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견훤 왕건 2

by 역맥파인더

쟁점(爭點)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후삼국시대의 화엄종 분열은 남악(南岳:지리산)과 북악(北岳:가야산)으로 갈라진 일이었는데 이런 화엄종(華嚴宗)의 분열(分裂)은 사실 차교역로(茶交易路)에 대한 입장 차이로 발생한 것이었다. 섬진강을 금강(錦江)에 연결시켜 쿠다라 백제 시절 개척한 서해횡단항로(西海橫斷航路)를 사용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혜(觀惠)는 견훤을 지원했다. 관혜대사의 주장은 당항성에서 끝나는 무역로였기에 남악이라 불렸다. 섬진강을 낙동강과 한강에 연결해 예성강(禮成江)과 대동강(大同江)까지도 차교역로(茶交易路)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희랑(希朗)은 왕건을 지원했다. 희랑대사가 주장하는 무역로는 서북변 대동강 상류 개천(价川)에서 끝나기에 북악이라 불렸다. 합천을 두고 왕건과 견훤이 전투를 벌일 때 해인사의 승병(僧兵)들이 희랑대사의 승인하에 왕건을 직접적으로 도울 정도로 해인사는 왕건을 지원했다. 기후 온난화로 바다에 광포(狂暴)한 풍랑이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 바다로 나가자는 관혜의 주장은 설득력을 점차 상실했고 의상대사처럼 내륙수로를 이용해 북방 무역을 활성화 하자는 북악이 대세를 이루어 갔다. 남악은 구례의 화엄사(華嚴寺)가 북악은 영주의 부석사가 중심이었기에 화엄사와 부석사(浮石寺)의 대립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분열은 그저 세력이나 차지하겠다는 파당으로서의 분열이 아니라 광포(狂暴)해져만 가는 바다라는 기후변화 앞에 향후 차(茶) 산업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노선투쟁이었다. 완도(莞島)의 청해진(淸海鎭)이 없어지고 강화도에 혈구진( 穴口鎭)이 설치되면서 세력(勢力)을 갖게 된 집안의 왕건(王建)으로서는 해양 무역로는 폐쇄하고 예성강(禮成江)이 아닌 임진강(臨津江)을 대동강과 연결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운영하려던 궁예만큼이나 당항성에서 차무역로를 종결하려는 견훤도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위험한 인물이었다. 관혜(觀惠)가 주석(駐錫)했던 최치원의 화엄십찰(華嚴十刹)중 하나였던 합천의 보광사(普光寺)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연유였고 부석사가 있는 고창(古昌:지금의 안동) 전투에서의 승패가 56년간의 후삼국 분열을 끝장 낸 결정적 전투가 된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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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나가자는 왕륭의 제의를 흔쾌히 받은 궁예였다. 명주(溟州)로 들어오는 찻잎을 차(茶)로 만들어 고수익이 보장된 아랍과 페르시아에 팔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해 온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순식에게도 왕륭의 제의는 썩 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다였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다의 풍랑(風浪)때문에 너무 많은 배(船舶)가 그것도 그 비싼 차(茶)를 실은 채 물속으로 사라졌다. 궁예는 철원(鐵原)으로의 재천도를 결정하고 903년 청주에 있는 차(茶) 가공 기술자들을 대거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청주(淸州)는 서해를 거쳐 대륙으로 수출되는 삼한의 차(茶)를 중국의 낙양처럼 탄배(炭焙) 처리를 해주던 곳이었다. 오랜 운반으로 시들해진 차(茶)를 탄배의 일종인 홍배(烘焙)를 통해 다시 푸르게 만든다 하여 지명(地名)도 청주가 된 고장이었다. 청주 북쪽에 인접한 고장 이름이 시루를 뜻하는 증평(曾坪)인 것은 그 일대가 대륙으로 수출되는 차(茶)들을 선적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공처리해 주는 곳이어서였다. 청주에서 탄배(炭焙) 기술자 1천 명을 가족과 함께 철원으로 이주시킨 뒤 905년 철원으로 재천도한 궁예는 삼한의 모든 차(茶)를 철원에서 마지막 탄배(炭焙) 처리한 후 곡산(谷山)에서 남강(南江)으로 임진강과 연계되는 대동강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철원성.jpg 철원성 출처: KBS 역사스페셜

모두 모아진 삼한의 차(茶)를 지키기 위해 현재 남아있는 외성(外城) 흔적의 길이만 12,600 미터에 달하는 대규모의 성(城)을 건설했다. 성의 높이는 10미터였다. 외성 안에 따로 축성한 내성(內城)은 길이가 7,700미터로 추정되고 그 안에 다시 설치한 궁성(宮城)은 길이 1,900미터였다. 이 궁성(宮城)에 삼한의 차(茶)들을 모두 보관했다. 이 차(茶)들은 임진강을 거쳐 대동강으로 올라갔다. 바다를 통해 차(茶)를 무역하는 왕건에게는 철원성에 산처럼 쌓인 차(茶)들이 그림의 떡이었다. 해상무역로를 유지할 정도만이라도 차(茶)를 달라는 왕건에게 궁예는 나주에 가서 원하는 차(茶)를 구하라고 권고했다. 909년 왕건은 집안과 송악 지역의 배들을 이끌고 차(茶)를 구하러 나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궁예왕이 궐내 창고에 곡식을 너무 많이 저장했다고 태조 왕건이 언급했다는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 6월의 기사가 기록된 연유였다. 이때 저장된 곡식은 차(茶)였다. 해양 무역을 지켜온 나주인들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 대야성으로 간 견훤을 버리고 해양무역에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왕건을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궁예에게서 차(茶)를 받지 못해 해양무역로를 유지할 차(茶)가 필요했던 왕건도 승평무역로에 떠돌아다니는 차(茶)를 구하기 위해 나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견훤이 그토록 모질게 나주를 관리했던 연유였고 요란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이상하게 흐지부지된 나주 공방전으로 끝난 연유였고 끝내 왕건이 정변(政變)으로 궁예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였다.


왕건의 성공한 정변(政變)은 그러나 계속적인 불복종과 그로 인한 반란을 야기시켰다. 명주군왕 김순식의 불복종은 당연(當然)했고 환선길, 이흔암, 청주(淸州) 호족들, 웅주(熊州) 일대 호족들의 연이은 반란은 엄연(儼然)했다. 공직(龔直)의 배신으로 충청지역은 모두 견훤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런 정통성의 위기를 왕건은 끊임없는 호족들과의 혼사로 버텼고 신숭겸, 김락 같은 충신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 해양 무역을 지키고자 감행한 정변이었으나 왕건은 내륙 무역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920년 신라로부터 합천 대야성을 뺏은 이후 견훤은 925년 김천 조물성(曹物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거창, 성주, 구미, 고령 등지를 장악했고 927년 낙동강 무역로로 올라오는 모든 찻잎이 차(茶)로 만들어지는 화엄십찰(華嚴十刹)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에서의 전투 승리로 후삼국 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군주가 되었다. 활을 평양성의 다락 위에 걸고 애마(愛馬)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겠다는 문장이 들어있는 왕건에게 보낸 견훤의 편지는 이때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나가던 백제가, 바다로 나가야 할 후백제가 광포해진 바다로 인해 산으로 가야 했을 때 역전(逆轉)은 정해져 있었다. 신숭겸과 김락(金樂)을 제물로 공산동수(公山 棟藪) 전투에서 승리해 미리사(美理寺)를 장악한 견훤이 의상대사가 조직한 무역로의 심장이자 화엄십찰의 중심인 부석사(浮石寺)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고창(古昌: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왕건에게 패배해 휘하 정예병력의 태반을 잃은 건 고창 호족들이 모두 왕건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10년에 걸친 호족들과의 혼사를 통한 왕건의 호족 우대 정책이 신뢰를 받았다는 증거였다. 한 몸처럼 싸워 온 만기(萬騎)의 정예군사(精鋭軍士) 중 살아남은 이천기(二千騎)만으로는 역부족인 견훤의 왕건과의 싸움이었다.

만부교와 훈요기사가 함께 나온 고려사 (1).jpg 낙타를 만부교 교각에 매어 굶겨 죽인 일과 훈요가 함께 나온 고려사

바다는 더 거칠어져만 갔다. 마린 로드 상방이 침몰하는 배들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파산했을 때 득의 만면한 요(遼) 나라의 거란인 성종(聖宗)이 보내온 낙타(駱駝)들은 왕건에겐 그대로 모욕이 되었다.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서 힘을 키워 왕이 된 왕건이었다. 그랬기에 바다를 포기해서는 민족의 앞날이 없다고 확신하는 왕건이었다. 바다 건너 아랍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고려의 차(茶)를 사 줄 때 고려의 차(茶)는 비로소 실크 로드 상방들에게도 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왕건이었다. 아랍과 페르시아 머천트들이 고려의 차를 사기 위해 오지 않을 때 고려인들이 그들에게 가야만 한다는 것이 왕건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만부교(萬夫橋)에 매어 놓고 굶긴 낙타들이 죽어갈 때 왕건도 죽어갔다. 해상무역으로 고려의 기상을 휘날리며 민족 최고의 번영기를 열겠다는 그의 꿈은 죽어가는 왕건에겐 노래가 되었다. 차(茶) 박람회(博覽會)인 팔관회(八關會)를 매년 반드시 열어 바다 건너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을 계속 초청해야 한다고, 거란인의 풍속은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후일 훈요십조로 알려진 유시(諭示)를 남기며 죽는 왕건에게 바다로 갈 수 없으니 땅으로 가는 거다라던 궁예가 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분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만 잘 먹고 잘살자고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싸운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왕권을, 자신들의 귀족 신분을 지키겠다고 노심초사한 것이 아니었다. 급속히 변해가는 기후변화 속에서 이 땅에 같이 사는 사람들을 살리고 가족을 지키고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주고자 목숨을 바쳐 분투한 사람들이었다. 이 땅의 산(山)들엔 그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절이라는 이름으로, 고승(高僧)들의 사리(舍利)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아니 핏방울처럼 점점이 번져 있다. 지게 말고는 변변한 운송 수단 하나 없었을 그 시절 그 산골로 그 큰 건물들을 짓기 위해 그들이 흘렸을 땀은 그대로 피였을 것이기에. 아버지 왕건(王建)이 남긴 해상무역입국의 깃발을 내려야만 했던 아들 정종(定宗)도 그리고 광종(光宗)도, 아버지 왕건이 올린 해상무역입국의 깃발을 차마 내리지 못하고 부여잡은 채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혜종(惠宗)도 모두 무엇이 이 미친 기후변화 속에서 민족을 지키고 미래를 담보해 줄 수 있는 길인가를 목숨을 걸고 고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또다시 미쳐가는 바다 앞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어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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