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이 씨 36대 장손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배가 아팠다. 정확히는 가슴과 배 사이, 명치 부근에서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도농동의 우리 집에서 도보로 15분쯤 걸으면, 재구서점이 보이는 큰 길가 건너편에 윤소아과 의원이 있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감기에라도 걸리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꼭 이 병원을 찾았다.
“아~ 해볼까? 자, 아~”
의사 선생님은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한 손에 작은 손전등, 다른 한 손엔 쇠로 만든 아이스크림 스틱처럼 생긴 도구를 들고 내 입을 들여다보셨다. 이어지는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은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던 기억으로 아직도 또렷하다. 진찰이 끝나면 거의 항상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그 보상으로 사탕을 하나를 받았다. 그리곤 잠시 대기하다 이름이 불리면 하얀 약봉투를 받아 나왔다. 달지만 구역질 나는 오렌지색 물약의 맛이 떠올라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던 기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언제나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할아버지께서 함께 계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할아버지 생각나?”
병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어머니께서 조심스레 물으셨다.
“아니요?”
어릴 적부터 속마음을 들키면 일단 부정부터 하던 나였다.
병원에 도착해 진료실에 들어서자, 내가 자라는 모습을 쭉 봐온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래, 진규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이제 중학교 1학년? 어휴, 이젠 아주 학생티가 나는데? 할아버지는 잘 계시지?”
“사실은… 아이 할아버지가… 작년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아무 말 못 하는 나를 대신해 어머니께서 대신 대답하셨다.
진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5분 가까이 말없이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어머니께서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공부 때문에 힘들긴 한가보구나. 시험 망쳤어?”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해 보고 질문을 하시던 의사 선생님은 큰 이상은 없고, 아마 스트레스나 불안으로 인한 복통 같다고 하셨다.
“아닌데요?”
또 부정부터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홀가분했다. 혼자 품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다섯 딸을 둔 뒤 어렵게 얻은 장남이셨다. 귀하게 자란 아버지와 따뜻하고 정 넘치는 외가의 장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외가에서는 첫 손주, 친가에서는 장손이었다. 덕분에 유년기 내내 양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국민학교 입학 무렵부터 ‘장손’이라는 위치가 점차 내게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어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 착하고 의젓한 아이‘ 어야 했고 모범생 이어야 했다.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사달라는 말 못 하고 무엇이든 양보하라 배웠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에 모든 어른들께 아침 문안인사로 시작을 해서 밥을 먹을 때도 모든 어른들이 수저를 들어야 나도 먹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거나 부모님의 심부름을 하거나 할아버지 안마를 하는데 써야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제한적이어서 학교가 끝나면 여느 친구들과는 다르게 곧장 집으로 와야 했다.
“너는 우리 용인 이 씨 가문의 36대 장손이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말을 자주 하셨고, 엄격한 예절 교육을 강조하셨다. 나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아버지의 말동무로 보냈고 대신 그 덕분에 또래에 비해 시사, 역사,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나를 ‘훌륭하게’ 키우는데 진심이셨나 보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할아버지와 새벽 자전거 라이딩으로 하루를 시작해, 학교와 속셈학원, 웅변, 서예/미술,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꽉 찬 일정을 소화했다.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면 바로 잘 시간이 되었다.
마치 지덕체를 두루 갖춘 영웅이 될 기세로 태권도 학원까지 다녔지만, 재미있는 건 3학년이 되자 “이제 놀이는 끝났어.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며 보습학원을 제외하곤 모든 학원을 정리했다. 다만 논술을 준비해야 한다며 글짓기 과외를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강한 자만 살아남던’ 그 시절, 학교 성적표에는 ‘수-우-미-양-가’뿐 아니라 학급 및 전교 등수까지 기재되었었다. 부모님의 집중케어덕에 5학년 무렵, 나는 모든 과목에서 ‘수’를 받고 학력고사 4과목 중 3과목에서 100점을 받을 정도로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어서 6학년 때는 학급반장과 전교 어린이의회 부회장을 도맡았고 어른들의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자 변수들이 등장했다. 초등학교 때 공부에 관심 없던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공부에 뛰어들며 경쟁자가 되었고, 그동안 학습을 도와주시던 어머니의 한계도 서서히 드러났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몰랐던 나는 혼란 속에 중간고사를 치렀고 결과는 처참했다. 성적표가 나오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칠 것을 알고 있었고 혼자 끙끙 앓다 보니 어린 나이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생긴 것이다.
며칠 뒤엔 걱정하던 성적표가 나왔고 역시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입학 당시의 전교 등수가, 그대로 반 등수가 되었다.
나 스스로 돌파구를 찾을 틈도 없이 부모님은 충격요법과 멘토링을 동시에 시도하셨지만, 내게는 잔소리와 협박으로 다가왔다.
“아빠는 냉정한 사람이야. 난 네가 SKY도 도전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이면 아주 서울에 있는 대학도 힘들겠어. 아마 너, 지방대 가면 아빠가 등록금도 안 내주실걸.”
퇴근하신 아버지께서는 책가방을 열어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셨다.
“노트 필기가 이게 뭐야… 와, 내가 다 창피하다. 나는 이런 적 없었는데, 도대체 누구 닮은 거야. 이러니 성적이 떨어지지…”
만약 지방대학에 갔을 때 내가 내야 할지도 모를 등록금도 내 필기 습관이 부모님을 닮지 않은 것도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지만 오로지 어른들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할아버지께서 내가 아직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을 때 돌아가신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게 우리 집은 내가 감히 장손의 역할을 하기엔 높은 산이었고 열심히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이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보다 생각이 깊고 진지했던 13살의 나는 무엇보다도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중요한 아이였다.
어른들의 착하다는 칭찬을,
공부를 잘한다는 칭찬들을…
나는 내가 사랑을 받기 위한 요소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