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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Oct 07. 2024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지 왜 옆 집을 욕하나

아들아, 그건 옆 집 잘못이 아니란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골프를 치는 중에 아내가 발을 헛디뎌서 발목 뼈 중 하나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골프장에서 일부 코스를 수리를 하면서 설치했던 구조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조물이 위험하게 설치되어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 구조물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다 보았다.


바로 Proshop에 전화를 했고, 골프장에서는 득달같이 카트를 보내고 119에 전화를 해서 아내는 구급차를 타고 바로 병원으로 실려가서 치료를 받았다. 


여기서 퀴즈 - 그 후에 나와 아내가 해야 할 행동이 뭘까?


이 대목에서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다음 행동이 큰 차이가 난다. 


국어로는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법이 없지만, 북미에는 Tort 라는 법이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불법행위법" 정도로 해석이 될 것 같지만, 사실 불법을 처벌하는 법이라고하기는 어렵다. 그 보다는 이 법은 "타인에 대한 배려불충분에 대한 처벌법"이라고 보는 게 어떨까 싶다. 예를 들면 이렇다. 


크리스마스에 사장인 내가 직원들에게 파티를 열어 주었다 치자. 좋은 음식와 비싼 술을 제공하고 밴드까지 불러서 노래도 하면서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중 한 직원이 대리 기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음주 운전을 하고 집에 가다가 사고가 났다. 누구 책임일까?


캐나다에서는 사고를 당한 사람은 내 직원을 고소하겠지만, 다시 그 직원은 회사나 혹은 사장인 나를 고소한다. 나는 생각한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고소해?"  하지만 직원은 말한다. 


"회사가 술을 줬기 때문에 사고가 난 거 잖아. 술을 안 주든지, 내가 음주 운전을 못하게 막든지 해야지".


한국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이런 항변이 캐나다에서는 통한다. 내가 충분한 배려를 받지 못했음을 주장하여 나의 잘못을 남의 잘못으로 만든다. 


내가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저 잔치를 해도 마찬가지다. 친구 아이가 내가 아끼는 고려 청자를 몰래 만지다가 깨뜨리고, 거기에 넘어저셔 머리를 다쳤다면 어떨까. 한국에서라면 아이 부모가 고려 청자를 어떻게 변상할까 고민하겠지만, 캐나다에서는 내가 위험한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며 그 부모가 나를 고소한다. 


캐나다의 아이들은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이런 일을 겪으면서 자라고, 그래서 배려를 주장함에 익숙하다. 그래서 캐나다에는 소송이 많다. 내가 뭘 잘 못했나 생각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다음에는 같은 일이 안 생기게 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하기 전에, 어느 놈에게 책임을 물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


내 외양간에서 소를 잃었으면 다시 잃지 않기 위해 외양간을 고쳐야 할 텐데, '옆 집에서 시끄럽게 해서 소가 뛰쳐나간 것'이라 주장할 수 있을 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골프장에서 내 아내와 같은 사고를 당하면 골프장을 고소하는 것이 거의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다 보니 캐나다는 더 빡빡한 나라가 되어간다. 일례로 회사들은 이제 파티를 열지 않거나, 파티를 열어도 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거창하게 나라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렇게 Tort라는 법에 기대어 금전적인 보상을 누리는 건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는 길이다. 그 외양간은 다음에도 소를 잃을 것이 분명하고, 매 번 누군가에게 소를 보상 받는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회복이 불가능한 수의 소를 잃어버리는 경우를 본 적도 적지 않다. 


어쨌든 있는 법이야 어쩔 수 없고, 중요한 건 우리 아이들이 소를 잃고 옆 집 탓을 하지 않도록 키우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에게 한국에서보다 더 자주 이 말을 해야 한다. 


그건 네 잘못이야. 그건 우리 잘못이야. 옆 집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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