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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i Jan 20. 2024

고려-거란 전쟁 <1>

만부교 사건과 초기 고려-거란 관계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사랑하는 1인으로서 <태종 이방원>에 이어 KBS 대하사극이 새로운 느낌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당 전쟁, 조선의 임진왜란에 못지 않은 대전쟁이었으며 숱한 영웅들과 교훈을 낳은 이 고려-거란 전쟁이 재조명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고려-거란 전쟁, 혹은 여요전쟁은 장장 30년에 걸친 대전쟁이었습니다. 993년 소손녕의 1차 침공을 시작으로 거란 성종이 친정한 1010년의 2차 침공, 그리고 1018년 소배압의 침공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분쇄한 3차 침공까지 크게 세 차례의 대전이 있었고,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공격이 있었으며 심지어 1018년 이후에도 국지적인 침략전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1010년의 2차 전쟁과 1018년의 3차 전쟁을 다룹니다. 100~200부작에 달했던 과거 KBS 대하사극에 비해 분량이 크게 줄어들어 32부작에 그치는 <고려 거란 전쟁>에서 30년 전쟁 전체를 조망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을 잘 이해하려면 1차 침공은 물론이고 그 전후의 사건들도 함께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드라마를 재밌게 보는 차에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알아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료도 찾아보고 논문도 읽어봤는데, 역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쟁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교훈을 주는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에 대해 알게 된 것, 배우게 된 것을 정리하여 이곳에 올려 보고자 합니다. 9~10회 정도로 나누어서 작성될 것 같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애호가의 수준에서 쓰는 글이므로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42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지 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태조 왕건은 궁예의 왕위를 빼앗아 왕조를 세웠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진정한 삼한 통일은 단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킬 때를 전후로 하여 발해로부터 많은 이주민이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그 중 가장 크고 상징적인 사건은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의 귀순입니다. 태조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고 백주(白洲, 현 황해도 배천군)를 주어 지키게 했습니다. 고려인들에게 삼한 통일은 단지 백제와 신라의 병합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말갈이 세운 발해까지 병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942년에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고려에 30여 명의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50마리의 낙타를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공격해 멸망시켰으니, 무도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하며 사신들을 유배 보내고 낙타들은 개경 만부교 아래에 묶어 굶어 죽게 하였습니다(고려사 태조 25년 10월).      


개성 만부교 (사건 이후 '낙타다리'라는 뜻의 '탁타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훈요십조’에서도 거란을 배척하라는 유시를 남겼습니다. 그는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고 풍속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 “강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란이 쳐들어 올 경우 전쟁의 사령부가 될 곳이자 북방의 중심도시로 키우고 있던 서경, 즉 평양에 대해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차하여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라”며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왜 거란을 증오했을까?


 태조 왕건이 이토록 거란에 대해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제기되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발해 유민 세력에 대한 정치적 제스쳐’라는 것입니다. 거란에 대하여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고려의 삼한 통일 대업을 완성케 한 발해 유민 세력에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며 발해 유민을 넘기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가 내부의 통합과 왕권의 안정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강성한 외국에 대하여 이러한 외교적 대형 사고를 일으키려면 국제관계에 대한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거란 태종은 후당(後唐)의 군벌 석경당을 후진(後晉)의 황제로 만들어주고 그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연운 16주라는 중원의 크고 풍족한 땅까지 뜯어내었습니다. 중원의 황제가 북방 유목민족의 책봉을 받은 최초의 일입니다. 그것은 거란이 발해를 정복하여 만주를 장악한 뒤 이제는 중원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그렇고, 훗날의 고려-몽골 전쟁이나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원의 북방 세력은 통일이 되면 늘 만주를 정복하고 한반도를 눌러놓은 뒤 중원으로 들어간다는 대전략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 탓에 중원의 북방이 통일되면 한반도는 전쟁의 참화에 얼룩졌으나, 다르게 말하면 한반도는 북방을 견제하는 송곳과 같은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송곳은 자체 힘만으로 북방을 견제하거나 공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반도가 중원 왕조와 손을 잡고 북방을 견제하고 억눌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97%B0%EC%9A%B4%EC%8B%AD%EC%9C%A1%EC%A3%BC

북방-중원-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


 어쩌면 태조 왕건에게는 이러한 대전략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물론 뇌피셜입니다). 북방 세력의 대전략에서 한반도와 중원은 결국 굴복의 대상이고, 한쪽이 무너지면 그 기세로 다른쪽도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가 정복되면 북방 세력은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중원이 무너지면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를 잃고 북방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조 왕건은 거란이 만주의 발해를 정복한 이 시점에 고려에게는 중원과 손잡고 거란에 대항하는 선택지 밖에는 없다고 보았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판단에 이르지 않고 단지 발해 유민들에 대한 정치적 제스쳐만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태조 왕건은 삼한을 통일한 위대한 창업군주였지만 생각보다 많은 비판점과 한계를 남기기도 하니 말입니다.)    

 

 속자치통감(後晋 齊王 開運二年, 945년 기사)에는 한국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태조 왕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고려의 왕건이 주변나라를 병탄하여 강대해지더니, 후진의 석경당에게 ‘발해는 나와 친척의 나라인데 거란이 그 왕을 잡았으니 내가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를 구하고 원한을 갚겠다’는 뜻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경당은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았고, 석경당이 죽은 뒤 조카인 석중귀가 출제로 즉위하여 거란과 싸웠으나 이때는 고려 혜종 때의 정치적 혼란기로 양국의 연합 작전이 이뤄지지 못하였다고도 합니다.      


 당시 막 통일을 이루고 통치 체제도 정비하지 못한 고려가 거란을 공격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 기사를 통해서 적어도 고려가 중원과 연합하여 거란과 대적한다는 대전략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려의 발해의 복수를 갚는다고 하는 명분, 즉 고려 내 발해 유민들에 대한 정치적 입장도 있었음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는 혜종-정종-광종-경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과 왕권 강화의 시기를 거쳐 성종(成宗)이 즉위하게 됩니다. 성종은 비로소 고려 초의 혼란기를 매듭짓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게 되는데, 마침 거란에서도 정치적 혼란기를 겪은 뒤 성종(聖宗)이 즉위합니다. 그러나 거란 성종 야율융서는 아직 어려서 어머니인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하는데 승천황태후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지휘관으로 만주의 위협을 제거하고 중원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993년, 거란의 부마이자 동경유수인 소손녕(소항덕)의 제1차 침공으로 30년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이 시작됩니다. 




여담     

 태조 왕건이 일으킨 이 만부교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후대 사람들, 특히 고려 사람들조차 그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유학이 통치 이념으로 확립된 이후에는 ‘낙타는 기르기 번거롭고 돈이 많이 드는 동물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과 지배층의 사치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벌인 일’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훗날의 고려 충선왕은 고려 유학의 거두 이제현에게 “낙타 50마리를 기른다고 그 폐해가 백성들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데, 받기 싫으면 돌려보내면 그만이지 왜 굶겨 죽이기까지 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현은 “창업 군주의 생각은 후대 사람들이 그에 미칠 수 없습니다. 오랑캐의 간교한 뜻을 꺾으신 것이든, 후대의 사치를 경계하신 것이든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여 힘써 행하십시오”라고 답하였습니다(고려사절요 태조 25년 10월). 아마도 이 당시에 오면 ‘태조께서 백성들의 고충을 생각하셔서 낙타를 굶겨죽이셨다’는 해석이 주류가 된 듯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앞서 말한 정치적, 국제관계적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적 이유도 있는데, 당시는 지금과 같이 도로가 잘 정비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심지어 거란 사신들이 개경까지 지나온 북한 지역은 지금도 도로가 미비해서 옛날 길을 그대로 쓰고 있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낙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흔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길은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신들은 수십마리의 낙타를 끌고 개경까지 오면서 전쟁시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길을 파악한 것과 같았고,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이른바 화이트요원들의 첩보활동을 묵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낙타들을 죽인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충선왕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신들을 유배 보내되 낙타는 기를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굳이 굶겨 죽일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낙타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낯선 동물 수십마리를 기른다는 것이 큰 사업이었고, 기능적으로 낙타를 활용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금도 관용어로 쓰이는 ‘하얀 코끼리’의 고사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고대 태국의 왕이 싫어하는 신하에게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하는 왕이 하사한 코끼리를 정성들여 키워야 했는데, 딱히 쓸모도 없고 키우는데 돈만 많이 드는 이 코끼리를 키우던 신하는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얀 코끼리’는 지금도 비용은 많이 들지만 쓸모는 없는 애물단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아마도 태조 왕건에게 50마리의 낙타들은 이 하얀 코끼리와 같았을지 모릅니다. 



참고 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본

(https://db.history.go.kr/)

 - <속자치통감장편> : 정재정 편저, <동아시아의 역사>, 동북아역사재단

(http://contents.nahf.or.kr/id/NAHF.edeah.d_0003_0010_0020_0030#self)

 - 육정임,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동북아역사논총, 34호(2011), 11-52면

 - 주간경향, [이기환의 Hi-story](86)외교 선물이 애물단지로…코끼리 유배사건의 전모

(https://m.weekly.khan.co.kr/view.html?    med_id=weekly&artid=202306021129361&code=116#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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