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 상하원 기행
"죽도 상화원"
사색과 명상으로 가는 길
이 도 연
여행자의 새벽
오늘은 또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나!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서둘러 행장을 차리고 이른 어둠을 헤집고 길을 나선다.
감청색 어둠이 도로에 잉크를 부어 놓은 듯한 새벽이 발밑에 깔린다.
아침노을은 아직 게으름을 피우고 부지런한 삶의 일상을 걷는 사람들은 밤사이 어둠을 밝혀 조름에 겨운 달빛을 등에 지고 낯선 거리의 찬바람을 거칠게 들이키고 있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어둠을 털어내며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건너편 주막에 걸려있는 불빛이 밤사이 마셔버린 취기에 허청허청 흔들린다.
일없이 흔들리는 들풀도 굽어진 허리를 펴며 꽃잎의 노란 속살을 빼꼼하게 들이밀며 선홍빛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이다.
차는 끓어오르는 청춘의 힘 같은 엔진 소리를 내며 도시의 중심에서 이탈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간다.
어둠 저편에서 새벽 의식을 마친 노을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어 지평선 넘어 등불을 밝히며 어둠을 밀어내자, 가을꽃들이 만발한 산과 들에 붉은 미소로 가득하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감기다 천천히 풀리기를 반복하며 지나간다.
노을을 등에 업은 산과 들은 온화하게 지나다 가파르게 올라채며 강직하게 곧추서기도 하고 강물을 돌아들어 숨을 죽이며 물안개에 젖은 모습은 여인의 수줍은 옷깃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대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만나는 풍경은 새로운 도시와의 만남은 호기심 많은 고양이 눈빛이 된다.
낯선 곳 정겨운 풍경이 일어서고 드러누워 여행자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우수에 젖는다는 단어에 앞서 계절의 정취 끝에서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추수가 끝난 보령 들녘의 정갈함이 허허로운 마음으로 다가선다.
또 하나의 계절을 지나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들짐승이나 동안거를 준비하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경건함이 앞선다.
만산홍엽으로 물들어가는 산과 들이 현란한 수채화를 그리며 아찔한 아름다움에 꽃멀미를 한다.
햇살은 흙을 품어 생명을 키워내고 흙은 어린뿌리를 보듬어 새싹에 기를 불어 넣어 꽃과 열매에 자양분을 주어 번성하고 잉태를 위한 또 환절기를 넘는다.
지나가는 것과 새로운 것, 시작과 끝, 다가올 시간 앞에 막연함이 때로는 두렵고 변화와 혁신이라는 고지식하고 경직된 단어 앞에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밤바람 찬 공기가 무서리를 뿌리는 계절이 다가오면 미련이나 그리움 따위가 허약해진 영육을 흔들어 밀어낸다.
그럴라치면 문장 한 귀퉁이에 헐거워진 마음을 풀어 놓고 눈물주머니를 왈칵 쏟고 싶다.
단어와 문장에 설움이라도 시분다분 나열하다 보면 어느덧 그곳에서 희망이나 기쁨 같은 것들이 하나둘 자라나기도 한다.
외로움을 보듬는 일이나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는 일상은 여행을 통해서 발견한다.
밋밋하게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것들 사이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선홍빛 단풍을 밟으며 말라가는 나뭇등걸의 목마를 타고 찾아온다.
꽃 피고 낙엽 지니 세월이 저물고 어제의 나는 또 하루에 저당 잡혀 익숙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구나!
깊이 있는 학문의 경지보다 이렇게 사소한 일이 자연의 이치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은 길고도 멀어서 오래 걸렸다.
역마살이라고 했던가?
호모사피엔스가 직립보행으로 첫걸음을 시작한 태고의 땅인 산과 들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육신을 위로하고 때 묻은 영혼을 맑고 청아한 청록빛 개울에 헹궈서 파란 가을 하늘에 말린다.
네 활개를 활짝 벌려 기지개를 켜며 넉넉한 가을 숲을 껴안아 본다.
숲 본연에서 나는 향기와 어미의 품속으로 날아든 어린 새의 포근함과 안락을 느낀다. 시원의 자연은 그런 것인가 보다.
같은 길이지만, 한 해 두 해 그 길을 걷노라면 여울져 흐르는 물이 어제의 물이 아니고 내 삶의 발자국 따라 걷던 그 길을 걷는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듯 핑 도는 눈물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계절은 바람을 타고 세월은 육신의 풍화를 재촉하지만, 여전히 가을 산하는 투명한 눈물방울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듬어 온갖 색을 덧칠하며 아름다웠다.
이제는 절정에 이르는 것들과 숭고한 이별을 하고 삶의 윤회나 참회록을 써야 할 시간 스님들의 선방이 적막과 고요로 분주하다.
동안거에 드는 스님들은 옷깃을 여미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참나를 찾아가는 저마다의 화두를 들고 침묵한다.
선방의 스님이 아니더라도 이 계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어쭙잖은 수행자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만추의 계절이다.
여행자는 마음을 차분하고 평안하게 하고 전나무 우거진 숲길을 걷는다.
선홍빛 노랑 단풍이 뚝뚝 떨어져 흐르는 계곡을 건널 때에도 깊은 사색과 명상의 세계로 자신을 인도하며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름답다.
떠나온 길의 종착역에 닿아서야 또 다른 도시의 풍경 속에 편입되어 이곳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난다.
잠들어 있는 미인처럼 단아한 모습의 죽도가 눈 안으로 걸어오는 착시를 일으키며 다리를 건넌다
바다는 고요하고 부표처럼 떠 있는 죽도는 햇살이 풀어지는 심장부에 숲을 품고 고요와 정적이 바다에 풀어지면 노인과 바다를 연상하머 쪽배들의 물질이 한창이다.
무인도는 사람의 발길과 우산이공(우산이공)의 공력으로 아름다운 천상의 화원이 되고 조각 공원이 되었으며 전통가옥을 재현한 멋스러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행자의 본분은 길 위의 길을 걷는다.
바다와 섬의 경계는 잔도를 중심으로 길가 밖과 안으로 구획되어 있어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열차처럼 해안 단애를 따라 물길 따라 직진이다.
멋스럽게 이어진 잔도 길에서 뭍과 바다를 바라보는 시야는 몸 둘 바를 몰라 두근거리게 한다.
원양의 소식을 전하는 파도의 속살을 헤집어 감동하고 뭍의 이야기에 바쁜 늙은 소나무 그늘아래 우리들의 사연과 웃음이 나뭇가지에 걸린다.
탐방객을 위한 쌉쌀한 커피 한 잔, 구수한 둥굴레차의 향기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 풀어 흩어지며 모락모락 김을 피워낸다.
먼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멈추어버린 시간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무념무상 멍때리는 여유와 명상의 시간을 바다에 풀어 놓는다.
이 땅에 멋스럽게 지어진 고택들을 푸른 잔디에 모셔놓아 정스러운 한옥의 정취 또한 죽도를 찾는 여행객들의 시선 끝에 걸리는 백미이기도 하다.
사각의 앵글에 바다를 가두고 숲을 가두어 사람의 표정을 덧칠해 완성한 풍경을 빛바랜 앨범에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찰칵찰칵 그들의 풍경이 아름답다.
저물어가는 노을 뒤에서 까무룩 하게 물들어 가는 풍경을 품어 죽도를 등에 지고 길을 나선 여행자는 하루의 이정표를 찍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물빛 하늘에 부표 없이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허공에 길게 가을을 그리며 서풍에 실려 날아가고 여행자는 오늘도 이름 없는 길 위에서 새로운 풍경을 꿈꾸며 하루를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