는 선당(船塘)이 있던 곳이었다. 이 선당(船塘) 시설을 알고 있는 자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벽골제였다. 동진강(東津江)과 모악산을 연결해 주는 원성천(元聖川)에 있었던 고래(古來)의 벽골제가 선당(船塘)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연유였다.
문무왕이 안승(安勝)을 내세워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劍牟岑)에게 금마저(익산) 땅을 내준 이유는 바로 벽골제를 선당(船塘)으로 활용해 원성천이란 작은 강을 차수로(茶水路)로 격상시켜 동진(東津)을 차(茶) 수출항으로 만든 실크 로드 상방의 차(茶) 무역선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차(茶) 무역선 공격은 실크 로드 상방에게 손해를 입히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웅진도독부가 통치하는 백제 땅은 원래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었다. 약속을 파기한 것이 당 황실이 아니라 신라에서 만들어 내는 차(茶)까지 독점해 더 많은 이익을 쉽게 차지하려는 실크 로드 상방이라는 걸 간파한 문무왕이 그 대응으로 내놓은 것이 보덕국(報德國)이었다. 674년 안승은 금마저(金馬渚:익산)를 영지(領地)로 한 보덕국왕으로 봉해졌고 그 후 법상종단으로 위장한 실크 로드 상방의 차(茶) 무역선은 고구려 병사들의 한 맺힌 공격에 제대로 운항되지 못했다. 결국 실크 로드 상방의 사주를 받은 당(唐)의 대군(大軍)이 증파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자 신라에 좋은 일만 해 주는 것보다 당군(唐軍)과 협조해 신라를 치고 옛 고구려 땅을 보덕국처럼 얻어 고구려를 세우는 것이 낫다는 검모잠을 안승은 반역죄로 다스렸다. 674년 안승은 섬진강으로 보내지는 일본 찻잎(茶葉)은 앞으로 보덕국이 관리한다며 일본에 고려 국호로 사신을 보내 이같이 전했다. 보덕국의 사신 위두대형(位頭大兄) 한자(邯子)와 전부대형 석간(碩干)을 일본에 신라 사신으로 가 있던 대나마(大奈麻) 김이익(金利益)이 축자(築紫:후쿠오카 쓰쿠시노)까지 안내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유였다. 실크 로드 상방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독점하려던 섬진강 무역로에서 손해만 보고 나당전쟁의 패전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런 보덕국의 안승을 문무왕은 자신이 죽는 날까지 고구려 왕으로 대접하며 치하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신문왕은 달랐다. 만파식적 체제에서 조령 이북의 한강과 임진강, 대동강 무역로를 모두 포기해야만 했던 신라로서는 섬진강 무역로로 올라오는 찻잎(茶葉)들이 이제 신라의 생명선이 되었기에 보덕국(報德國)을 그대로 유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순응(順應)한 안승은 683년 소판(蘇判)의 관직으로 김 씨 성을 사성(賜姓) 받고 집과 토지를 하사(下賜) 받아 경주의 귀족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보덕국(報德國)에선 안승이 떠나자 조카 대문(大文: 悉伏이라고도 한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장군 핍실(逼實)과 김영윤(金令胤)이 전사하는 격렬한 전투 끝에 고구려의 모든 역사는 684년 끝이 났다. 이후 보덕국(報德國)의 유민들은 모두 남원(南原)으로 이주(移住) 조치되었고 이 와중에 고구려의 고유 악기인 거문고가 전파되어 가야금과 더불어 삼한의 고유 악기가 되었다. 만파식적으로 거문고는 삼한의 악기가 되었고 보덕국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