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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꿈꾸는 시간

< 기획자의 나머지 시간_4 >

 등단을 목표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신 작가님 아래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소설을 공부하던 시절. 또 한 2년,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부지런히 도 쫓아다녔다. 마침내 작가 선생님에게 극찬을 받고 인정을 받은 작품을 신문사에 접수했다. 소설가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인생에서 두 번은 쓰지 못할 수작을 가끔 집필하기도 하는데 내가 그런 케이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날 밤 이리저리 나무를 건너뛰던 원숭이가 긴 팔 하나를 놓치고서는 어이없게도 한 나무에서 톡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생할 수가 있을까. 말로만 듣던 속담이 아주 구체적인 비주얼로 나타나니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꿈이었다. 그리고 꿈처럼 톡 떨어졌다.   


  한 번은 내가 어깨 끈이 달린 분홍색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심사를 받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옷자락이 하나둘 풀리며 어깨끈이 가슴 앞으로 스르르 내려오는 것이다. 너무나 창피해 대처를 하고 싶었지만 방법은 생각이 안 나고 사람들은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깬 적이 있다. 발표자가 질문에 현명하게 대처를 하지 못해서 낙선되고 말았다.      


  검은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알 수 없는 종류의 벌레들이 갑자기 거실 소파 밑에서 쏟아져 나왔다. 날개가 달린 백마가 하늘 위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오더니 땅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꿈을 꾸었을 때 프로젝트나 미팅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협력사의 성격 까칠한 팀장과 라면을 끓여 사이좋게 마주 보며 먹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당선이 되었다. 나는 특히 어떤 결정을 앞두고 꿈을 잘 꾼다.     


  나의 꿈 이력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일곱 살에는 동네에 거대한 불이 나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나를 찾아 헤매시는 꿈을 꾸었다. 지금도 가끔 꿈에만 나오는 그 언덕이 있는데 어머니와 할머니가 입은 복장까지 생생하다. 꿈에만 등장하는 집도 있다. 홍수가 나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과 산사태로 엉망이 된 잔해더미, 물길을 피하고 피해서 마지막에 초가집같이 허름한 집에 도착한다. 그런데 언제나 그 집에 들어가면 마치 대형 참사에서 구조가 된 생존자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등장해 내 짐을 싸주시고, 음식도 차려주신다. 한 번은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나 들고 다녔을 것 같은 분위기의 허름한 레트로 여행 가방이 안방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것이다. 가기 싫은 일을 앞두고 꾼 꿈이었다. 같은 위치에 예쁘게 포장이 된 가방이 놓여 있을 땐 회사에 돈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마치 양자역학의 세계라도 확인하듯, 나는 그렇게 다른 세상의 꿈을 꾸는 시간이 있다. 꿈을 많이 꾸다 보니 종류별로 분석도 해보고 꾸고 싶은 바람의 꿈도 그려보고 그랬다. 심리학적으로는 불안이나 걱정으로 잠들기 직전에 오래 한 생각이 무의식의 세계에 남아 꿈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확실히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안 좋거나 너무 의미심장한 꿈은 잘 꾸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잦은 불안과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기획자로 성장하면 안 되겠다. 모든 건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망상이다. 한 생각을 너무 오래 하는 바람에 생긴 과몰입의 연장이다. 기획자 초창기 시절에는 내가 과연 이 일을 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가장 컸었다. 진도는 안 나가는데 날짜만 지나가니 밤을 새도 걱정이었다. 이 불안은 경력이 쌓이고 업무에 능숙도가 붙으면서 자연스레 없어졌다. 팀장이 되었을 때는 프로젝트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모두의 고생이 헛된 수고가 될까 봐 늘 노심초사였다. 대표가 되었을 때는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가장 컸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사람은 떠난다. 은혜를 진 사람만이 원수가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가끔 현실이 되기도 하며 경험칙에 의한 전조증상 같은 것을 파생시키기도 했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면 어떻게든지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만들고 끝내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어 한다. 어떤 꿈을 꾼 후 어떤 결과가 있다면 바로 그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혹시 일의 결과로 인해 나중에 의미를 부여해 놓고 마치 꿈이 원래 그런 의미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꿈이 너무 좋아서 매일이 행복하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문제는 안 좋은 꿈이라 여기는 종류의 꿈을 꾸고 난 후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꾼 꿈마저 통제가 가능한 기획자가 되면 좋겠다. 진행이 시작되는 꿈의 내용을 통제할 수 없으니 첫 번째로는 염려에 해당하는 한 생각을 오래 하지 않았으면 한다. 옷가게를 할 때 내 손님들은 명절증후군을 제대로 앓고 있는 분들이었다. 큰며느리, 작은 며느리 할 거 없이 명절에 시댁에 가는 것을 약 보름 전부터 걱정을 한다. 그런데 다들 입 모아 하는 소리가 있다. 또 막상 닥치면 아무것도 아니고 큰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가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가기 전이 더 불행하다는 것이다. 생각을 너무 오래 하지 않는 방법은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 꿈을 꾸었다면 앞으로 그 꿈이 결과와 일치하지 않을 때를 더 기억하고 인과관계에 방점을 두지 않는 것이다. 즉, 나쁜 꿈과 나쁜 현실은 상관이 없다고 타이르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꾼다거나 일상에 영향을 주어서 괴로울 때이다. 반대로 나를 제일 기쁘게 하는 장면들을 떠올리고 그 장면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놓는다. 그리고 나쁜 꿈이라 생각하면 내가 명명한 장면을 소환해 입으로 불러준다. 예를 들어 애인과 식사하는 순간, 반려견과 산책하는 순간, 어릴 적 놀이동산에 간 추억, 생일파티 등등 신나고 행복한 장면을 하나 정지시켜 ‘사랑이’, ‘포그니’, ‘메롱이’ 같은 이름을 정하고 그 이름으로 불길하다 여기는 감정을 치환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정신과 의사가 알려준 방법인데 나는 이 방법을 나쁜 꿈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불안 때문에 혹시 안 좋은 생각이 들 때, 혹은 실제로 보지 않아도 될 장면을 보았을 때, 활용하곤 한다. 인간의 뇌는 이미 본 것, 이미 생각한 것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삭제는 불가능하지만 반복적 훈련에 의해 완화는 가능하다고 한다. 트라우마 치료에 많이 쓰이는 기법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대개 아침일 것이다.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순간, 꿈이라는 과거에 사로잡혀있기보다 다시 나만의 루틴을 가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기획자는 결국 일에서 시작해 앞날을 바라보며 나의 행복과 인생, 그리고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이다. 물론 다른 모든 이도 그렇겠지만 기획자라면, 그 계획이 누구보다 근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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