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의 정식 이름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의 원찰(願刹)인 봉덕사(奉德寺)의 종루(鐘樓)에 건 동종(銅鐘)이었다. 그 종이 에밀레종이 된 연유는 성덕왕의 손자가 그 종(鐘) 때문에 비명(悲鳴)에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자인 혜공왕(惠恭王)은 죄가 없었다. 혜공왕이 자신의 목숨으로 치른 죗값은 사실 그의 아버지가 치렀어야 할 죗값이었다. 그러나 경덕왕(景德王)의 죄는 사실 그의 아버지인 성덕왕이 뿌려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죄 또한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터 잡고 산 것에서 나온 죄였다. 이 좁고 짧은 땅이 생명의 나무가 자라는 세계 유이의 땅이었기에 민족이 터 잡았고 그것 때문에 영광스러웠고 핍박받아야 했다. 그것에서 생긴 죄였다. 결국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혜공왕은 그 누구의 죄가 아니어서 죽어야 했다. 그래서 그 종은 그리 슬프게 울었다.
후대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으로부터 너무 많은 사면령(赦免令)을 남발했다며 비판받은 성덕왕은 그러나 억울하다. 동모형(同母兄)인 효소왕(孝昭王)이 후사 없이 죽어 즉위한 702년부터 716년까지 14년 동안 9번의 사면령을 발표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덕왕이지만, 특히 706년부터 710년 사이의 기간에는 매년 사면령을 발표했던 그였지만, 그러나 성덕왕은 사면령을 남발(濫發) 한 것이 아니었다. 성덕왕이 즉위한 건 만파식적(萬波息笛) 체제라 불리던 20여 년간의 큰 다툼 하나 없었던 경제 호황기가 끝난 직후였다. 쿠라이시족 무아위야가 우마이야(Umayyyad) 칼리프를 세운 뒤 쿠라이시족 출신으로 후계가 이어지면서 사라센이 당나라 쪽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돌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굳건히 지켜지고 있었다. 만파식적 체제를 만들어 실크 로드 상방(商幇)과 마린 로드 상방 간의 전쟁을 중지시키고 두 상방의 시장 경계를 확실히 지켜주며 신라와 야마토, 사라센과 당나라가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되어 번영을 누리던 무주의 치(武周之治)라는 태평성대가 끝난 뒤 성덕왕(聖德王)이 즉위했다. 이 체제를 만들어 낸 무측천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죽은 게 705년이었다. 무측천이 죽기 전 병석에 들었을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번영이었고 만파식적 체제는 이미 701년에 이루어진 차(茶) 무역을 끝으로 종료되어 있었다. 성덕왕이 즉위한 702년부터 신라는 대규모 실업 상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공정한 심판이었던 무측천(武則天)은 병석(病席)에 누웠고 후일 복구되는 당나라의 황제, 중종이 되는 무주(武周)의 황태자 이현(李顯)은 여전히 실크 로드 상방과 깊숙한 연결을 맺고 있는 위 씨(韋氏) 황후와 그 일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실크 로드 상방의 호전성(好戰性)은 자은종단(慈恩宗團)의 칼날만큼이나 매섭게 벼려져 있었다. 마린 로드 상방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마린 로드 상방(商幇)과 거래하던 신라엔 그 여파로 공황(恐慌)이 덮쳐왔다.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 건 인지상정이어서 신라 전역에서 생계형 절도가 들끓었다. 감옥이 모자랐다. 잡아 오면 죄수가 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비용 또한 엄청난 재정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702년 음력 7월 즉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대사면령(大赦免令)이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반역죄나 살인, 상해죄도 아닌 단순 절도죄를 지은 사람들을 감옥에서 아사(餓死)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우박(雨雹)에 의한 피해와 가뭄등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705년 10월(음)에는 결국 흔들리지 않았던 명주(溟州) 지역과 삭주(朔州) 지역마저 차(茶) 무역의 불황으로 많은 유랑민이 발생했다. 결국 706년에는 나라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 해야 했다. 그러나 기근이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결국 707년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음)까지 한 사람에게 하루에 벼 3되씩을 나누어 주는 비상의 조치마저 취해야 했다. 이러한 진휼과 구휼(救恤) 중에는 특이한 그러나 심중(深重)한 조치가 있었는데 그건 봄 2월 기사에 적시되어 있었다. 대사면령과 함께 백성들에게 오곡(五穀) 종자(種子)를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다(賜百姓五糓種有差). 오곡 종자를 나누어 줬다는 그전 해인 705년에는 신라가 매년 여름 6월에 한차례 조공하던, 차(茶)를 의미하는 방물(方物)을 하 4월(夏四月遣使入唐貢方物)에 이어 추 8월, 동 10월 이렇게 세 차례나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에도 차(茶)를 생산해 내는 신라의 차(茶) 생산력과 생산기술을 보여 주며 만만파파식적 체제에서 신라가 담당했던 위치를 회복(回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請)을 세 번의 조공과 사신 파견으로 그 간절함을 보였던 거였다. 그럼에도 만파식적 체제에서 마린 로드 상방이 거래해 주던 만큼 실크 로드 상방이 신라의 차(茶)를 사주지 않자 결국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나눠 주는 일이 벌어졌다. 삼한(三韓)의 차(茶) 산업을 지켜 온 차(茶) 기술자들인, 농자(農者)들인 그들에게 곡식(穀食)을 재배하는 사람이 되라는, 직업을 바꾸라는 명령이었다. 그만큼 신라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직업을 천명으로 알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고래로부터 지켜 온 생명의 나무, 차(茶) 나무에서 이제 떠나라고 군주(君主)가 말하고 있었다.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삼한(三韓)의 천명(天命)이 바뀌고 있었다. 벼농사나 짓자고 들어온 땅이 아니었다. 약초나 캐자고 터 잡은 땅이 아니었다. 차(茶) 때문에 생명의 나무 때문에 이 좁은 곳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에게 성덕왕은 이제 차(茶)가 아닌 곡식을 짓자고 말하고 있었다.
二年 日本國使至楤二百四人. 몇 월에 온 것인지는 밝히지 않은 삼국사기의 703년에 있었던 일본국 사신 방문 기록은 그 규모가 무척 큰 것이었다. 결국 찻잎(茶葉) 대금을 입금하지 않는 신라에 돈 받을 게 있는 모든 일본인들이 채권단을 꾸려 입국한 거였다. 신라는 더욱 궁핍해져 갔다. 실크 로드 상방이 무측천이 만들어 낸 만파식적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측천이 병석에 든 702년부터 그 체제를 허물기 위해 나선 이유는 만파식적 체제가 들어선 이래 또다시 요동친 아랍 정세 때문이었다. 동쪽으로 나아가 이슬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암살당한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을 예언자의 자리를 잇는 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시아파를 결성하고 680년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야지드 1세 에게 칼리프가 세습된 것에 반대하자 내분은 또다시 격화되었다. 4대 칼리프 알리가 암살되었음에도 아버지 무아위야가 그냥 무난히 칼리프가 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의 아들 야지드 1세는 암살당한 4대 칼리프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자신에게 칼리프가 세습된 것에 반대하고 칼리파로 나서려 하자 군대를 보내 쿠파(지금의 이라크 나자프)로 가던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을 쿠파 인근 카르발라에서 모두 죽여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눈처럼 뿌릴 차(茶)를 갖다 줄 백제가 없었다. 소그드 상방이 움직여 보았으나 무측천은 그들에게 당 태종 같은 빚이 없었다. 결국 야지드 1세의 암살은 광범위한 아랍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후계전쟁이 벌어졌다. 만파식적 체제로 줄어든 아랍에 대한 차(茶) 할당량은 내분 수습을 더욱 더디게 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곳에서의 불안정은 오직 자신들의 패권이 도전받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 아랍 세계의 내분이 더욱 분통 터지는 소그드 상방이었다. 692년 쿠라이시족 아브드 알 말리크의 승리로 끝난 피트나(내전)의 마지막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 소그드 상방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호라산(Khorasan)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호라산(Khorasan)까지 아랍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호라산은 중동과 실크 로드가 있는 중앙아시아를 잇는 사이 지역이었다. 다음에는 필시 실크 로드를 장악하려고 아랍인들이 전쟁할 거라고 생각하는 소그드 상방이었다. 그렇게 불안에 떨며 웅크리고 있던 소그드 상방 앞에서 무측천이 쓰러진 거였다. 알라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아랍인들에게 실크 로드 관리권을 뺏길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소그드 상방에게 성덕왕(聖德王)의 만파식적 체제의 복원 호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한 해(705년)에 세 번씩이나 방물(차)을 조공하며 매달리는 성덕왕은 그들에겐 그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