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질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빛 Mar 09. 2023

<전세>


오랜 전세살이,

거듭된 이사살이. 

끝에 내 집을 장만했습니다.

집 주인이 나인지, 은행인지 애매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내 집에 삽니다.


무리해서 집을 장만한 이유.

전세의 설움.

내 돈인데도, 내 전세금인데도,

전세금 달라며 쩔쩔야만 하는 설움.

범보다 무서운 게,

빚보다 무서운 게,

전세의 설움.

그래서 난 집을 사 버렸습니다.


~~~


이사갈 곳이 정해졌습니다.

이삿날이 잡혔습니다.

계약만료일에 맞추어 입주일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3개월.

근데 걱정입니다.

집주인이 다음 세입자에게 돈을 받아 나가랍니다.

전세의 설움.


부동산에 또 다녀왔습니다.

집을 내놓은지 꽤 됐는데 연락이 없습니다.

집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한달이 지났습니다.

진척이 없습니다.

보러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아침 출근하자 마자 부동산에 전화를 습니다.

역시 남들은 나 같지 않은 듯.

시큰둥한 반응의 부동산사장.

역시 맘고생은 급한 세입자의 몫.


또 부동산에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진척이 없습니다.

냉랭한 표정에, 형식적인 대답만이 돌아옵니다.


또 한달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집을 보러 오는 이가 없습니다.

다시 부동산에 부탁을 하고 왔습니다.

기분이 착잡합니다.


또 날짜만 지나갑니다.

여전히 집을 보러 오는 이가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금방 나간다며 그렇게 당당하게 큰소리 치던 사장.

그제서야 집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며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말고 동네에 내 놓은 집들이 많답니다.

인정할 뿐 대책없이 손놓고 있는 사장.

집을 안 보러 오는 게 자기 책임이냐고 되묻습니다.

음.. 그대의 책임 맞지.

집이 안 나간다는 건 수요자가 매력을 못 느낀다는 건데,

벽지, 장판, 싱크대를 새로 해서 집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집주인에게 제안을 했어야지~

그게 부동산 전문가인 중개업자가 할 일이지.

그대의 일부 책임이 지.

못된 사장.

집주인의 편에 서 있는 못된 사장.

가진자의 편에 서 있는 못된 사장.


여전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혹시나 하여, 주변 다른 부동산에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105동 205호 물건이 나온 게 없답니다.

순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럼, 그동안 그놈의 부동산이 자기만 가지고 있었다니.

부동산에 전화를 했습니다.

집주인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집주인이 거래하는 부동산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고.

그제서야  주변 부동산에도 내 놓아 달라는 집주인.

우리더러.

그대가 하지.

하지만 급한 자가 우물을 파야지.

당장 애엄마와 주변 부동산 3~4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승질이 났습니다.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치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는 거 말곤.

저 돈을 받아내기 전까진 참아야한다!

내가 힘들게 저축해 모아 마련한 전세금이

내 돈인지 집주인 돈인지 애매모호한 이 현실.

내 전세금 받으려고 집주인에 쩔쩔 매야만 하는 현실.

우선 내 돈을 받을 때까진 드러워도 참을 인자를 수십번 써야 하는 이 현실.


입주하게 될 집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해진 기한 내에 입주하지 못하면 이자와 가산금을 물어야 한다는 고지문.

집주인에게 전화를 하려 폰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예의를 갖춘 장문의 문자 편지.

이자와 가산금이 발생하게 되니 예정된 날짜에 이사할 수 있도록 전세금을 빼 달라는.

문자 답신이 왔습니다.

세입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돈을 줄 수 없답니다.

문구에서 짜증스런 말투가 베어나옵니다.

전세의 설움.


근 3개월만에 처음입니다.

우리가 직접 내놓은 부동산에서 신혼부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근데, 금방 대충 보고 갑니다.

시큰둥.

올수리가 된 13층 꼭대기도 ㅇㅇ억원인데,

수리가 전혀 안 된 이 집이 ㅇㅇ억이라니,

별로라 합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그 부동산 사장님의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싱크대를 고치든지, 벽지를 해 주던지, 금액을 낮추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집은 안 나갈 거라고.

내 말이 그 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습니다.

보름이면 이삿날인데.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동안 참았던 화를 토해 냈습니다.

조용히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아나 싶어,

참았던 불만, 문제점들을 얘기했습니다.

인테리어를 새로 하든지, 금액을 낮추던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집은 경쟁력이 없다고.

이 집이 안 나가면 집주인이 전세금을 직접 주어야 한다고.

집주인이 승질을 냅니다.

집이 안 나가는 게 우리가 늦게 부동산에 얘기했기 때문이랍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어이가 없습니다.

가진 자는 거짓말을, 아무말을 해도 되나 봅니다.

우린 이미 3달도 더 전에 집주인에게 사전 고지를 했는데.

집주인과 거래하는 그 부동산이 자기만 해당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엔 참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조목조목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돌아오는 답은 막무가내.

알아듣긴 했으려나.

주인이 11월이든 12월이든 다음 세입자에게 받으랍니다.

전화를 확 끊어버립니다.


오랜만에

다른 부동산에서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집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 뿐.


3개월 동안 고작 두 사람만 집을 보고 갔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14일 뒤면 이삿날인데.


드디어 이삿날.


결국, 계약만료일까지 이 집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이삿날 이사를 했다. 다행히.

집주인이 돈을 송금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내 전세금을 받아 이사를 했습니다. 다행히.

당일, 약속했던 시간까지 돈이 안 들어와

조마조마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휴우~


그래도 난 행운아에 속했습니다.

제때 전세금을 받았으니.

전세금 못 받아 이사가 무산된,

소송까지 간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나마 난 행운아.

하늘이, 조상이 도왔는지.

문 앞에 걸어 둔 코뚜레 덕분인지.

3개월 전부터 꼬박꼬박 집주인에게 고지를 한 덕인지.

돈 달라고 큰소리 좀 쳐서 인지.

운 좋게 최악은 아닌 집주인을 만나서인지.


이사한 날.

아이엄마와 난 펑펑 울었습니다.

천신만고끝에 험한 고개를 간신히 넘어서.

참으로 다행이어서.

더 이상은 전세살이가 싫어서.


느꼈습니다.

참 오래도록 사무치게.

배웠습니다.

참 잔인하고도 혹독하게.


아~

내 전세금이 내 돈이 아니었구나.

내 귀한 돈 달라며 굽신굽신 쩔쩔매고 조마조마해야 하는 게 전세살이었구나.

범보다 무서운 곶감이라더니,

빚보다 무서운 게 전세살이의 설움인가 보다.

빚부담보다 전세설움이 더 무섭구나.

전세의 설움이란.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