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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유혹" 함백산 바람길

설산 기행

"설산의 유혹"
            함백산 바람길

이 도 연

새벽 공기가 귀밑을 맴돌며 일월의 겨울 추위를 과시하듯 길가에 나목을 차갑게 몰아붙이며 새벽 시간을 타고 넘는다.
어둠이 짙을수록 여행자의 발걸음은 잰걸음으로 부산하게 움직인다.
도시를 등지고 겨울 산으로 입산하는 날에는 설원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냉기가 조금은 두려워 머뭇거리기도 하지만. 체감온도보다 포근한 눈 덮인 설원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대관령이나 한계령 넘어 영동과 영서로 이어지는 바람골 찾아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인 함백산(1572.9m) 품으로 간다.
새벽 공기가 싱그러워 심호흡을 크게 하며 어둠을 재우며 밝은 불빛을 몰고 달려오는 버스를 기다린다.
파카의 지퍼를 목 위까지 최대한 끌어올리며 한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함백산 만항재 겨울 산의 풍경을 그려본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과 태백시 일원에 능선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진산으로 봄이면 금대봉, 은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야생화 천국을 만날 수 있으며 겨울에는 백두대간의 어깨에 우뚝 솟아 태백산, 설악산, 오대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함백산 정상에 서면 고봉 준령이 파노라마처럼 발아래 펼쳐지는 눈 덥힌 설산의 진수를 맛보는 기쁨은 겨울 산을 찾는 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미녀의 팝무파탈 유혹이다.

마차재를 지나 나선형의 길들이 길게 이어지고 차는 힘겨운 엔진에 탄력을 불어 넣으며 정암사 입구에서 마지막 기운을 다하는 운동선수처럼 가파른 비탈의 어깨를 짚고 일어선다.
함백산(1,572.9m)은 정선과 영월 태백의 꼭짓점인 만항재(1,330m)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좁게 올라가는 등산로 들머리에 발목 깊이 눈이 푹푹 빠진다.
멀리 보이는 함백산 정상에 통신 첨탑이 허공을 향해 전파를 날리고 보이지 않는 신호와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며 파란 하늘을이고 반짝반짝 빛을 품고 있다.

능선 부드럽게 이어져 산행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함백산 정상 1km 지점부터 급경사로 이어지는 산세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겨울 산행의 묘미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산행길에 형형색색 등산복으로 때 아닌 겨울 능선에 오색 꽃이 피었다.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고 올라선 정상에서 느끼는 쾌감이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정상이구나!
하늘과 맞닿아 더 오를 수 없는 곳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그곳에 함백산 정상을 알리는 돌탑이 있다.
마음을 경건하고 정갈하게 합장하고 온 누리 산하에 평화와 안녕히 깃들기를 염원한다.

겨울 하늘에 곱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설산의 꿈을 꾼다. 두 눈을 감고 함박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사르락 사르락 그들의 속삭임 고요 속에 살금살금 내리는 겨울 나비 무희의 춤사위가 하늘거린다.
하늘과 땅은 온통 백의 천사들의 합창이 들리고 고요와 적막이 계곡 자락 깊이까지 내려앉아 공평하게 내리쪼이는 햇살처럼 부드럽게 흩어진다.
고봉 준령 어깨 위에 스며드는 겨울 설산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마음속에 한 폭 수채화를 그리는 일이다.

가끔 산 끝자락 두메산골 촌락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뜨겁게 달구어지는 아궁이 불멍과 따스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목가의 정겨움이 그려지는 풍경이다.
쿨럭쿨럭 노인의 받은 기침이 아침을 두드린다. 텃밭 언저리 설중매가 꽃봉오리를 터트릴 때면 앞마당 뛰어다니는 누렁이는 하릴없이 허공에 짖고 호박빛 등불 아래 오손도손 노부부의 정겨운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강원도 설산을 걷다 보면 무아 순백 세계의 맑고 슬픈 이야기가 생각난다. 폭설에 길이 막힌 높은 암자에 홀로 오세암을 지키는 동자승의 슬픈 눈동자는 설산 머리 위에 은별이 되었다.
고립무원의 땅에서 스님을 기다리다 지쳐 나무 관세음보살 관음의 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며 열반에 드는 장면에서 눈에 맺힌 한줄기 눈물과 아미타불 염화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동자승의 넋이 피고 지어 윤회의 강 건너 억겁의 시간을 지나 은둔의 꽃으로 피어나는 한 떨기 우담발라 보리심을 만나는 순간 내 마음에도 한 떨기 설화가 피어난다.
이 땅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행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지럽혀진 마음을 정화하고 정진하는 마음으로 설산의 계곡을 오르고 또 오른다.

능선에서 바람을 타는 눈발이 양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마음속에서 내리는 폭설이다. 함박눈이 내린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눈이 뼈마디 사이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타고 후드득 몸을 털어 머리 위로 발등으로 덩어리가 되어 떨어진다.
설산 허공에서 얼어버린 정물이 될 것 같은 새들도 가벼운 날갯짓으로 바람을 보탠다.

발밑에 부서지는 눈 입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뽀드득뽀드득 겨울 산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증거라고 끝없이 겨울 숲이 말을 걸어온다.
들녘도 눈 속에 잠들고 가지런하게 빚어 올린 성글 한 겨울 능선 나뭇가지 위로 눈꽃이 만발한다.
성글 한 산의 속살을 온전하게 보여주고 꾸밈없이 겨울나기를 하는 겨울 산은 언제나 겸손하다.
겸허한 마음과 눈과 바람을 등에 업고 뿌리의 끈질긴 억척스러움으로 대지를 부여잡고 잉태의 꿈을 꾸는 겨울 나목의 생명력은 언제나 경이롭다.
온통 무채색으로 덧칠한 능선을 가로지르며 눈길을 내려온다.
발목과 무릎 힘으로 지구의 중력을 들어 올리는 힘겹지만, 즐거운 노동으로 대지를 밟고 세상으로 향한다.
발아래 밟히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다 눈 쌓인 숲으로 들어가고 오르막 내리막 시소를 타며 하산한다.

만항재 갈림길에서 사북, 고한, 태백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내 청춘의 열기로 뜨거웠던 시절 밤 열차를 타고 사북탄좌을 찾아 갔던 추억이다. 하얀 입김을 풀어 헤치며 사북역에 정차한 차창에 어둠이 아직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 사북 탄좌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건너편에 높은 건물들 불빛이 눈에 들어와 이 산골에 높은 빌딩이라니! 의아심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언덕에 납작하게 엎드려 지은 집들의 불빛이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던 그 시절 청춘의 한때!
그래 그때 그랬지, 사북 탄좌 여기가 그곳이었어!
이제는 카지노와 고급 리조트가 자리 잡아 위락시설과 우리나라 굴지의 휴양소가 자리 잡은 곳이 되었다.

노을이 산을 떠밀고 내려가라 등을 떠민다.
양희은의 한계령 가사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이제는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는 산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며 여행자의 발걸음을 옮긴다.
만항재 끝자락 함백산 정상에서 두문동재를 등지고 멋진 겨울숲 정취에 흠뻑 취해 하루를 마무리하며 힘겹게 달려온 두발을 토닥토닥 위로한다.
산의 품에 안긴 후 시원한 막걸리 한 잔에 오롯한 인생이 행복하다 말하며 잘 살아온 또 하루 멋진 인생 브라보를 외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날까지, 동행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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