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띠 샹플랭 극장의 비상구

올드 퀘벡 세 번째 이야기 - 쁘띠 샹플랭 거리의 빨간 문

by 스노리

루아얄 광장을 지나 노트르담 거리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의 Rue du Cul de Sac 샛길로 들어가면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걸려 있는 Allée des Parapluies 엄브렐라 거리가 나온다. 다채로운 색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파란 하늘을 알록달록한 세상으로 바꿔 놓고 있다.

그냥 우산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Château Frontenac 프롱트낙 호텔이 건물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어 언덕의 풍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쁜 장소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스팟이라 거리를 지나면서 잠깐의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우산이 매달려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눈이 많이 오고 바람 부는 추운 겨울에는 철거한다고 하니 날씨가 추워지면 알록달록한 세상이 사라지고 차가운 회색 하늘이 남는 거리이다.


짧은 엄브렐라 거리를 빠져나오면 레스토랑이 즐비한 Rue du Marché Champlain 샹플랭 시장 거리가 나오고 왼쪽은 세인트 로렌스 강이 흐르는 올드 포트이다.

거리의 오른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으로 몇 계단 올라가면 관광객들의 쇼핑 천국인 Rue du Petit-Champlain 쁘띠 샹플랭 거리가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다.

이곳에는 토끼 고기 요리 전문점인 Le Lapin Saute 토끼 요릿집 -리스트에 저장해 놨으나 남편이 굳이 귀여운 토끼를?이라고 해 삭제함- 외에도 많은 레스토랑과 스카프, 의류, 피노키오 인형, 가방, 기념품을 파는 샵이 있고 도깨비 신부의 정점을 찍을 빨간 문이 나온다.


도깨비 신부가 도깨비를 따라 서울에서 퀘벡으로 텔레포트하는 문이다.

도깨비가 방영된 후, 사진을 찍는 사람이 늘어나자 캐나다 사람들이 극장 뒷문에서 왜 사진을 찍느냐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사진을 찍으려고 줄 서 있다.

넷플릭스의 힘이다.

빨간 문 옆의 창문에 스티커가 붙어 있어 가까이 가보니


‘쁘띠 샹플랭 극장 비상구

유명한 문을 보려면 거리 끝에 복제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는 붉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화살표를 따라가 보니 진짜로 거리 끝에 빨간 문의 복제품이 있다. 샹플랭 끝자락 구석에 ‘도깨비 팬이라면 여기서 사진을 찍으세요’라는 팻말과 빨간 문을 설치한 담벼락이 댕그라니 서 있다.

빨간 휴지를 줄 것 같은 문에서 남편과 한참을 웃으며 “여기서 사진 찍는 사람이 있기는 해”라고 하는 순간 아시아계 여성 둘이 와서 사진을 찍는다. 진짜 문을 모르면 도깨비 신부가 열고 들어온 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리에 사진 찍는 사람들 때문에 극장 뒷문 사용이 불편해서 복제품을 만들었나?”


“어쨌든 쇼핑 거린데, 사람들 모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사람들 많이 오면 자기네 가게에도 들를 텐데”


존재 이유를 남긴 채 구석의 간이 화장실처럼 생긴 가짜 빨간 문은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신부처럼 멀뚱멀뚱 서 있다.


다시 쁘띠 샹플랭 거리로 돌아가 샹플랭 거리가 끝나는 지점까지 가면, 샤토 프롱트낙 호텔로 오르는 푸니쿨라가 나온다.

몽마르트르의 사원을 오르는 정도면 모르겠지만, 몇 계단만 오르면 호텔인데 푸니쿨라 설치는 과하다. 호텔 옆에는 완만한 언덕길도 있어 구경하면서 오르내리는데 별문제가 없다.


푸니쿨라 맞은편에도 35가 쓰여있는 노란 창문 아래 빨간 문이 또 하나 있다. 이번에는 서양인들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어 서양 드라마에 나왔나 했더니 1700년대 과부들이 오랜 기간 거주했다고 해서 ‘세 명의 과부’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 아주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푸니쿨라 옆에는 Breaking Neck Steps ‘목 부러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차가 높아 술을 먹고 진짜 목이 부러져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그 정도로 계단 차가 높지도 않고 계단이 구불구불하지도 않다.

어쨌든 퀘벡 시티는 관광사업과 보험업으로 먹고사는 도시다 보니, 뭐든 돈 되는 것은 다 설치하고 이름도 막 갖다 붙이고 한다.



중세 시대 복장을 한 가이드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한국인 관광객들도 밀고 들어온다.


“빨리빨리 오세요. 저 뒤에 사진 찍는 분들. 거기 말고 여기가 사진이 잘 나와요”


가이드가 사진 찍는 스팟도 정해준다.


가이드를 빨리빨리 쫓아다니면서 내 시간을 남들과 공유해야 하는 패키지여행은 나이가 들어 걷기 힘들어도 안 할 것 같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여행 스팟보다, 인스타그램이 보여주는 인생 샷 스팟보다, 나만의 보물 같은 장소를 찾고 싶다.

빨리빨리 다니고 싶지 않다. 계획에 없어도, 일정이 틀어져도 괜찮다.

거기까지 가서 이걸 안 봤어? 저길 안 갔어?라고 물어보면 응. 안 봤어. 안 갔다고 대답한다.

우리의 여행은 계획된 자유이다. 성격상 일정은 시간을 들여 계획하고 예약하고 짜둔다. 하지만 계획대로 여행을 다니지는 않는다. 계획한 장소에 가다가 멋진 골목이 나오면 그대로 새 버리고,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다음 일정도 무시하고 한참을 퍼지고 앉는다.

잘못 내린 기차역에서 만난 안갯속의 마을, 상흔이 박혀 있는 황량한 광장, 익숙한 향기가 뒤돌아보게 만드는 낯선 그곳에 보물 같은 스팟이 있고 나의 인생 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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