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실무_1 >
기획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소스들을 그때그때 최적화하여 직조해 내는 일이다.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알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창 시절을 지났다면 더더욱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일일이 확인하거나 평가받을 일도 없다. 아는 것을 모르기만 할 뿐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도 사실은 모른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알면서 모른다고 여기는 것보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는 게 많은 사람이 기획도 잘할까? 물론 요리재료 자체가 풍부하니 맛있고 훌륭한 요리를 할 조건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리사가 다르고 레시피도 다르고 순서도 비법도, 결정적으로 손맛도 미세하게 다르니 맛은 당연하고 전혀 다른 요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는 게 많은 사람이 기획을 꼭 잘하지는 않으나, 기획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개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인데, 그 이유는 기획을 하면서 점점 더 분야별 지식이 넓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식의 총량보다 그것의 무한한 가공능력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끄집어 내놓고 합치고 잘라내어 보기 좋게 가다듬을 기회는 많지가 않다. 기획자는 자기가 가진 정보들을 가지고 고객이 원하는 바대로 멋진 요리를 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 기획자들은, 너무나 쉽게 관성적으로 숙제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다 보니 한번 작업해 놓은 개별 소스들도 풍부하다. 바로 이전에 생태에 관한 홍보관을 작업했는데 오늘 환경과 같이 비슷한 주제의 박물관 제안서가 떨어졌을 경우, 별생각 없이 비슷한 부분을 슬쩍 카피부터 해놓고 작업을 시작한 적은 없는가. 특히나 모든 박물관에서 제시하는 미래 코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모습을 그려가는 과정은 사실상 대동소이하다. 경력이 쌓이면 내가 작업한 제안서뿐 아니라 타사에서 만든 제안서까지 합해져 기획자로서는 바로 보고 베껴 쓸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해진다. 이러저러한 핑계로 기획자는 단어 몇 개를 바꾸고, 여기저기서 솎아내어 결과물을 합성하여 제안서를 만들어내기 쉽다.
진심으로 경계해야 할 버릇이다.
편한 방법에 이끌리다 보면 절대 실력 있는 기획자가 되기는 힘들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그렇게 내 글을 표절하는 친구들을 보아왔다. 회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만들어 놓은 글들을 교묘하게 가지고 가서 자신이 한 것처럼 티 안 나게 가공한 것을, 원래 창시자는 귀신같이 알아본다.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여 지어낸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글을 복제하면 금방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다음에 또 그렇게 해야 많은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권하고 싶은 방법은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볼 때처럼 백지와 처연히 독대하라는 것이다.
A4 용지는 생각보다 꽤 넓다. 다 채웠다면 파생된 생각을 적어보라. 과연 하나의 프로젝트로 얼마나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을까. 말하자면 기획자의 최초 설계도에 해당하는 진액 메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이 메모를 훔친다면 그 한 장만으로도 전체적인 내 생각을 다 알 수 있도록.
인터넷 기사 검색도 없이, 네이버나 포털 없이,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도 보지 않고, TV나 SNS 같은 채널도 없이, 나무위키 같은 백과사전도 없이, 파파고 같은 번역기도 없이, 벤치마킹 대상의 해외 홈페이지도 없이, 현장사진도 하나 없이,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레퍼런스도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에 완성한 제안서도 하나 없이, 그렇게 연필 하나 들고 백지 앞에서 누구의 생각도 아닌 나만의 생각을 쓰고 그려보라. 만약 당장 오늘부터 그런 방식으로 입찰을 결정한다 하면 누구도 이길 수 있을 자신이 생길 때까지.
눈사람으로 치자면 처음에 힘겹게 두 손으로 꼭꼭 눈을 모아서 눈 바닥에 굴려도 잘 뭉쳐질 수 있을 만큼의 눈덩이를 말한다. 사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시절엔 다 그렇게 기획을 하고 문서를 작성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할 시절에는 종이 신문을 가위로 잘라 스크랩용 파일을 만들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나만해도 아날로그로 일을 배워서 그런지 요즘 기획자들의 편리해진 업무 방식이 기획자의 실력 향상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라도 종이와 필기구만 있으면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뼈대삼아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옛날 작가들은 컴퓨터가 아닌 종이 원고지에 자신의 손으로 글을 썼고, 한 자 한 자 물리적인 힘을 가해 아이디어를 녹여내었다. 비어있는 아이디어 노트 같은 것을 마련해 두어도 좋다. 내 생각을 대신해 주는 컴퓨터의 도움 없이 현재의 내가 떠올린 생각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방식이 꼭 더 좋은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아주 오래전에 화이트보드에 즉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풀어내면서 구상안을 만들어내던 선배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니 그 프로젝트의 제안은 끝나 있었다. 그런 경지까지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보고, 계속하다 보면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