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슬픈 이유
군 생활을 하면서 힘든 점을 꼽으라면, 단연 로테이션이다. 군대에서는 짧게는 2년, 길어야 5년에 한 번씩 다른 커맨드로 이동한다. 운 좋게 같은 지역 내에서 옮기는 경우도 있지만, 미대륙을 가로지르거나 일본·괌·이탈리아·스페인 등 세계 곳곳의 커맨드로 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건 곧 완전히 새로운 곳에 다시 정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를 **PCS(Permanent Change of Station)**라 부른다.
나름 긴 세월 군에 몸담으며 샌디에이고, 쿠웨이트, 일본 아츠기, 버지니아, 그리고 하와이를 거쳤다. 제법 많은 PCS를 겪었지만, 이건 아무리 반복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으면 내게 첫 PCS의 경험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1년 11월,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겪은 ‘이민’이었다.
나는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대학 입시 전쟁에 뛰어들어 바쁜 일정과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서둘러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간다.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하면 바로 정문을 향해 달린다. 간신히 지각을 면하고 교실에 들어간다. 곧 하루의 학교 일정이 시작된다. 졸음과 싸우느라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바로 학원으로 걸어간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 도착하면 곧장 숙제와 공부를 한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문득 시계를 보면 자정이 넘은 시간. 분명 5분만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자는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날 아침. 다시 일상을 반복하러 집을 나선다.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살면서 생각하는 미래는 오직 수능뿐. 그 뒤는 엄두도 못 낸다.
한 번은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학교도 학원도 일찍 끝나서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마침 온 가족이 재미있게 TV를 보고 있어서 나도 소파에 앉았다.
“공부는 다 했어?”
아버지는 살짝 머금고 계시던 웃는 얼굴 그대로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 채 물으셨다.
“네.”
아버지는 드시던 과일을 내려놓고 내게 시선을 옮기며 말씀하셨다.
“후우... 공부에 끝이 어디 있니…?”
나는 말없이 다시 방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그렇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 수능을 보고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지긋지긋한 쳇바퀴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길게 느껴졌던 고등학교 1년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2학기 말 어느 날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서 거실에 앉아 계신 부모님께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여는데,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
“진규야, 잠깐 이리 와서 앉아봐라.”
거실로 나오자, 아까는 무심코 지나쳤던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머니를 보자 심각한 표정이셨다.
“야, 너 혹시 미국 가서 공부할래? 둘째 고모가 한국에 와 계시잖아. 고모 미국 갈 때 너도 같이 가서 고등학교랑 대학교 마치고 올래? 작은아버지도 이번에 고모 계시는 보스턴으로 이사 가니까, 작은아버지랑 살면서 유학생활 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해?”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네 성적에 내가 봤을 때 잘해봐야 인서울(in-Seoul)이 목표야. 냉정히 생각해 보자고. 네가 각성을 하고 공부를 바짝 한다고 한들 솔직히 SKY 갈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너 청년 실업률이 몇 퍼센트인 줄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에 SKY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 서울에 있는 대학 나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게 아니잖아. 그럴 바에야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게 어때? 막말로 미국에서 지방대학교를 마치고 와도 기본적으로 영어는 될 거고… 훨씬 경쟁력이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무언가 말씀을 하려다 말고는 나를 바라보셨다. 짧은 순간이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아버지는 빈 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소주병을 집어 들고 두 손으로 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우리도 너를 타지에 보낼 생각 하면 마음이 안 좋지. 그런데 내가 네 입장이라면 이게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어때?”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소주병을 들고 있던 손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버스정류장에서 장난치던 친구들, 학교 수업시간 내 자리에서 보는 교실 풍경, 학원 창문 너머로 보이던 석양이 한 장면씩 스쳤다.
“…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그 순간은 이후 수없이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돌아가도, 그리고 누구였어도 대부분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제안은 나를 대입 지옥에서 탈출시켜 줄 비상구였다.
당연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몰랐기에, 의미를 두지 않은 많은 것들이 내겐 이별의 대상이 되었다.
아침에 달려가 버스정류장에 가면 나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버스를 타기엔 너무 늦은 날이면 아무나 4명을 모아 택시를 타던 같은 학교 선배들이 있었고, 쉬는 시간에 말동무가 되어주고 학교가 끝나면 같은 학원으로 향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늘 마지막에 내릴 때 “내일도 힘내라” 한마디를 건네던 학원버스 기사 아저씨,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동네 어른들, 동네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향하는 나를 위해 사비로 모든 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집과 노래방에 데려가 주시고 끝내 눈물까지 보이신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그렇게 16살의 나는 생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