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의 진실 2

이사금이 치아의 개수를 말하는 거라니

by 역맥파인더

710년 우유부단하게 실크 로드 상방과 마린 로드 상방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았던 중종(中宗)이 암살되었다. 동모형(同母兄)인 이홍(李弘)과 이현(李賢)을 죽인 친모(親母) 무측천 밑에서 우유부단해야 살 수 있었던 중종으로서는 우유부단하면 안 되는 당(唐) 황제가 어려운 자리였다. 딸과 황후의 도움으로 그 어려운 자리를 끝낸 중종이었다. 중종에게는 자신처럼 당(唐) 황제가 되었다가 친모인 무측천에게 퇴위당한 동생 예종(睿宗)이 있었다. 중종이 독살되고 황위를 물려받은 건 그러나 예종 이단(李旦)이 아니라 중종의 4남 이중무(李重茂)였다. 황실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을 장악하고 있던 이단(李旦)의 삼남 이융기(李隆基)가 당 고종과 무측천 사이에 난 막내 태평공주와 합세해 소그드 상방의 지원을 받아 중종을 암살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위황후(韋皇后)와 그녀의 일족을 몰살시키고 아버지 이단을 당(唐) 예종으로 재즉위시켰다. 진(晉) 상방의 지원을 받고 있던 태평공주(太平公主)는 자연히 이융기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소그드 상방과 연결되었고 따라서 마땅히 이융기에게 돌아갈 황태자 자리에 시비를 보태어 황제 예종과 아들 이융기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이융기는 무측천이 병석에 들고 그 후 벌어진 혼란상을 목도하면서 무주의 치처럼 정치가 정말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실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의 일부를 자기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게 장악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한 몸인 삼백명의 우림군과 함께 태평공주까지 제거한 그에게 아버지 예종은 미련 없이 황위를 양위했다. 당 황제가 된 현종(玄宗)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신라였다. 일본은 매년 언제나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찻잎을 생산하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쉬이 변해버리는(酸化하는) 그 찻잎들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차(茶)로 생산해 내느냐였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사람들은 언제나 삼한(三韓)에 있었다. 무측천이 아픈 몸에도 신라 효소왕이 702년 승하하자 그를 위해 애도하고 조회도 이틀간 정지할 정도로 우대한 이유를 잘 아는 현종은 신라의 현재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깨닫고 이미 차(茶) 산업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한 성덕왕(聖德王)을 회유(懷柔)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누각(漏刻:漏閣)이 개발되고 이런 누각(漏刻:漏閣)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누각전(漏刻典:漏閣典)이 설치되었다 융기라는 휘(諱)가 같은 성덕왕에게 휘(諱)를 바꾸라고 하여 흥광(興光)으로 바꿨다는 것에서 강온(强穩)의 설득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유추하게 하는데 이후 당 현종이 신라에 대해 들인 정성은 깊고 자상한 것이었다. 713년 성덕왕은 공장부(工匠府)의 다른 이름인 전사서(典祀署)를 새로 설치하는 것으로 현종이 제안한 차(茶) 무역 체제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현종의 차(茶) 무역체제는 만만파파식적 체제와 동일했다. 신라엔 다시 활기와 번영이 깃들었다. 718년엔 탄배(炭焙)를 총괄하는 연사전(煙舍典)이 설치되었고 시루에 찐 찻잎에서 산화(酸化)의 주범인 고온(高溫)을 신속하게 내리기 위해 건물 안에 찬물을 계속 흘려 온도를 내리게 하는 누각(漏刻:漏閣)이 개발되고 이런 누각(漏刻:漏閣)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누각전(漏刻典:漏閣典)이 설치되었다. (물시계로 알고 있는 漏刻은 漏閣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誤字였다.)

배롱 (1).jpg 배롱: 이단으로 된 배롱을 숯불 위에 재를 덮은 화로 위에 놓고 찻잎을 상단 배롱 위에 놓은 후 서서히 건조하는 홍배 작업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하여 칭송받던 현종의 치세가 어지러워지고 성덕왕의 말년도 꼬이기 시작한 건 이임보(李林甫) 같은 간신배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조정에 자리 잡기 시작한 726년부터였다. 성덕왕 30년인 728년 여름 4월에 일본 병선(兵船) 300척이 신라의 동쪽 명주(溟州)를 공격해 온 것은 그 표본이었다. 실크 로드 상방으로의 차(茶) 공급량을 늘리라는 일방적 요구가 들어왔을 때 성덕왕은 마린 로드 상방과의 원만한 합의를 구해 오도록 조정했다. 그것이 만파식적 체제의 기본 규칙이었다. 그러나 실크 로드 영유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슬람 아랍인들로부터 실크 로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호전성을 누그러뜨릴 차(茶)가 더 많이 필요했던 소그드 상방은 그 합의를 원만히 해낼 수 없었다. 안록산 같은 이가 소그드 상방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당나라에서 출세하기 시작한 연유였다. 원하는 양의 더 많은 차(茶)를 마린 로드 상방과의 합의로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소그드 상방이 택한 방법은 사략해적(私掠海賊 buccaneer)이었다. 방어가 약한 명주 해안이 소그드 상방이 고용한 해적들의 주목표였다. 성덕왕 21년 모벌군성(울산)을 쌓고 성덕왕 30년 728년에 일본국(日本國)의 병선(兵船) 300척[艘]이 바다를 건너 우리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기에,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크게 깨뜨렸다 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소그드 상방이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었는지를 증거 하는 기록이었다. 성덕왕은 수레에 로켓인 주화(走火)를 100개씩 다연장으로 실은 문종 화차(火車)의 원형인 수레에 쇠뇌를 설치한 오늘날의 자주포인 차노(車弩)를 개발하며 대비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유명한 중국 최악의 간신(奸臣)인 이임보가 장차 재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직인 예부서경으로 중용된 734년부터 당나라 조정의 난맥상은 본격화되었다. 당 현종이 13남 며느리인 양귀비(楊貴妃)를 만난 건 737년이었다.

쇠뇌 (1).jpg 병선들에 구멍을 내어 침몰시킬 수 있는 쇠뇌 출처: 나무위키

당 현종이 신(新) 만만파파식적 체제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 성덕왕은 분명히 거부했었다. 빗살무늬토기를 시루로 개발해 사용하고 고인돌을 찻잎을 굽고 건조하는 시설로 개발했던 사람들이었다. 시루에 찻잎을 제대로 찌기 위해 가는 체(簛)를 만들고 그 가는 체(篩)를 더 가늘게(籭) 만들어 낸 사람이 왕(이사금 尼師今)이 되는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시루에 찐 찻잎을 긴압차(緊壓茶)로 만들기 위해 절구(臼)를 만들어 내고 세상 끝까지 가도 차(茶)로서 기능하는 황차(黃茶)와 흑차(黑茶)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곡(五穀)의 종자(種子)를 나누어주며 이제 우리 민족에게 차(茶)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고 차(茶)가 아닌 땅을 갈며 살아야 한다고 호소했던 왕이었다. 그런 왕에게 휘(諱)가 같다며 시비를 걸고 이름을 바꾸어도 무엄하다 협박하며 자신이 구상하는 차(茶) 무역체제에 들어오라고 강권한 건 당(唐) 현종이었다. 무측천이 구축(構築)한 만파식적 체제가 이십년도 안돼 무너지고 그 충격에 유명을 달리한 형 효소왕의 마지막 말이 생생한 성덕왕이었다. 믿지 마라. 믿을 건 우리밖에 없다. 처음 가입을 제안 받았을때 안하겠다는 답을 가지고 간 713년 신라 사신단을 당 현종이 장안성 문루에 나와 접견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 현종이 얼마나 신라의 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알게 해주는 기록이었다 . 그리고 한사코 거부하던 성덕왕이 가입하겠다고 승낙했을 때 당 현종은 너무나 기뻐 그 소식을 가져온 신라 사신들에게 내전(內殿)에서 재신(宰臣) 및 4품 이상 청관(淸官)들에게 칙령(勅令)으로 참석케 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3년(714년) 겨울 10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연유였다.

체(얼래미) (1).jpg 루웬조리(Mt.Ruwenzori)에서 소금 만들때 개발한, 찻잎을 올려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찻물을 우려내는 기구인 체(篩)의 금을 가늘게 만드는 사람이 왕(이사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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