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대종(代宗)의 집요한 복수로 당나라 내에서 소그드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안록산의 편에 섰던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시해되었다. 당 대종의 장남인 덕종이 즉위한 바로 그다음 해였다. 앞장을 선 것은 차(茶) 산업을 포기할 수 없다며 버티다 왕권을 태종무열왕계에게 넘겨줬던 내물왕계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당 현종의 직계 후손들이 당 제국의 황위를 이어가면서 즉위한 이후 내내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혜공왕이었다. 그런 혜공왕 시대에 권력의 실세는 당(唐) 대종의 노골적인 지지를 받는 이찬 김경신(金敬信)이었다. 그건 김경신이 실크 로드 상방의 압력에 밀려 왕위에서 물러난 진평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증왕의 직계 후손이었던 김경신은 혜공왕을 핍박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찬 김지정 일파를 숙청하면서 혜공왕과 왕비를 함께 죽이고 왕위는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에게 양보할 정도로 노련한 인물이었다. 내물왕계 부계(父系)를 가지면서 혜공왕의 조부(祖父)인 성덕왕의 딸을 어머니로 둔 김양상은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왕을 시해했다는 역사적 오명을 피하면서 실크 로드 상방의 차(茶) 무역 독점 야욕 때문에 부당하게 상실했던 왕권을 되찾아 올 과도기에 사용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위장막(僞裝幕)이었다.
김양상이 선덕왕(宣德王)이 되어 짧은 재위 기간 동안에 자신의 아버지를 개성왕(開聖王)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지어놓고 죽자 김경신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한 후 개성왕의 사당(祠堂)을 허물어버렸다. 이때 경덕왕과 성덕왕의 사당도 함께 허물어 버린 후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祖父)를 명덕왕(明德王)과 흥평왕(興平王)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지어 내물왕과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국가 5 묘(五廟)로 선포해 버렸다. 원성왕은 자신의 조치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놓고 화백회의에서 맞서야 했던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5 세손 김주원(金周元)은 비로 불어난 알천(閼川)을 건너지 못해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명분 삼아 하슬라로 잠적해 버렸다. 786년의 현명한 삼십육계였다. 김주원(金周元)이 잠적하자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한 김경신은 그를 하서주도독(河西州都督)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임명해 그에게 지금의 강원도 통천(通川)부터 울진(蔚珍)에 이르는 동해 연안(沿岸)의 땅을 모두 다스리게 해 주며 정국을 안정시켰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大角干 孝讓)이 대대로 전해져 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 금 50냥을 사신에게 주어 보내 만파식적을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듣건대 상대(上代)의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것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듬해 7월 7일(787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금 1천 냥으로 그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과인은 그 신물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보내겠다.” 하니 왕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으로 이를 사양하고 은 3천 냥을 그 사신에게 주고, 가져온 금도 돌려주어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2 기이(奇異) 원성대왕조
일본 찻잎을 수입해 차(茶)로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는 신라의 전통 차(茶) 산업이 원성왕 때 복원되었음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다시 드러낸 것은 신라의 차(茶) 산업이 세계 시장에 돌아왔음을 알리려 함이었고 이에 일본 왕이 그것이 사실인지 돈을 내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찻잎을 사려하는 신라에게 일본은 거래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원성왕 대의 번영은 당(唐) 덕종의 양세법(兩稅法) 개혁과 더불어 강력한 해상무역 진흥과 신라 차(茶) 산업의 부활에 기인한 것이었다.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掛陵)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武人石)이 서 있는 것은 그런 연유였다.
원성왕은 이렇게 마린 로드 상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진상(晉商)이 버티고 있는 실크 로드 상방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는 노회(老獪) 한 정치인이었다. 만파식적 체제에서 자칫 원한을 가지지 않도록 진상(晉商)들의 편익(便益)을 챙겨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법상종단의 본산(本山) 역할을 하는 김제 금산사(金山寺)의 차(茶) 수출을 돕기 위해 벽골제(碧骨堤)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벽골제는 수리관개시설(水利灌漑施設)이 아니었다. 바닷물이 조석(潮汐)의 영향으로 밀려왔다 빠져 내려가는 동진강(東津江)에서 차(茶)를 실은 배들이 밀물과 썰물을 원활하게 이용해 운항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당(船塘) 시설이었다. 선당(船塘)은 선거(船渠)를 뜻하는 오늘날의 독(dock)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었는데 바다의 조류(潮流)가 함께 뒤섞이는 강물(기수역: 汽水域)을 확실하게 막아주는 둑(堤)을 쌓고 둑 안쪽으로 바닥을 깊게 파 도랑(渠)을 만들어 배(船)가 다닐 수 있는 당(塘)을 만든 다음, 당(塘)의 양쪽에 물을 끌어들일 때 사용하는 보(湺)와 물을 흘려보낼 때 사용하는 언(堰)을 설치해 수문(水門)의 시의적절한 개폐(開閉)를 통해 밀물과 썰물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차(茶)를 잔뜩 실은 배를 쉽게 들이고 내보내게 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과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등은 이러한 선당(船塘)을 운영하던 전문가들이었다. 차(茶) 무역이 금지되어 있는 동안 버려진 채 손상된 벽골제를 다시 수리하여 예전처럼 금산사에서 만든 증차(烝茶)를 배에 실어 수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였다. 진상(晉商)들은 고마워했고 이는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는데 든든한 담보가 되어 주었다. 이런 벽골제의 효용성이 무주(武州) 승평(昇平) 무역로에서 마린 로드 상방과 함께 정치군사적으로 성장해 온 견훤(甄萱)을 실크로드 상방의 본거지인 전주(완산주)로 옮겨 가게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진상(晉商)의 신라지부인 금산사에 유폐(幽閉)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독서(讀書)의 성적에 따라 상·중·하의 삼품(三品)과 특품(特品)으로 나누어 관리로 채용되도록 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태종무열왕계 왕들이 계속 집권하면서 태종무열왕계 사람들로 채워진 중앙 귀족과 관료 사회를 근본적으로 물갈이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다. 원성왕이 시작한 이 제도는 원성왕의 후손들이 12대에 이르도록 계속 왕위를 이어가게 해주는 데에 큰 기반이 되었다.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가공한 후 경주(慶州)에 상주(常住)해 있는 대식국(아랍)과 파사국(페르시아) 머천트(merchant) 들에게 차(茶)를 수출하며 번영을 주도하던 원성왕이 죽고 후사(後嗣)는 모두 죽은 원성왕의 세 아들들을 대신해 이미 장성한 혜충 태자의 큰아들이 잇게 되었다. 그러나 원성왕의 장손(長孫)인 소성왕은 왕이 된 지 1년도 안되어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 원년(799년) 5월 기사엔 지금의 원주, 영월지역에 코끼리가 돌아다니는 소식을 싣고 있는데 이는 명주(溟州) 지역 해안(海岸)으로 들어온 일본 찻잎을 가공해 원주, 영월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차무역(茶貿易)이 그 양(量)과 규모가 상당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우두주는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개명된 주(州:지금의 영서지방)였다. (牛頭州都督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髙,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삼국사기)
동모형(同母兄)인 소성왕(昭聖王)이 죽자 후일(後日) 헌덕왕(憲德王)이 되는 김언승(金彦昇)과 흥덕왕(興德王)이 되는 김수종(金秀宗)은 합심하여 형의 어린 아들 애장왕을 보필했다. 13살에 즉위한 애장왕(哀莊王)이 18살이 되자 친정(親政)에 들어갔고 숙부(叔父)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해 805년 당(唐) 순종은 황위를 아들 헌종(憲宗)에게 양위했다. 헌종은 산동반도에 터 잡은 제(齊) 나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 해상(海上)으로 차(茶)를 무역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안록산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부터 당(唐) 황실로부터 암묵적으로 지원받아 온 차(茶)의 해상무역이 역적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唐) 헌종(憲宗)에게 반기를 든 제(齊)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도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유명한 간무(桓武) 천황이 806년 죽고 장남인 헤이제이(平城) 천황이 즉위해 있었는데 809년 당(唐)으로부터 퇴위(退位)하라는 통첩(通牒)을 받고 동생인 사가(嵯峨) 천황이 즉위했다. 신라에서는 제(齊) 나라와 긴밀하게 지내온 책임을 지라는 통첩에 저항하려는 애장왕을 숙부들인 김승언과 김수종, 그리고 왕의 육촌형인 김제륭(金悌隆)이 죽였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항의하는 애장왕의 동생 김체명(金體明) 또한 함께 죽였다. 상황(上皇)으로 물러난 헤이제이(平城) 천황도 애장왕처럼 억울했고 아버지 간무(桓武)가 천도했던 헤이안쿄(교토)에서 헤이조쿄(나라)로 재천도(�遷都)하며 정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군사행동에 나선 동생 사가(嵯峨) 천황의 무력에 굴복해야만 했다. 구스코의 변(變)으로 일본 역사에 기록된 810년의 정변(政變)은 809년 7월에 벌어졌던 경주에서의 국왕 시해(弑害)와 똑같은 이유에서 벌어진 피바람이었다. 당(唐) 헌종(憲宗)이 제(齊) 나라와 함께 번영을 나눈 것들을 없애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당(唐) 헌종(憲宗)이 즉위한 805년 이후부터 60년 가까이 지속(持續)되었던, 우이당쟁(牛李黨爭)이라 기록된 정쟁(政爭)도 재상(宰相)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 간의 정책 대립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세계 무역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던 두 상방의 이해(利害)를 대변(代辨)해 격돌한, 청부(請負) 정쟁(政爭)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정쟁의 결과가 당(唐)의 멸망을 가져온 875년 발발(勃發)한 황소(黃巢)의 난(亂)이었고. 무역 패권 쟁탈전이 결과한 폐해(弊害)의 단적(端的)인 예(例)였다. 김언승이 헌덕왕으로 즉위한 것은 809년이었다. 826년 훙서할 때까지 헌덕왕은 차 무역 금지라는 애초의 입장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가문의 왕권 수호였다. 자기 뒤에는 가문의 왕권 수호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친조카를 함께 죽인 후일 흥덕왕이 될 김수종이 있었다. 우이당쟁(牛李黨爭)으로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을 금지하고 또 허용하는 미친 변화로 시끄러울 때 신라는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