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ode Island (2)

아시아나 마트

by 이진규

“쟤는 누구야? 네 클래스야?”


“누구?”


“저기, 저 중국애.”


“아, 새로 온 애? 응, 내 클래스야.”


“난 중국인들이 싫어.”


“그러게… 중국 음식은 좋은데. 중국 이야기하니까 중국 음식이나 먹고 싶다.”


놀랍게도 선생님들의 대화였다. 체육 시간, 배구 연습이 한창이었고 두 반이 동시에 체육관을 쓰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 자유롭게 농구 같은 게임을 하는 분위기는 미국도 한국과 비슷했다. 아이들이 농구를 하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아 있었고, 원치 않게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체육관은 시끄러웠지만 환풍시설을 타고 목소리가 또렷이 내 귀에 들어왔다.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그때까지 나에게 뉴스나 책에서만 보던, 먼 세상의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 생활 초창기 내가 겪은 경험들은 그 단어를 현실로 끌어왔다.


딱히 사춘기는 없었지만, 한국을 떠나올 때의 나는 이미 자아가 형성되고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길에서 무례한 어른이 반말을 하면 불쾌했지만, 누군가 “학생, 미안한데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하고 정중히 다가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존중을 기대하는 시기였다. 그런 내가 미국에 와서 느낀 ‘인종차별’은 꼭 단순히 누군가의 악의적인 의도로 다른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드는 상황만을 뜻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다름의 벽


먼저 외모에서 오는 ‘다름’이 있었다. 큰 도시나 관광지를 제외하곤 마트나 공공장소에서 시선을 받는 일이 잦았고, 몇몇은 다가와 아시아인은 처음 본다며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생김새뿐 아니라 정서와 기억에서도 나는 달랐다. 가끔 아이들과 대화가 잘 풀리다 어느 순간, 그들이 어릴 적 즐겨 보던 TV쇼나 미식축구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더 이상 끼어들 수 없었다.


언어의 벽


또 하나는 대화였다. 서툰 영어는 나를 ‘특수’한 존재로 만들었다. 물론 나의 의사소통 능력을 배려하려는 선한 의도도 많았다고 본다. 하지만 나에게 말을 할 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느리게, 반복적으로 손 제스처까지 써가며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티를 내기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상대가 못 알아들어서 몇몇 단어를 반복해야 하는 굴욕적인 순간이 계속됐다. 결국 스스로 ‘특수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노골적인 차별


물론 흔히 떠올리는 단순하고 노골적인 인종차별도 있었다. 운전을 막 배우던 시절, 차선 변경 중 실수로 다른 차에 가까이 붙었다가 깜짝 놀라 원래 차선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부딪히지도 않았지만 상대 운전자는 경적을 울리며 내 차를 따라왔다. 갓길을 가리키며 차를 세우라는 손짓.


차에서 내린 백인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외쳤다.


“너, 불법체류자 아니야? 신분증 보여줘 봐.”


내가 어버버 하자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상할 거야? 돈 있어?”


“그런데… 안 부딪혔잖아요.”


어눌하고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지만, 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놀랐잖아. 너 불법체류자지? 몇 살이야? 부모님한테 전화해. 이민단속국에 넘기기 전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면허증을 꺼내 보여야 했고, 아주머니는 욕을 퍼붓고 돌아갔다.


다르고 특수한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바보들이 모여사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한인이 거의 없는 로드아일랜드에서의 미국 생활은 혹독했고 지독히 외로웠다. 그래서 가족은 내게 전부였고, 소중했다.




작은 피난처, 아시아나


이주일에 한 번, 우리 가족은 45분을 달려 ‘아시아나’라는 작은 한인 마트를 찾았다. 그곳은 우리 가족에게 단순히 장을 보는 마트가 아니었다. 다른데서는 구할 수 없는 한국 라면과 과자, 그리고 무엇보다 비디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나에서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담은 VHS 테이프를 빌리거나 살 수 있었다. 겨울연가, 대장금, 올인, 논스톱, 거침없이 하이킥… 우리는 테이프를 손에 쥔 순간부터 소중히 아껴 보았다. 가격은 대여는 3불 구입은 5불! 온가족이 몰입해서 애청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나온 날에는 예외적으로 장을 본지 일주일도 안되어 다시 왕복 90분을 달려가곤 했다.


한 번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대여했는데, 사장님이 잘못 녹화했는지 중간에 ‘그것이 알고 싶다 ‘가 나왔다. 동생은 거의 울다시피 하며 화를 냈지만 결국 우리 가족은 ‘에휴, 이거라도 보자’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마저 시청을 했다. 그런데 왜인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청을 했고 결국 ‘그것이 알고 싶다’도 다음 대여 목록에 넣게 되었다. 만약 이게 사장님의 의도였다면, 그는 천재 마케터다.


돌이켜보면 나의 기억들이 오늘의 미국을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이다. 지금은 꼭 한인마트가 아닌 미국마트에서도 한국 라면이나 과자를 쉽게 구입 할 수 있고,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를 거의 당일 볼 수 있다. 놀랍게도 미국인들이 한국음식과 한국문화를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시절 우리에겐 아시아나에서 빌려온 비디오가, 그리운 한국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