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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Dec 28. 2023

고통을 행운으로 바꾸는 일

(부제; 고통을 행운으로 바꾸고 싶거든 거침없이 나아가라)

  

  고통을 행운으로 바꾸고 싶거든 거침없이 나아가라!     


  인간은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 한평생을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좋은 집, 더 좋은 자동차,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큰 자랑거리 등을 위해 평생을 내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히 생각해 보아야 할 포인트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과연 무엇을 위해 달리느냐는 것이다.

  달린다는 것은 그 무엇을 얻기 위해, 거기에 걸맞은 어떤 크고 작은 도전을 행한다는 의미인데,  “그 도전이 과연 자기 개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느냐?”라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관점이 흔들리게 되면, 나중에 설령 많은 것을 성취하였어도, 자칫 어느 날 갑자기, 심한 회의감이나 이유 모를 우울, 불안 등이 몰려올 수 있다.     


  둘째는, “그렇게 열심히 내달림으로써 당신이 어떤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그러한 길이 과연 당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길인가?”라는 점이다.     

  크건 작건 간에 그러한 도전을 통해 기쁨이나 행복을 제대로 향유하려면,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남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쾌히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행해져야 하겠다.  

   

  만약, 당신의 삶이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조건에 부합되지 못한다면, 당신은 매우 애석하게도, 엉뚱한 방향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나중에 그 결과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버릴 수도 있다.  


고통을 행운으로 승화시켜라(그림; tinybuddha.com/blog)


                 

  그럼, 이러한 두 기본 조건을 잘 충족해 나가면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불행이나 고통을 행운으로, 그 행운을 다시 행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누구에게나 다 잘 통하는 만병통치약은 있기 어렵겠으나, 그래도 최선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 고통의 덫과 친해지라.    

 

  우리가 살아가며, 간혹 어떠한 덫에 걸려들어 허우적대기도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불행히도 그러한 고통의 덫에 걸려들었을 경우라면,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은 겁에 질리게 되어, 그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 지나치게 허우적대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또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물론 똑같이 겁에 질렸더라도, 이내 비교적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덫의 구조를 잘 확인한 후, 여러 탈출 가능한 방도를 마련하려 애쓸 것이다.          


  위에서, 당신은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당연히 후자가 좋을 것이다.

  이 경우, 후자처럼 비교적 차분히 탈출 방법을 잘 모색하려는 태도에 더하여, 주변의 가용한 지형지물 혹은 인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도를 잘 생각해 내거나 그밖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여러 환경조건을 두루 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후자처럼 행할 수 있으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 마음먹기’를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기 마음먹기’의 방법으로서 가장 현명한 것은, 아마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의 덫과 일단은 친해지는 방법이다.

  즉, 그러한 덫은 보통,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욱 조여오기만 할 것이니, 일단은 무리한 일체의 행동을 중지하고, 그 덫에 걸린 채로 지내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 덫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그 덫의 특성과 특징을 알 수 있게 되고, 어느덧 해결의 실마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당신이 적극적인 탈출을 시도할 때인 것이다.     


  우리가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렸을 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 불치병에 대항해 마구 몸부림치고, 안간힘을 쓰고, 슬퍼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병은 당신을 괴롭히려 할 것이니, 차라리 그 병과 같이 잘 지내면서, 그 병의 특성을 공부하고, 여러 관련 지식을 이해하다 보면, 그래도 해결책에 가장 가까운 방안을 도출해 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을 살아가며, 어떠한 극심의 고통을 만나더라도, 그렇게 그냥 죽으라는 법은 결코 없을 것이니, 절대 당황하지 말 것이며, 몸부림을 치거나 안감힘을 쓰지도 말 것이며, 일단 그 고통 자체와 친해지고 익숙해진 후, 그 고통의 속성을 잘 이해하여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차츰 마련하고, 드디어 당신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를 기다려, 단번에 돌파를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항상 거침없이 나아가라. 머물면 나락이다.     

 

  여기서, 거침없이 나아가라는 말이 결코 무리하거나, 스스로의 발걸음을 매우 재촉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세상에 문명도, 기술도, 역사도 그 모든 것이 다 전진하고 있으며,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당신 혼자 침체하여 방구석에 머물러 있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아라.

  이는 결코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마침 그러한 전진의 길을 개척할 자신이 없는 시기를 걷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어려운 시기에는 당신이 벤치마킹하고픈 사람들의 길을 잘 따라서 행해 보기라도 하여라.

  그런 자신마저 없다면, 그냥 ‘단순 모방’이라도 잘 행해 보아라. 제발 고귀한 당신의 심신을 계속 움츠리고 있게 하지는 말아라.    

  

  살다 보면, 때로는 크게 좌절하여 잠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시기도 있을 수 있겠는데,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을 잠시 추스른 후에는, 바로 다시 일어서려 온 힘을 발휘해 보는 것이 좋다.

  누구든 머물면 침체가 찾아오고, 온갖 근심이 몰려올 것이고, 그 침체는 결국 고통의 그림자를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우리 생활상의 비근한 예를 한번 들어보면, 현대인들의 시력(視力)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나빠지는 이유도, 역설적으로 우리가 너무 안경을 애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성장기 이후에는 시력이 대체적으로 점점 나빠져갈 수밖에 없는데, 안경(근시, 원시, 다초점 안경 등)을 애써 착용함으로써 억지로 더 잘 보이게 하여 눈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감당하게 독촉을 하고 있고, 또 마구 혹사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렇게 근시안경, 원시안경, 다초점 안경 등을 너무 쉽게 착용한다는 것은 결국 눈이 나빠지는 현상에 너무나도 순순히 굴복해 주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의 안근육은 굳이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지고, 스스로 운동할 기회는 더더욱 없어지게 되며, 따라서 안근육은 빠르게 퇴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겠다.   

  

  결국, 안경이라는 도구는 우리로 하여금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는 목적에는 부합된다고 하겠지만, 약시라든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기 눈의 건강, 특히 안근육을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보면 된다.

  사회적으로 상술에 떠밀려, 이런저런 안경을, 마치 보는 문제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인 양, 마구 권장하는 세태도 참으로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문명의 이기가,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의 눈을 더욱 약하게 만드는, 그것도 아주 빠르게 약화시키는 큰 단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안경의 사례에서도 보았듯, 안근육도, 물론 다른 신체 근육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전혀 운동이 되지 않아 결국은 약해지고 침체되듯이, 우리의 삶도 결국 거침없이 나아가고 활발히 움직여 나가야만, 그 기세가 계속 유지되고, 더욱 업글(upgrade)되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이렇게 거침없이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기와 자신감이 매우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자신감, 거침없이 나아가는 도전 등이 잘 어우러져야만, 당신의 큰 성취를 위한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질 수 있겠다.     


  세 번째, 이루고픈 일에 진정으로 심취하여라.   

  

  우리는 생을 살아가며, “자기가 이루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업(業)으로 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는 말을 많이들 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삶이 결코 만만하지만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투잡을 해서라도, 당신이 이루고 싶은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업(業)이 돈을 벌기 위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면,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은 거의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쳐서는 안 되겠다.     


  즉, 평생을 두고 생장시키고, 업글해 나가야 할 자신의 소중한 일을, 어디 삶에 여유가 없거나, 빈궁하다는 이유 등으로, 잠시라도 멈추어서는 아주 곤란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고픈 일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할 필요도 없고, 한 가지일 필요도 없고, 돈을 못 버는 일이라도 상관없다.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거기에 꽂히어, 끝까지 추구하고픈 심정이 발동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큰 즐거움과 보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간혹 삶에 지쳐있을 때에도, 어려움에 처한 때에도 무한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 것인가?      


  또한, 이렇게 자기가 매우 원하고, 그래서 이루고픈 일을 자기 ‘사명(미션)’과 한번 연계를 시켜보는 것도 매우 훌륭하다고 하겠다.

  사명은 당신이 이 땅에 와서 기꺼이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당신이 이루고픈 일과도 그렇게 많은 괴리는 없을 것이니, 잘 조화를 한번 시켜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당신이 이루고픈 일과 당신의 사명을 잘 연계시켜 나간다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 일들의 개별적 추구 목표과 전략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생의 목표와 전략을 잘 갖추고서, 평생 자기가 이루고픈 일과 자기 사명을 함께 잘 어우러질 수 있게 해 나간다면, 당신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이 자체만으로도 과연 얼마나 값지고 보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삶의 방식은 혹여 네게 잠시 찾아올 수 있는 삶의 고통도 그만큼 덜어주고, 잊게도 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네 번째, 필요한 자원을 제대로 마련하여라.  

   

  예전에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본명; 주원장)는 자기 사부에게 “고축장 광적량 완칭왕(高筑墙 广积粮 缓称王”이라는 가르침을 받아 이를 평생 실천하려 애쓴 인물이다.     


  즉, 홍무제는‘고축장’의 기치로 성을 높이 쌓아 적군의 침입을 막아내고, 백성을 보호하며, ‘광적량’의 기치로 식량을 최대한 많이 끌어 모으고 저장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게 해 주고, 나중에 천하통일에 사용할 군량미도 충분히 마련하였다.

  또한, ‘완칭왕’의 기치로 싸움에 크게 이겨 천하를 얻었음에도, 결코 왕 혹은 황제의 칭호를 겸양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적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조심하였고, 결국 덕을 많이 갖춘 황제로 스스로 추대되기를 그토록 원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한 계획을 차곡차곡 달성해 나갔던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홍무제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다면, 이를 위해 필요한 제반 자원들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준비를 잘해야 한다.

  이러한 자원을 개인적인 측면으로 보면, 지식과 지혜, 능력, 추진력, 인맥, 인간성 등 대부분의 자기 총체적 내공이 모두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자원 없이 무엇을 어떻게 제대로 도모할 수 있겠는가?

  문득 찾아올 수 있는 고난의 시기를 어떻게 잘 뚫어낼 수 있겠는가?     


  모쪼록 자신이 원하는 바, 목표를 위해서는 너무 성급히 움직여 나아가려 하지 말고, 차분히 자기 필요 자원부터 차곡차곡 준비해 나가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고, 공짜 또한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니 말이다.    

    

  다섯 번째, 당신의 부단한 추구는 당신 욕심의 채움이 아닌 가치의 추구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이미 족함을 잘 알아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랍거나, 아주 대단하거나, 기가 막히게 좋은 기회가 찾아올지라도, 결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자기 마음의 일탈을 제대로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높은 곳을 향한 당신의 부단한 추구는 절대 자기 욕심의 채움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스스로 설정한 생(生)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항상 자기 욕심을 경계하고, 스스로 족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관련된 사례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지만, 소설 ‘천망’의 줄거리를 간단히 한번 소개해 보자. 

     

  ‘천망’은 이병주의 단편소설로서, 일제 강점기 당시, 한 시골에 큰 거부, 성참봉이 살았는데, 이웃의 가난한 농부가 자기에게서 빌려간 돈을 못 갚자, 담보로 책정해 둔 토지(논 문서)를 단번에 빼앗았다.

  이후, 농부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계셨으니, 그 논 문서를 꼭 돌려달라고 지극히 애원을 해오자, 복리로 이자 계산을 하여 갚아야 할 돈을 전부 가지고 오면, 그 논문서를 돌려주겠다고 약조를 하게 된다.     


  이윽고, 그 농부의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를 악물고 일을 하여 큰돈을 벌었고, 부친의 유지가 담긴 논 문서를 되찾기 위해 몇 년 후 다시 귀국하여 성참봉 앞에 나타나, 이제 약속한 대로 돈을 가져왔으니, 논 문서를 돌려달라고 하였는데, 이때 성참봉은 그 큰돈에 순간 눈이 뒤집히어, 논 문서를 돌려주는 척하면서, 장롱 속에 있던 망치를 몰래 꺼내어 농부의 아들을 내리쳐 죽여 버리고, 그 시체를 마당 구석에 묻고서, 그 위에 매화나무를 심어서, 모든 흔적을 감추어 버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러한 장면을 머슴에게 들키게 되고, 그에게 평생 책잡히게 된다.

  그래서 머슴이 해달라는 대로, 더 이상 머슴일도 안 하게 해 주고, 양복을 입을 수 있게도 해주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게도 해주는 등, 머슴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게 된다.

  급기야는, 자기 재산에 탐을 내고 있던 머슴의 농락에 의해 점차 두 아들, 딸, 며느리, 부인까지 모두 죽거나 미치게 만들었고, 자신도 폐인이 되어 죽어갔으며, 가문은 점차 폐가의 길로 접어든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성참봉이 한순간, 논 문서와 큰돈을 모두 가지고 싶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엄청난 사고를 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도 모두 한 순간 욕심에 눈이 뒤집혀, 정상적인 ‘인간의 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의 참혹한 실패(그림; m.blog.naver.com)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자기 욕심 혹은 개인적인 울분 등으로 한순간 정상적인 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그것이 자기 몰락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다른 예로,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은 욕심과 야욕으로 가득 차, 러시아 원정에 무리하게 뛰어들었다가, 병사들의 기아와 전염병, 추위, 탈영 등 속수무책의 난관에 부딪혀, 결국 큰 패전을 겪고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나폴레옹을 두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아래와 같은 그 유명한 문장을 남긴다.  

   

       “신은 파멸하려는 자에게서 먼저 이성을 빼앗는다!”   

  

  또, 그 옛날 촉한의 ‘유비’는 의형제, 관우의 죽음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나라와 무리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전쟁 준비과정에서, 막내 의형제인 장비도 잃게 되고, 끝내 패전 후, 큰 병을 얻어,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유비의 행동은 개인적 울분 혹은 욕심으로 인해, 꿈꾸던 삼국 통일의 과업이 아주 요원해졌을 뿐만 아니라, 병사와 백성을 포함한 나라 전체를 망쳐먹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당신의 부단한 추구는 당신의 사심 없는 가치의 추구이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나, 자기 울분을 해결하기 위함이어서는 아주 곤란하다고 하겠다.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울분을 토하는 유비(그림;.zhihu.com/question)


  

  여섯 번째, ‘고통의 승화’이다.     


  아마 고통 없는 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살아가며 반드시 여러 차례의 고통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렇게 삶의 여러 길목에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과연 어떤 이름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바로 ‘고통의 승화’이다.

  남들이 아무리 고통이라고 부르는 사건도, 당신 스스로가 고통이라고 부르지 않고 담담하게 대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말 그대로의 지옥은 결코 없으므로, 우리가 못 이겨낼 고통은 없다고 보면 된다.

  단지, 그 고통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아주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너무 예민해지지 말고, 차라리 자기 내면의 힘을 차곡차곡 키워놓게 되면, 언젠가는 시간이 약이 되고,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게 되며, 언젠가는 점차 회복기를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신이 매우 현명한 자라면, 이 회복기를 많이 앞당길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그 고통의 시기를 ‘자기 재생의 시기’로 삼아서, 스스로의 내면을 다시금 잘 들여다보아서 제대로 손질하고, 자기 총체적 내공의 힘도 크게 키워놓게 된다면,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즉, 큰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둘 잘 진행하다 보면, 그 내공이 복리 이자처럼 불어나고, 그만큼 고통이 승화되어 새로운 희망의 싹이 보일 수 있고, 회복기도 빠르게 앞당길 수 있는 것이겠다.     


  다시 말해, 고통을 말 그대로의 고통의 이름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어차피 누구라도, 어쩌다 보면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운이 나쁘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도 말 것이며, 오히려 기꺼이 감수하고서, 그 해결을 위한 방책 마련과, 총체적 내공 쌓기, 미래에 펼쳐질 또 다른 소중한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 등에 집중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럼, 여기서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일화를 잠깐 한번 보자.

  그는 젊어서 세일즈맨 시절에 어느 노인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거실 벽에 걸린 매우 인상 깊은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이때, 그 그림의 아랫단에 써진 아래와 같은 글귀가 더욱 카네기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The high tide will come. On that day, I will go out to the sea."    

 

  당시의 그림(아래 그림 참조)을 참조하여 이 글귀를 의역해 보자면, 이렇다.     


       “썰물 때, 아무리 나룻배가 백사장에 나뒹굴고 버려져 있는 듯해도, 나중에 좋은 시절(밀물)을 만나면, 다시 힘차게 물 위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니, 그때는 내가 아주 힘차게 바다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한편, 카네기는 그 노인에게 부탁하여 이 액자를 양보받아 자기 집무실 벽에 평생 걸어두고, 사업이 매우 어렵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할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며 자기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시금 다져 나갔던 것이다.    


“The high tide will come!”(그림;.arthaus.co.kr/m)


         

  결론적으로,

  우리는 늘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며 따라가고, 남들이 모두 하는 것을 나만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불안해지기도 하고, 어떤 작은 일 하나에도 혹시 더 좋은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봐서 도무지 아무 결정도 못하고 있는 등, 이렇게 아무 생각이나 판단도 없는 사람처럼 혹은 자그마한 좁쌀같이 아주 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서는 곤란하겠다.    

 

  오로지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가되, 무엇이든 항상 거침없이 도전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하여, “거침없음”이라는 말이 결코 거칠게 도전하라거나, 무리하여 도전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오직 자연스러우면서도 느긋하게, 그러나 지속적이고 기개 있게 추구하라는 말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설령, 중간에 어떠한 힘든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너무 위축되지 말고, 앤드루 카네기처럼, 앞으로 분명히 더 좋은 일이 몰려올 것이라는 분명한 혜안과 매사 회복(resilience)의 당연함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려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어쩌다 마주치게 될 행운이나 좋은 찬스도 이렇게 적극적인 마음에서만이 제대로 얻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매사 소극적이고 움츠려진 자세에서는 결코 좋은 운이 따라붙기 어렵게 되어있다.

  아니, 이런 적극적이지 못한 마음 상태에서는 우연히 그러한 행운이나 찬스가 찾아왔더라도, 그 정상적인 유지가 매우 어려워져서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다.       


  이렇듯, 고통의 제대로 된 승화를 위해서는, “언젠가는 분명히 나의 때가 온다!”는 강한 믿음과 미래를 지혜롭게 두루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을 잘 챙겨 가지고서, 이성적 힘에 의한 강한 자신감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거침없이 도전하려는 기개 등의 삼박자를 동시에 챙겨 가질 수 있음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결국,     


  “당신이 어떠한 날 선 고통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면, 마치 언젠가는 카네기의 마음속에서 썰물이 밀물로 바뀌듯, 그 고통이 스스로 굴복하여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것이고, 분명히 당신의 때가 도래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드디어 저절로 승화되어, 한 차원 더 높은 새로운 ‘당신의 세상’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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