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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Dec 12. 2023

양 끝단을 거머쥐어라

(부제 : 강한 선(善)만이 살아남는다)

 

양 끝단을 거머쥐어라!    

 

너무 착(善)하고 부드러워도 탈이다.

너무 강(強)하기만 하여도 탈이다.

너무 착하고 부드러우면 남들이 무시하고,

너무 강하면 남들의 견제를 이겨내기 힘든다!    

 

너무 조심스러워도 탈이다.

너무 덤벼도 탈이다.

너무 조심조심 행동하면 기회를 놓치고,

너무 덤비면 쉬이 깨지고 다친다!   

  

너무 감성적이어도 탈이다.

너무 이성적이어도 탈이다.

너무 감성이 풍부하면 표현에 지나침이 생기고,

너무 이성에만 치우치면 소통이 안 된다!

     

너무 인자해도 탈이다.

너무 무덤덤해도 탈이다.

너무 인자하면 상대방이 버릇없이 굴고,

너무 무덤덤하면 친구가 떠나간다!   

  

너무 섬세해도 탈이다.

너무 터프하기만 하여도 탈이다.

너무 섬세하면 네 안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고,

너무 터프하면 타인에 상처를 주기 쉽다!  

   

너무 배려가 커도 탈이다.

너무 배려가 적어도 탈이다.

너무 배려가 크면 상대가 오판하게 되고,

너무 배려가 적으면 상대가 원망한다!   

  

너무 용기나 기개를 내세워도 탈이다.

너무 용기나 기개가 부족하여도 탈이다.

너무 용기나 기개를 내세우면 돈키호테가 되기 쉬우며,

너무 그것이 부족하여도 삶의 의미를 잃기 쉽다!   

  

너무 의도적이고 치밀해도 탈이다.

너무 운세나 우연에 맡겨도 탈이다.

너무 의도적이고 치밀하다면 자기 생에 숨이 막혀 올 것이며,

너무 운세나 우연에 의지하면 대충대충 살게 된다!    


      

  우리에게 제법 많이 알려진 고사이기는 하지만,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스승님,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 곧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하는 제자들의 동일한 질문에, 성미가 급한 ‘자로’에게는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다.     


       “아버지도 계시고 형님도 계신데, 어찌 들었다고 그것을 곧바로 실천해야 하겠느냐? 반드시 그분들께 여쭈어보고 행동해야지!"   

  

  그런데, 잠시 후 성격이 매우 소극적인 ‘염구’(혹은 염유)가 똑같이 물어오자, 이제는, 아래와 같이 대답해 주었다.

     

       “물론이지.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 곧바로 실천해야지!”  

   

  이를 옆에서 목격한 다른 제사(공서화)가 당혹감을 느끼며, 따져 묻자, 공자는 자로와 염구의 성격적인 차이(다소 극단적인 양 끝단의 성향을 가짐)에 따라 서로 다르게 처방(대답)을 해주었음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공자는 아마 이렇게 다소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제자들의 성향을 치유하고픈 마음에서, 양 끝단을 모두 두루 헤아려, 교육 방법적인 측면에서 두 제자에게 각기 가르침을 달리, 그것도 상반되게 했으리라!     


  또한 만약, 공서화가 이러한 모순된 두 대답의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스승께 매우 송구하여, 질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었더라면, 속으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거나, 혹여 큰 오해가 생겨나고 주변으로 확대 및 재생산되어 나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아찔한 상황이었을 수 있겠다!      


  이 사례는, 이른바 공자가 그토록 설파하고, 몸소 실천도 해 보여주었던 “시중(時中; 시간과 장소에 맞게 중용을 다르게 적용함)”과도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공자의 가장 대표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용’의 길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시중’에 맞게, 그 처한 시간과 장소에 맞는 자기중심을 동시에 잘 잡아나가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중용은, 절대적인 개념에 고립되어 있어서는 안 되며, 시중이라는 개념을 적절히 도입하여, 때에 따라 다소 왼쪽으로 더 나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도 더 나갈 수도 있는 것이겠다.     


  단,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처세가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특정의 개인의도와는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시중’이란‘타협’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일 것이며, 이른바, 모든 처세를 자기 위주가 아닌, 철저한 도(道; 세상의 마땅한 도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와 제자들(그림; kknews.cc/culture)



  우리는 인간인 이상, 누구라도 팍팍한 현실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쳐 살아기가 매우 쉽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살다가, 결국 무슨 탈이라도 크게 나게 되면, 그때서야 문제점을 깨닫고서, 이번에는 또, 개념 없이 그 반대 방향으로만 와락 내달리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또 그 반대적 성향으로 너무 함몰되어, 원래의 고유한 자기 성향과 너무 멀어져서, 이 또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러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치우침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첫째, 양 끝단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국임을 이해하자.     


  양 끝단이라는 것이 반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서로 등을 맞대어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즉, 한쪽이 쓰러지게 되면 다른 한쪽도 더 이상 지탱해 내기 어려워져서, 결국은 둘 다 몰락해 가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 쪽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하고, 한쪽이 너무 풍부해지게 되면 다른 쪽으로 그 위세를 좀 넘겨줄 수 있는 협조 시스템을 만들어 주어야 하겠다.

  즉, 둘 간에 서로 조화 혹은 상생이 중요할 텐데, 만약 한쪽으로만 너무 치우치게 되면, 다른 쪽이 사라져 버리게 되어, 둘 다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즉, 가까이 있는 어느 하나가 없어지거나 불행하게 되면 다른 한쪽도 그렇게 된다)의 이치와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우리 국민은 대체로 매우 감성적이라고 평을 많이 듣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소 지나치게 감성적인 부분이 문화, 예술, 스포츠, 위기 극복 능력 등에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사회적 소통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흐르는 경향이 많아서, 무슨 큰 사고가 나더라도 그때만 큰 감흥과 협조를 잘 보이게 되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그런 간절한 마음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문제를 끝까지 추적하여 제대로 해결해 내려는 의지는 약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이러한 성향은 사회적 위기 극복이나 단기적 성과 도출에는 유리하지만, 계획에 의한 장기적 성과 도출에는 다소 불리한 편일 수 있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다소 부족한 이성적인 부분을 법, 제도, 각종 단체의 역할, 기타 사회적 시스템이나 캠페인 등 여러 방법으로 꼭 보강을 잘해주어야 하는 것이겠다.                    

 

이성과 감성의 균형(그림;.sohu.com/a)33


   

  둘째, 양 끝단 간 조화의 정도는 상황에 따라 모두 다름을 이해하자.  


  우리가 일상에서 아침에 세면을 할 때, 수전(수도꼭지) 손잡이를 좌우로 적절히 돌려, 찬물과 더운물을 적절히 혼합하여, 자신의 세면에 적절한 온도로 맞추게 되고, 목욕을 할 때에도 수전 손잡이를 그 해당 온도에 맞게 적절히 돌려 맞추어야 하고, 또 샤워를 할 때 역시 그 사워 하기에 적합한 온도로 맞추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각 경우의 적합한 온도는 사람의 나이나 성향, 체질, 시간, 장소, 습관, 주변 여건 등에 따라서도 많이 다르다.  

   

  아마, 일상의 아침을 잘 관찰해 보면, 세면 시에 아빠, 엄마, 자녀들의 수전을 돌려 맞추는 위치가 제각각일 것이다. 누구는 90도, 누구는 60도, 또 누구는 45도 등 모두들 자기가 맞추고 싶은 온도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수전 한 가지를 가지고도, 그 혼합의 정도가 모두 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조화인데, 어디 절대적인 주장을 고집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이겠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며 어떠한 일이나 상황을 대함에 있어서도, 자기 경험이나, 지식, 지혜, 내공 등을 총동원하여 항상 해당 상황에 최적화된 상태로, 이른바 황금 혼합 비율로, 원하는 자기 위치를 잘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단, 만약 당신의 욕심이나 어떤 집착이 앞서게 되면 이러한 황금 비율을 절대 찾아내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한 욕심이나 집착이 지혜의 눈을 완전히 가려버리게 될 것이니 말이다.     


  셋째, 양 끝단의 이니시어티브를 잡아라.    

 

  이 말은, 바람직하게는 매사 양 끝단을 모두 정복하여, 결국 이니시어티브(지배력 혹은 주도권)를 거머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진 삶은 편협된 삶 혹은 매우 부족한 삶이 될 것이며, 이렇게 한쪽만을 가지고서, 이 어려운 세상을 잘 헤쳐 나가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가령, 지나치게 의도되고 계획된 삶만으로 자기 인생을 치밀하게 살아 나가고자 한다며, 자기 삶에 너무 숨이 막혀올 것이며, 그래서 언젠가는 탈진 상태로 접어들기 쉬울 것이고, 그렇다고 하여, 지나치게 운세에 맡기는 삶에 의지하여도, 인생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쉽게 풀려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둘 다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여서, 둘의 장점을 모두 잘 취하고, 점차 융합을 잘해 나간다면, 아주 새로운 시너지가 생겨나게 되어, 자기 삶을 보다 더 충실하게 살찌울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 융합의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일 혹은 해프닝에 가까운 일마저도 흔쾌히,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여, 오히려 자기편으로 승화시켜 나가려는 자세가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매사 일의 양 끝단을 두루 살피고, 또 자기 주변에 발생한 여러 사건이나, 심지어 해프닝마저도 일단은 잘 수용해 나가고, 필요시 그것들을 두루 잘 보듬고, 필요시 고쳐 활용하겠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예를 하나 도입해 보자.

  요즘 우리나라에서 거의 가장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어느 한 후보 선수가, 주전 선수의 입원으로 인하여, 우연히 출전을 하였는데, 그것도 자신의 고유한 포지션이 아닌 엉뚱한 포지션을 부여받았다고 한다면,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대개의 경우, 그 자리가 자기 고유의 포지션이 아닌 만큼, 거기에 적응을 제대로 하려 하지 않거나, 어느 정도 불만을 품게 되어, 여러 핑계를 대면서, 대충대충 경기를 이어 나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얻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고, 항상 배고픈 후보 선수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상실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기 본래의 포지션과 현재 부여받은 포지션이라는 다소 극단적일 수 있는 두 포지션을 두루 섭렵하여, 그 기술의 차이를 조화시키고, 잘 극복해 나간다면, 상황은 충분히 역전될 수 있다.    

 

  즉, 그동안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었지만, 잘 모르고 지냈던 훌륭한 잠재 능력을 찾을 수 있게 되는 행운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이를 융합시켜 시너지만 잘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나중에는 마치 양 끝단의 지휘자가 된 것처럼, 웬만한 포지션에서도, 웬만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미션의 소화가 가능한 아주 다재다능한 선수가 될 수 있고, 드디어 주전 선수로 발탁되는 큰 영광을 누리는 사례도 우리는 주변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제법 많이 목격해 오고 있지 않은가?   

  

  넷째, ‘상승적 중도’가 중요하다.     


  양 끝단이 모두 중요하다면, 과연 우리의 중심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아마,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관련된 여러 용어가 많기는 하지만 우리 전통적인 용어에서 찾는다면, 가히 ‘중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중도라는 것은 어정쩡하거나 우유부단하게 중간쯤에 서라는 것이 아니고, 양 끝단을 아울러 헤아리고, 적절히 조화 혹은 융합을 만들어 내어 시너지를 창출하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하겠다.     


  즉, 양 끝단을 모두 충분히 이해하고, 모두에 정통하여, 두루 조절할 수가 있어서, 그 둘의 화학적 결합을 통한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이나 해프닝마저도 같이 녹여내어, 이른바 ‘1 + 1’이 3 이상이 될 수 있는 ‘상승적 중도’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 이러한 ‘중도’의 개념을 타인에게 굳이 쉽게 노출할 필요는 없다. 왜냐?

  만약 ‘중도’가 완전히 성숙되고 완성되기 이전에, 쉬이 이를 노출하게 되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기가 쉽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보기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당신의 성향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란 말인가?”   

                

강한 선(善)만이 살아남는다(그림; gowell-asia.com)



  결론적으로 볼 때,

  “양 끝단을 거머쥐어라!”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그저 단순히 양 끝단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양쪽의 이익을 모두 취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고, 양 끝단의 특성을 모두 휘어잡아 그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또 서로 간 컨트롤마저도 자유자재로 가능해진 상태 혹은 그 양 끝단을 견고히 장악하고서 원하는 대로 흔들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양 끝단의 이점과 폐해를 모두 정복한 승장의 입장에서, 양 끝의 두 극단을 잘 조절하여 새로운 융합의 힘을 만들어내고, 둘 모두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과연, 이 정도가 되어야 그 양 끝단의 특성들을 화학적으로 융합시켜 더 높은 단계의 시너지를 추가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다소 대조적인 두 개념을 한번 비교해 보자.

  선(善)의 세계에만 푹 빠져 있는 사람은 온전하지 않을 수 있다.

  힘을 위주로 하는 강(強)의 세계에만 빠져 있는 사람도 장차 온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이 진정 세상에 뜻이 있다면,

  선(善)의 세계도 몸소 실천으로 제대로 파악하고, 강(強)의 세계도 직접 경험과 이해를 통하여 제대로 파악하여, 선과 강이라는 다소 상대적인 두 개념을 두루 잘 융합할 수 있어야, 한 차원 더 높은 의미를 가지는 “강한 선(善)”이라고 하는 확장된 개념 혹은 강화된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 또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가치를 강한 힘을 바탕으로 실천적으로 완성해 낼 수 있어야만, 자기 생에서 궁극적인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강한 선(善)만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만약 힘이 약한 선이라면, 아무리 당신의 좋은 뜻으로도, 아무리 고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도, 그 실천력이나 파급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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