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

by 역맥파인더

통천(通川)에서부터 울진(蔚珍)에 이르는 명주(溟州)의 동해 연안(沿岸)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의 양(量)이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중요하게 되자 애장왕(哀莊王)은 김주원의 둘째 아들 김헌창(金憲昌)을 시중(侍中)에 임명해 명주(溟州) 지역으로 들어오는 차(茶)들을 관리토록 했었다. 원주와 영월을 통해 집산된 명주(溟州)의 차(茶)들은 산동반도의 제(齊) 나라로 보내지기 위해 한강 수로(水路)를 타고 김포반도 위에서 임진강과 합쳐지는 조강(祖江)으로 이동후 백령도에서 산동반도로 떠났다. 관리 능력을 인정받은 김헌창은 섬진강으로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들의 가공과 차(茶) 제조및 수출 업무까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당나라에서 헌종이 즉위하자 해상무역을 통해 제(齊) 나라와 이익을 나눠 가진 자들에 대한 단죄가 벌어졌다. 신라에서는 애장왕이 일본에서는 이미 죽은 간무천황 대신 그의 아들 헤이제이(平城) 천황이 책임을 져야 했다. 저항하려 한 애장왕은 죽어야 했고 구스코가 대신 죽은 헤이제이는 왕위에서 영원히 물러나야 했다. 평성의 아들 또한 황태자에서 쫓겨났다. 김헌창은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憲德王) 김승언 밑에서도 차(茶) 무역과 관련된 지역(地域)의 도독(都督)들을 계속 돌아가며 역임(歷任)했다. 명주 지역의 해안으로 들어오는 일본 찻잎들은 꾸준했고 이 찻잎들을 이용해 만들어진 차(茶)들은 무주(武州:전남)와 청주(淸州:충북), 웅주(熊州:충남) 등을 통해 수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813년 무주 도독으로 816년 청주 도독으로 821년 웅주 도독으로 김헌창이 임명된 기록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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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년 2월, 4년이나 반란을 끌어 온 제(齊) 나라 이정기(李正己)의 후손들이 처형되었다. 이사도와 그의 아들이 처형되면서 당(唐) 헌종의 역할도 끝이 났다. 820년 2월 14일에 헌종(憲宗)은 환관 왕수징과 진홍지에게 시해되었다. 번진(藩鎭)들과 절도사들의 권한을 줄여 황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통제권을 넘어선 마린 로드 상방들과 그 동조 세력들을 제거하려는 당 헌종의 목표는 완성되었고 시대는 다시 그 와중에 너무 커버린 진상방(晉商幇)들과 그 동조세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목종(穆宗)이 당(唐) 황제로 즉위하면서 헌종(憲宗)이 강력히 시행하던 해상무역 규제가 없어지자 이를 가장 빨리 알아챈 것은 차(茶) 해상 무역이 활성화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명주(溟州)의 해상세력들이었다. 805년 당 헌종이 즉위하고 해상무역에 대한 당나라 정책이 변해갈 때 일본 간무(桓武) 천황은 애장왕에게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을 바치며 당나라의 해상무역 정책이 바뀌더라도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변화시키지 말 것을 요청할 정도로 일본은 찻잎을 팔기 위해 언제나 신라가 필요했다. 그 일본이 당(唐) 헌종이 죽었다는 소식에 신라의 명주 해안에, 섬진강에 찻잎들을 잔뜩 실은 무역선을 보냈다. 웅주(熊州)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당나라의 해상 무역에 대한 태도가 헌종이 죽은 이 시점에서는 종전과는 다르니 속히 찻잎(茶葉) 가공무역을 재개해 일본에서 건너온 찻잎들을 수입해 차로 만들어 수출해야 한다는 건의를 강력하게 경주에 보낸 것은 김헌창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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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에 뿌리박은 집안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있어서나 자신이 맡고 있는 웅주의 경제를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재개되어야 할 해상무역이었다. 김헌창 웅주 도독의 일본 찻잎 수입 허가와 해상무역 정상화 및 확대 건의는 관련된 모든 지역의 그리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무진주(武珍州:전남), 완산주(完山州:전북), 청주(淸州), 사벌주(沙伐州), 국원경(國原京:충주), 서원경(西原京:남원), 금관경(金官京:김해)등은 웅주도독 김헌창의 건의에 모두 지지를 표시하며 조속한 확대를 거듭 요구하는 서한을 경주에 보냈다. 천사옥대와 만파식적의 교훈을 뼈에 새기며 경덕왕과 같은 섣부른 변침(變針)으로 왕권을 놓치는 우(愚)를 또다시 범하지 않으려는 내물왕계 헌덕왕(憲德王)은 그래서 일본 찻잎을 가득 싣고 온 무역선에서 찻잎을 내리는 것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찻잎을 가공하여 만든 차(茶)를 가득 싣고 대륙으로 가려는 무역선들의 출항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배에서 산화(酸化)해 가는 일본 찻잎들을 배에서 내려 가공하고 또한 완제품 차(茶)들을 싣고 대륙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무역선의 출항을 위해 김헌창은 822년 음력 3월 15일경 반란을 선택했다.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선언하고 당나라의 눈치만 살피는 헌덕왕에 대한 야유(揶揄)의 뜻으로 경운(慶雲)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 장안국왕(長安國王)의 이름으로 경운(慶雲) 원년(元年)의 무역선 출항을 허가하는 항행(航行)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김헌창이 이끄는 군대는 여전히 헌덕왕의 신라군이었다. 김헌창이 선포한 장안이라는 나라의 군대가 무슨 군사적 활동을 했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 연유다. 김헌창은 일본 찻잎의 무허가 수입과 차무역선(茶貿易船) 불법 출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으나 반란의 책임은 물어지지 않았다. 명주에 있는 그의 집안이 반역으로 연루(連累)되지 않고 여전히 건재했던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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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 명주군왕(溟州郡王) 하서주도독(河西州都督) 김주원이 부당하게 왕위를 뺏겼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김헌창 자신의 권력욕과 야심으로 일으킨 반란은 더더욱 아니었다. 옛 백제 지역에 자신의 국가를 건립할 목표를 가지고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옛 백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은 백제의 부활이 아니라 차(茶) 무역의 재개였다. 차(茶) 무역이 재개되어야 먹고 사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이 좁고 짧은 나라에 터 잡은 건 차(茶) 때문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당나라의 눈치만 살피며 왕권 유지에만 골몰하는 신라 왕실과 조정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면서 이미 들어온 찻잎들을 가공해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려고 했던 것이 김헌창 난의 진상(眞相)이었다. 당진(唐津)을 통해 차(茶)를 수출했던 아버지처럼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한강(漢江)을 통한 차(茶) 수출(輸出)을 역설했다. 내륙 수로를 통해 평안도 개천(价川)에서 거란과 차(茶)를 무역할 것이 아니라 한강과 조강(祖江)을 이용한 백령도 수로(水路)로 발해만과 산동반도로의 차(茶) 수출을 주장한 것이었다. 내륙 수로를 통한 차(茶) 무역외에 일체의 해상 차(茶) 무역이 금지된 당시로서는 반란 말고는 바다로 나가 차(茶)를 수출할 수 없었다. 825년의 일이었다. 바다를 통해 찻잎과 차(茶)를 거래하며 돈버느라 정신이 없는 당나라 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을 보면서 신라인들의 불만은 신라 왕실에 대한 원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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