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의 차남 경덕왕(景德王)이 당 현종에게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의 편에 서는 오판을 저지른 것은 사실 얼토당토않은 일은 아니었다. 실크로드 상방의 얼굴로 대표 주자인 안록산(安祿山)이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유주(幽州)에 부임해 온 것은 경덕왕이 즉위한 직후인 742년이었다. 안록산은 얼마 안 있어 744년엔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까지 겸임했다. 경덕왕의 정세 판단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서 가공된 일본 차(茶)를 초원로(草原路)에 유통시켜 신라에 돈을 입금하는 머천트(merchant) 역할을 하던 건 당시 거란족(契丹)과 해족(奚族)이었는데 이들을 기미(羈縻) 하기 위해 744년 당(唐) 나라가 파견한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가 안록산이었기 때문이었다. 751년 그가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까지도 겸임해 당제국군(唐帝國軍)의 삼분지 일을 장악(掌握)하자 경덕왕은 조부(祖父) 신문왕(神文王) 때부터 결연(結緣) 해 온 마린로드 상방을 버리고 실크로드 상방 편에 서버렸다.
경덕왕은 안록산과 실크로드 상방이 시박사(市舶使)를 통해 마린로드 상방을 지원하고 있는 현종(玄宗)을 그의 증조부(曾祖父)인 태종(太宗)처럼 실크 로드 상방 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알지 못한 일이 있었다. 경덕왕이 안록산을 선택해 실크 로드 상방 편에 설 때 소그드 상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알라 앞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진 이슬람 아랍인들이 드디어 우마이야(Umayyads) 칼리프를 뒤엎고 아바스(Abbasid) 칼리프를 747년에 수립한 후 751년 7월 실크 로드 초원로에 있는 탈라스(Talas)에서 당제국(唐帝國) 고선지의 안서도호부 군대를 격파한 것이었다. 결국 소그드 상방의 실크 로드는 카슈가르(kashgar)에서 멈춰 서야 했고 그 이후의 통상로에 물자를 올리려면 아바스 칼리프에 세금을 바쳐야 했다. 참을 수 없는 손실이었다. 이로써 소그드 상방의 이익은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현종(玄宗)은 고선지 장군의 안서도호부에 대군을 파병하지 않고 있었다. 소그드 상방은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록산은 소그드 상방의 지시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의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緖)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경덕왕은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전전긍긍(戰戰兢兢) 해야 했다. 안록산이 암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던 날까지 경덕왕은 자신의 왕위를 잇게 할 아들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진압의 수순으로 들어간 안록산의 반란은 자신의 아들로 후사를 맡기지 않는다면 왕가(王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왕에게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경덕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국사 주지(住持)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경덕왕이 아들을 갖게 해 달라 간청하며 벌어진 일들을 정리한 삼국유사의 기이(奇異) 경덕왕·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 조(條)에 실린 설화는 이런 연유(緣由)에서 나온 것이었다. 758년 그토록 원하던 왕자를 얻은 경덕왕은 후일 혜공왕(惠恭王)이 되는 이 왕자를 안록산과 결탁한 죄의 문책(問責)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계 왕권 유지를 담보하기 위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라 명명된 성덕왕(聖德王)의 원찰(願刹)인 봉덕사(奉德寺)의 동종(銅鐘) 주조(鑄造)에 착수했다. 안록산 편(便)에 서게 된 결정이 왕의 독단(獨斷)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신라 귀족 모두가 아니 신라 백성 모두가 함께 내린 것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의도(意圖)로 시작된 봉덕사(奉德寺) 동종(銅鐘) 제작(製作)은 그러나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덕왕이 죽은 후 안록산과 협력한 것에 대한 책임(責任)을 누군가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추상(秋霜) 같은 당(唐) 황제의 질책(叱責) 앞에 8살에 즉위한 혜공왕을 대신해 섭정(攝政)을 맡은 만월부인(滿月夫人)이라 불리던 그 어린 왕의 에미, 경수왕후(景垂王后)는 남편인 경덕왕이 만들려다 못한 동종(銅鐘) 제작을 완료해 안록산 편에 선 잘못이 결코 왕가(王家)에만 있지 않음을 강변(强辯)했다. 소리를 내는 종(鐘)이 전면(前面)에 내세워진 이유는 무측천(武則天:측천무후)이 관계된 만파식적(萬波息笛) 때문이었다. 측천무후를 당(唐) 황제 덕종(德宗)에게 상기(想起)시키기 위해 그리고 신문왕(神文王)과 효소왕(孝昭王)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경주(慶州) 귀족들에게 그때의 합의를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 소리가 상징(象徵)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떠 올릴 수 있는, 소리라는 똑같은 상징을 갖는 종(鐘)이 내세워진 것이었다. 종(鐘) 이름에 성덕대왕을 붙여 성덕왕(聖德王)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 또한 안록산에 붙어먹은 책임자를 단죄(斷罪)하라며 닦달하는 당(唐) 덕종(德宗)에게 그의 증조부(曾祖父)인 현종(玄宗)이 신라 성덕왕에게 무엇을 요청했었는지 기억하라는 힐문(詰問)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은 오히려 덕종(德宗)의 수치심(羞恥心)을 더 사무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고 그 죄(罪)로 그 에미의 소중한 아들, 혜공왕(惠恭王)은 무참히 시해당했다. 그 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타종(打鐘)할 때마다 에미탓에... 에미탓에...라는 소리를 냈고 그건 사람들이 그 종(鐘)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緣由)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