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ode Island (1)

LA 아리랑

by 이진규

어릴 적 내게 미국은 둘째 고모와 막내 고모,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사는 나라였다. 자라면서 그것이 다른 대륙에 있는 머나먼 타국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고, 가끔 고모나 작은아버지가 한국을 방문할 때 선물을 챙겨 오시면 무척 신기했다. 그분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 그리고 TV에서 방영되던 시트콤 LA 아리랑 속 미국은 내 머릿속에 어렴풋한 이미지를 남겼다.


당시 한국은 학교에서 여전히 ‘스포츠컷’이라 불리는 짧은 머리, 체벌과 규율이 일상이던 분위기였는데, 시트콤 속 미국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한국인들이 모여 커뮤니티를 이루고, 또래 친구들끼리 어울려 연애도 하고, 고등학생 아이들이 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은 말 그대로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나름 나의 미국생활을 상상을 하다 보니 열 시간 넘는 비행도 금방이었다. 어느새 우리 가족이 타고 있던 비행기는 JFK 뉴욕 국제공항에 내리고 있었다.


첫인상은 한마디로 ‘낯설음’이었다. 일단 9·11 테러가 일어난 지 두 달 남짓 된 시기라 그런지 공항 분위기는 삼엄했다. 들이마시는 겨울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 사방에서 들리는 말소리는 당연히 대부분 영어였고, 드물게 보이는 한국 사람들조차 옷차림과 말투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더구나 분명 한국에서 이미 폴더폰을 쓰고 집집마다 광케이블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절인데, 미국 사람들은 아직 허리춤에 무전기 같은 큰 전화기를 차고 다녔고, 인터넷은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해야 했다. ‘선진국 미국’이 오히려 시골처럼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일주일 정도 막내 고모 댁이 있는 뉴저지에 머문 뒤, 우리는 둘째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계신 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로 이동했다.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라는 로드아일랜드—내게는 모두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둘째 고모는 반가움에 들떠 우리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여행을 시켜주셨다.


제법 긴장이 풀리자 미국 특유의 여유로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막내고모부께서 차를 흔쾌히 빌려주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고모들 도움 없이도 공원에 가고 아웃렛 쇼핑을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곧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이야, 우리 가족이 이렇게 길게 휴가를 가본 적이 있나? 거의 처음이지?”


“그러게… 우리가 휴가라 해봤자 3~4일 동해 다녀오는 게 다였지.”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부모님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당시 한국은 주 6일 근무제였고 학생들도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가야 했다. 아버지의 휴가는 일 년에 한 번, 길어야 닷새였다.


“확실히 미국 생활이 여유가 좀 있다… 그렇지?”


“그러네…”


“우리 그냥 미국에 눌러앉을까?”


“엥? 갑자기 무슨 말이야? 미국서 뭐 먹고살게? 한국에 집이랑 재규 학교는?”


“그렇지? 그냥 해본 말이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가족과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니!


며칠 뒤, 부모님은 나와 재규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며 말씀하셨다. 가족이 함께 미국에 머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만 한국에 돌아가 직장을 다니며,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가 되기로 하신 것이다. 나와 재규는 뛸 듯이 기뻤다. 내심 가족과 떨어져 지낼 걱정을 했던 나는 꿈을 꾸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의 로드아일랜드 생활이 시작되었다.


돌아보면 왜 부모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원래 계획대로 나만 미국에 두고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내 인생은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고.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