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

일리노이의 인연

by 스노리

LA에 사는 남편의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온다. 딸이 이번에 뉴욕에 있는 대학원에 들어가 뉴저지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우리 아들도 함께 밥을 사주겠다고 한다. 친구의 딸과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기도 하고 LA 집에서 잠시 머물며 여행도 한 친한 사이라 아들에게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겠다고 한다.

그나저나 우리는 퀘벡에 있다며 안부를 물어보자 그 친구는 놀라면서 직항이 없어서 뉴저지에 들르는 거라며 퀘벡에 여행하러 온다고 말한다.

남편이 인연은 인연이라며 그들이 오는 날 퀘벡 시티에서 저녁 약속을 잡는다.


올드 퀘벡에서 점심을 먹고, 스포츠 샵에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는데 낯익은 누군가가 들어온다. ‘어? 왜 익숙한 얼굴이지?’ 잠시 쳐다보다가 저녁에 만나기로 한 부부라는 것을 깨닫고 깔깔거리며 두 손을 맞잡는다.

이런 인연이... 지구의 반대쪽에서 사는 사람들이 시골 마을의 스포츠 매장에서 약속 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이렇게 만난다. 약속 없이 우연히 만난 듯한 느낌이다.

친구의 와이프는 한국도 LA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며 예의 동글동글한 얼굴로 한가득 웃음 짓는다.


“연락 없이 여기서 우연히 만났으면 진짜 극적이었겠다”


“맞아. 연락하지 말지. 너무 재밌었겠다”


라고 말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극적이고 재미있다.


남편이 일리노이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을 때,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와 김치도 챙겨 주고 집에 초대해서 밥도 많이 해 준 정 많은 와이프다. 아이도 같은 해에 먼저 낳아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기도 하고, LA 갔을 때는 바비큐 파티를 해 초대해 주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외국에 오래 있으면 한국 음식이 생각난다며 한인 마트에서 떡볶이 밀키트와 이런저런 반찬들을 사 들고 와서 전해준다.

요즘 세상에 흔하지 않은, 베푸는 것이 몸에 밴 진짜 맏며느릿감이다.


부부의 딸은 엄마와 많이 닮은 눈웃음이 귀여운 여자아이다. 지금은 숙녀가 되었지만, 어렸을 때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양의 서커스를 본 후 기계체조 선수가 되겠다며 다리를 찢고 텀블링하던 소녀였다.

LA에서 같이 순두부를 먹는데 -날달걀이 따로 나와 직접 넣어 먹는 집이었다- 아들이 달걀을 넣지 않자 자기가 먹어도 되겠냐며 달걀 두 개를 순두부에 넣고 호로록 먹는 모습에 반해 아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혼자 탐나는 후보에 넣어 두었었다.


Fairmont Le Château Frontenac 프롱트낙 호텔에 묵는다며 호텔 안을 구경시켜 준다고 한다. 전에는 투숙객이 아니어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도깨비가 방영된 후 우체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로비가 너무 분주해진 후로는 투숙객의 키를 확인하고 들여보내 준다.

100년도 넘은 호텔이라 내부는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역사적인 유적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리노베이션을 해 온 듯 천정이나 벽에서 고전적인 새로움이 묻어난다.

도깨비 신부가 엽서를 넣는 우체통 장면이 기억이 안 나서 나무로 된 오래된 우체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번쩍번쩍한 금빛 컬러의 엘리베이터들 사이에 역시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금빛 우체통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한 군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엽서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우체통 틈에 끼인 채로 발견되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고 싶다는 러브레터는 부쳐지지 않은 채 주인을 잃고 좁은 틈새에 끼어 외롭게 홀로 세월을 맞고 또 맞아 버렸다.


영화 아멜리에 속의 아멜리에의 엄마는 사랑 없는 무관심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중 남편이 전쟁 중에 보낸 오래된 러브레터를 받게 된다. 우편 사고로 수년간 묶여 있다가 전해진 애정 어린 편지는 엄마의 감정을 북받치게 만들지만 어긋난 시간을 돌리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추락하는 사람과 함께 엄마의 과거에 대한 미련은 잔혹한 코미디처럼 뭉개져 버린다.

아멜리에가 외로운 이웃의 오래된 상자를 찾아 주고, 비디오테이프와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어긋난 시간을 돌려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원의 인형을 훔쳐 여행하는 사진을 남기며 폐쇄된 삶을 살던 아빠의 멈춰버린 시간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낭만적인 파리를 배경으로 아멜리에의 도둑 같은 귀여운 프로젝트가 유쾌하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영화였다.

어떤 이의 시간을 어긋나게 했을 부쳐지지 않은 프롱트낙 우체통의 편지가 그 누군가의 삶을 너무 오래 멈춰 세우지 않았기를 바란다.


호텔 방은 연한 갈색 톤과 화이트 몰딩의 도깨비가 나올 것 같지 않은 화사한 느낌이 들지만 육중한 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침대 스툴과 가구가 역사적인 호텔에 맞게 우아하게 배치되어 있다.

창밖으로 많은 관광객이 우리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다. 정작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은 호텔의 미관을 감상할 수 없다. 뒤쪽의 높은 언덕에 있는 힐튼에서는 도깨비 호텔의 야경을 보며 머무를 수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가 나올 듯한 샤토 프롱트낙 호텔에서의 하룻밤이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Chez Temporal 프랑스 퓨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다.

에스카르고는 통조림 달팽이를 사용한 듯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지만, 쉬림프 크루아상과 남편 친구가 시킨 김치가 사각사각 씹히는 한국식 만두를 닮은 라비올리 브로스는 아주 맛있었다. 셰프 스페셜 메뉴였는데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주방장이 분명하다.

서빙하는 직원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진도 찍어 준다. 조명과 분위기도 아늑해 편안하게 죽치고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친절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이다.



내일 일정을 물어보니 몽모랑시 폭포에 가려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몽모랑시 폭포와 오를레앙 섬에 가려고 렌트를 했던 차이다.

반색하며 "우리도 껴 주세요"라고 손을 번쩍 들어 같이 가기로 한다. 우버를 타고 가려고 했다는데, 갈 때는 부르기 쉬웠겠지만 올 때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타지에서 만나 밤늦도록 20년도 지난 묵은 추억을 끄집어내며 수다를 떨고 깔깔거린다.

관광객의 열기와 불빛들로 더 환해지는 퀘벡의 밤에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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