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 이북에서도 울려퍼진 만파식적
무측천이 황제에 오른 아들 중종(中宗:이현)이 황후인 위 씨(韋氏) 가문에게 휘둘려 자신의 탕평책을 거슬러 실크 로드 상방에 경도되자 그를 퇴위시키고 막내아들 이단(李旦)을 즉위시켜 예종(睿宗)이 되게 한 건 684년의 일이었다. 예종조차 문약함을 보이자 무측천은 690년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9를 높이 숭앙한 무측천이었기에 9월 9일 거행된 즉위식에서 선포된 국호는 주(周), 연호는 천수(天授)였다. 천수 4년(694년) 만파식적 체제는 만만파파식적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백율사(栢栗寺) 조에는 신라 차(茶) 수출을 조령 이남으로 제한한 만파식적(萬波息笛) 체제가 조령선(鳥嶺線)을 해체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체제로 전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신문왕의 뒤를 이은 효소왕(孝昭王)에 의해 국선(國仙)이 된 부례랑(夫禮郞)이 조령선이 해체되었다는 무주(武周)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반신반의하는 효소왕을 위해 직접 조령선이 없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파식적과 흑대(黑帶)에서 떼어낸 옥과(玉窠)를 가지고 휘하 낭도를 인솔해 조령선 너머 지금의 통천으로 올라가 차(茶)를 판매한 사건이 부례랑(夫禮郎) 실종 사건의 진상이었다.
삼국유사 백율사조에는 3월 11일에 북명(北溟:지금의 원산) 지경에서 부례랑이 적적(狄賊)들에게 붙잡혀 갔다. 안상(安常)만이 홀로 추격했다.(天授四年 領徒逰金蘭到北溟之境, 被犾賊所掠而去. 門客皆失措而還, 獨安常追迹之, 是三月十一日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낭도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 차(茶)를 사기 위해 찾아온 문객(門客)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돌아갔다는 기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효소왕은 만파식적은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에 보관되고 있다며 믿지 않으려 했다. 잘못되더라도 조령선을 넘어 차(茶)를 수출한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포석이었다.(先君得神笛傳于朕躬 今與玄琴藏在内庫 因何國仙忽爲賊俘爲之奈何).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 창고를 뒤덮더니 그 안에 있던 보물 만파식적이 사라졌음이 밝혀졌다. 효소왕은 창고를 관리하던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감옥에 가두고, 4월에 백성들에게 만파식적을 찾아오는 자에게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고 말하였다 (時有瑞雲覆天尊庫 庫内失琴笛二寳. 乃曰 朕何不予昨失國仙又亡琴笛 乃囚司庫吏金貞髙等五人. 四月募於國曰 得琴笛者賞之一歳租)고 기록했다. 삼국유사는 또 5월 15일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백률사의 불상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한 스님이 나타나 부례랑을 바닷가로 데려갔고, 거기서 안상을 만나 스님이 들고 있던 피리(만파식적)를 둘로 쪼개 두 사람에게 하나씩 타게 하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서 서라벌의 백률사까지 날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효소왕은 많은 공물을 백률사에 바치고 김정고 등 5명도 풀어주고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높여 부르게 했다는 기록은 부례랑(夫禮郎)의 목숨 건 충성으로 조령선이 해체되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계립령과 죽령, 마구령이 아닌 조령이 신라에서 제조한 차(茶)들의 수출 북방 한계선이 된 건 기존의 수출항을 신라 차(茶) 수출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실크 로드 상방의 속셈 때문이었다. 섬진강 무역로를 법상종단의 본산 금산사가 계속 통제한다면 조령 이남 지역의 신라 차(茶) 수출량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끝난 실크 로드 상방이었다. 사실 이 조건 때문에 무측천이 만파식적 체제에 대한 실크 로드 상방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기도 했다. 만파식적이 특이하게도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실학자 정약용은 '신라 옥적은 굵기가 통통하고 손가락 대는 부분 구멍이 좁은 것이 보통 피리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경주 사람들이야 이런 모양의 피리를 일상적으로 어려서부터 접해왔으니 익숙하게 잡고 연주할 수 있었겠지만 경주 외의 다른 지방 사람들은 신라 옥적과 같은 모양의 피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연주가 서툴렀던 것뿐이고, 덤으로 경주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피리에 익숙하다는 게 알려지면 경주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불려 올라가게 될 것이 귀찮아서(...)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나무위키에서 전재) 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지을 정도로 이미 몰락한 이 땅의 차(茶) 문화를 몸소 경험하며 부활시키려 노력한 그였지만 조선이 차(茶)의 종주국이었고 조선인들이 과거 전 세계에 차(茶)를 공급하며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 생육이 가능했던 차령산맥 이남에서도 차나무들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조선의 천재였던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들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擧重機)를 개발해 화성 행궁(華城行宮) 축조에 도입한 그는 왜 당항성이 있던 그 자리에 그렇게 삼엄한 도시를 정조(正祖)가 세우려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함도 아니었다. 정조는 조선의 부흥이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간파하고 있던 아버지의 좌절당한 꿈을 이루려 했던 거였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죽었고 그래서 공민왕의 꿈과 오은(五隱) 선생들의 희생(犧牲)도 역시 다시 함께 묻혔다. 농자(農者)는 벼나 채소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는 설화(說話)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