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25년 1월 16일.
간밤에 잠을 잔 건지 자는 시늉을 한 건지 밤중에 시계만 수십 번 확인하다가 마침내 새벽 5시. 침대에서 일어나 양치와 세수를 한다.
평소라면 피곤함과 사투를 벌이고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잠시 후 있을 일에 대한 걱정과 긴장이 피곤함을 삼킨 듯 오히려 컨디션이 좋다.
면도와 머리 손질을 마친 나는 어제 미리 주문해 둔 도넛을 픽업하러 던킨도넛으로 향한다.
아직 한밤중 같은 이른 시간, 신호를 대기할 때마다 시선을 옮겨 손에 든 연설문을 바라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 나름 고심해서 썼지만, 아무래도 외워서 연설을 하는 건 무리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몇 번 연습이라도 할걸 하는 후회가 들지만, 이미 늦었다.
도넛을 픽업해 놓고 집으로 다시 출발하기 전, 주차장 차 안에서 펜을 들고 주요 내용을 동그라미로 표시해 둔다.
집에 도착하니 와이프와 아이들이 한창 준비 중이다. 나도 서둘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가족을 태우고 USS Missouri에 도착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 박물관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이미 도착한 아는 얼굴들과 인사하며 미리 축하를 받는다. 어색하게 스몰토크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배 위로 올랐다.
미국 전함 USS Missouri는 태평양 전쟁 종전을 알린 일본의 항복 문서가 조인된 역사적인 장소로, 지금은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그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인들의 은퇴식, 이/취임식, 또 오늘 같은 진급식 장소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Commanding Officer가 적절한 타이밍에 연설을 시작했다.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Senior Chief Lee의 진급식이 있는 날입니다. 시니어 치프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많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삶은 항상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민자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어려서 많은 희생을 했고, 군에 들어와서는 이제 나라를 위해 희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잠시 시선을 돌리는데, 눈물을 글썽이는 와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15년 만에 Master Chief가 되는 것은 제가 알기로 기록이며,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성과입니다. 아마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최초라고 알고 있는데 많이 자랑스럽고 항상 제가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시니어 치프, 아니, 이제 마스터 치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도 있기에 여기에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곧이어 진급장이 낭독되고, 미리 준비해 둔, 새계급장이 부착된 정모를 솔이가 내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또, 와이프와 봄이가 상의 컬러에 시니어치프 계급장을 떼고 마스터치프의 계급장을 달아주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박수 소리가 멈추고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큐 사인이다. 준비해 온 연설문을 꺼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애써 담담한 척 정렬해 있는 동료와 손님들을 바라본다.
순간 많은 일과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이민자로서의 10대 시절. 하지만 그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군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내게 멘토가 되어 이끌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어느 시점부터 나도 누군가를 이끌어 주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찾는 뿌듯함이 좋다.
해군에 들어오고 나서야 내 미국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나는 이 조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얻었다.
물론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이든 자원해서 참여했으며, 내성적인 성격도 많이 극복해야 했다. 힘든 적도 있었지만, 더 힘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감사함에 집중했다. 언제나 위기의 순간엔 좋은 사람들이 곁에서 이끌어 주었다.
역시나 연설은 완벽하지 않았다. 긴장해서 어떻게 끝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도넛과 커피를 준비했는데 내부 반입이 금지라서 지금 저희 차에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만나요.”
그렇게 내 커리어의 마지막 진급식을 마쳤다.
보너스 (열심히 준비한 연설문):
“Humbled and honored to be promoted to Master Chief! This milestone reflects God’s grace, my family’s unwavering support, the Sailors and service members I’ve served alongside, and the invaluable mentorship I’ve received throughout my career. To my mentors—you believed in me, challenged me, and guided me every step of the way. Your wisdom and trust have shaped the leader I am today. To the Mess—we are the backbone of the Navy, and I am proud to carry forward the legacy that defines us. Thank you to my wife, Hannah, my kids, Eunice and Enoch, and everyone I’ve served with. This isn’t a trophy—it’s a responsibility to lead and inspire the next generation.”
“마스터 치프로 진급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번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와 변함없는 가족의 지지, 함께 복무한 해군 및 군인 동료들, 그리고 제 경력 내내 받은 귀중한 멘토링의 결과입니다.
저를 믿어주시고, 도전하게 하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이끌어주신 멘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신뢰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Chief’s Mess는 해군의 중추입니다. 그런 유산을 이어갈 수 있게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제 아내 해나, 아이들 봄이와 솔이, 그리고 함께 복무했던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진급은 단순한 영광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이끌고 영감을 줄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