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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Jun 23. 2023

태백일사 삼한관경 본기 제4

배달(신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

서론

중국은 仲國이라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시원도 아니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나라도 아닙니다. 가장 심각하게는 그들은 열등감에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이것 이야말로 그들이 중심국가가 아닌 으뜸의 아래 버금 중仲을 써야할 당연한 이유가 됩니다. 지금 仲國을 영어로 China로 쓰는데  그 원류는 지나에서 왔다고 합니다.그럼 지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지나는 우리 (고)조선을 진국(辰國-단군조선)이라 칭한 적(단군조선 중기)이 있는데, 진아辰亞가 변하여 지나로 되었으리라 추측이 가능합니다. 즉 조선의 다음 가는나라 정도로 해석되겠죠? 배달신시에 치우천황께 항복한 헌원軒轅은 배달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서 중국仲國(지나)에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은덕을 잊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 이지요? 우리에게 배워갔으나 은덕을 배신하고 우리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도 있습니다. 


1)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했고, 

2)우리나라를 부강해지도록 하지 못했고

3)그럼에도 아직 반성하거나 고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참 역사를 알지 못하니 후세에는 그 정도가 더 깊어질까 두려워 이런 글을 써봅니다. 삼한관경이란 단군조선시대의 나라삼한의 경계를 말하며 또한 진한, 마한, 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것을 말합니다. 단군조선의 정신세계인 삼심사상과 함께 독특한 통치체계입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三韓管境 본기本紀

배달(신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


1.환웅천황의 제천 행사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 有負水抱山而又回焉之處

乃大日王祭天之所也 世傳桓雄天王 巡駐於此 佃獵以祭 風伯 天符刻鏡而進 雨師 迎鼓環舞 雲師 佰劍陛衛 盖天帝就山之儀仗 若是之盛嚴也 山名曰不咸 今亦曰完達 音近也

<해설>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달리면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홀빈->지금의 하얼빈)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송화강)을 뒤로 업고 산(완달산 또는 불함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커밝환 환웅천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삼신 오제에 뿌리를 두고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를 삼백이라 한다.-(삼신오제본기 참고)

풍백(風伯: 입법관)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 행정관)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영고迎鼓 의식), 운사(雲師: 사법관)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현재 우리의 발음으로는 전혀 비슷하지 않지만, 그 당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2.비서갑의 초대 왕검이 된 웅녀군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以天王諭國人之意 

戒之曰 父母可敬也 妻子可保也 兄弟可愛也 老長可隆也 少弱可惠也 庶衆可信也 又制醫藥工匠養獸作農測候禮節文字之法 一境化之 遠近之民 皆不相疑也

<해설>

뒤에 웅녀의 군(君-웅족 여왕)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부모는 공경해야 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로(長老)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庶衆)은 믿어야(진실되게 대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工匠),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3.한족 시조 헌원軒轅은 웅씨족 소전少典의 후예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 嘗百草制藥 後徙列山 日中交易 人多便之 少典之別派 曰公孫 以不善養獸 流于軒丘 軒轅之屬 皆其後也

<해설>

웅씨(熊氏)에서 갈려져 나간 자중에서 소전(少典)이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8세환웅) 한웅 말기에 소전(少典)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섬서성 위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호북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다른 지파<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다 

헌원(軒轅-공손(성)헌원(이름))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4.구환을 통일하신 신인 왕검: 국조 단군

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黎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 

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乃召國人 立約 曰自今以後 聽民爲公法 是謂天符也 

夫天符者 萬世之綱典 至尊所在 不可犯也 

遂與三韓 分土而治 辰韓 天王自爲也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是爲 一世檀君 

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 稱王儉城 以王儉舊宅 尙存故也 

<해설>

사와라(斯瓦羅-13세환웅)한웅 초기에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받아서 왕검(단국의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가 천 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椑王-임금을 보필하는 직위)이 되었다. 섭정하신 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배달국)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되,「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했는데,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 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 상 馬韓世家 上 

熊虎交爭之世 桓雄天王 尙未君臨 苗桓 乃九皇之一也

在昔 已爲我桓族 遊牧農耕之所 而及神市開天

以土爲治 一積而陰立 十鉅而陽作 无棉而衷生焉

<해설>

곰 무리과 범 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환(苗桓-한반도-마한의 옛 이름)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환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神市)의 가르침이 열렸으며

토土로서 정치를 했다. 일적(一積) 음립(陰)立)하고 십거(十鋸)  양작(陽作)하니 무궤충생(無匱衷生)이로다. 


1.황제헌원이 신시 배달에 와서 도를 닦다

환역을 풀어내는 윷놀이와 염표문念標文

鳳鳥 聚棲於白牙岡 仙人 來往於法首橋 法首 仙人名也

人文 早已發達 五穀豊熟 適以是時 紫府先生 造七回祭神之曆 進三皇內文於天陛

天王嘉之 使建三淸宮而居之 共工軒轅倉呂大撓之徒 皆來學焉

於是 作柶戱 以演桓易 盖神誌赫德所記天符之遺意也

昔者 桓雄天王 思天下之大 非一人所能理化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作曆 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 爲一年也 此乃三神一體上尊之遺法也

故 以三神立敎 乃作布念之標 其文 曰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自是蘇塗之立 到處可見 山像雄常 山頂皆有 四來之民 環聚墟落 四家同井

二十稅一 時和年豊 露積邱山 萬姓歡康之 作太白環舞之歌以傳

<해설>

봉황(숫컷은 봉, 암컷은 황)의 봉이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마한의 수도)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치우천황의 스승)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치우천황)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문자를 만든이), 대요(大撓-십간 십이지 만든 이)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환역(桓易-하늘의 이법)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천부(天符)의 유의(遺意)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포념지표布念之標)

그 글에 가로되「일신(一神-삼신)이 참 마음속衷에 내려와<一神降衷> 성(性)은 광명으로 통하니 광명을 회복하고<性通光明> 인간 세상을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모든 이를 광명하게) 하라<弘益人間>」고 했다. 이때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산 자체가 신)의 웅상(雄常-가장 큰 나무가 신)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하나의 정전법을 시행하여 함께 농사를 지었으며, 20분의 1의 세금을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太白環舞-강강수월래 같은 춤)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2.치우천황蚩尤天皇의 헌원軒轅 토벌討伐- 탁록涿鹿 대전쟁

繼有蚩尤氏 作造九治以採礦 鑄鐵作兵 又制飛石迫擊之機 天下 莫敢讐之

時 軒丘不服 蚩尤 躬率往征之 大戰於涿鹿 今山西大同府也

將戰 作涿鹿檄 乃召八十一宗黨大人 先以頒示蚩尤形像 具命誓而告之

蚩尤天王 曰爾軒丘 明聽朕誥 日之有子 惟朕一人 爲萬世爲公之義 作人間洗心之誓

爾軒丘 侮我三神一體之原理 怠棄三倫九誓之行 三神 久厭其穢 命朕 一人 行三神之討

爾早已洗心改行 自性求子 降在爾腦 若不順命 天人咸怒 其命之不常

爾無可懼乎哉 於是 軒丘 乃平服 天下 宗我焉 

<해설>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투석기)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헌구(軒丘-헌원-하남성 신성시, 신농의 제후국이었으나 치우에게 신농이 망하자 독립함)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징벌코자 하여  탁록涿鹿에서 크게 싸웠다. 

탁록涿鹿은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 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에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천부경의 수)의 대인(大人)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되,

"너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천자)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너 헌구야!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三倫-애(아버지와 자식의 사랑),예절(왕과 신하),도(스승과 제자); 九誓-효,우(애),신(믿음),충,겸손, 명지,용감,청렴,의)의 행을 게을리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을 대신하여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릿속에 있음이로다.<自性求子 降在爾腦>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헌원軒轅은 항복 후 배달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서 중국仲國(지나)에 전했다고 합니다.)


3.선인 有爲子가 전한 천지대도의 도언道言

도의 근원은 삼신상제님

時 有爲子隱於妙香山 其學 出於紫府先生也 過見熊氏君 君請爲我陳道乎

對曰 道之大原 出乎三神也 道旣無對無稱 有對非道 有稱亦非道也

道無常道 而隨時乃道之所貴也 稱無常稱 而安民乃稱之所實也

其無外之大 無內之小 道乃無所不含也 天之有機 見於吾心之機 地之有象 見於吾身之象

物之有宰 見於吾氣之宰也 乃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也

一神所降者 是物理也 乃天一生水之道也 性通光明者 是生理也 26

乃地二生火之道也 在世理化者 是心理也 乃人三生木之道也 25

盖大始 三神造三界 水以象天 火以象地 木以象人 夫木者 23

量地而出乎天 亦如人立地而出能代天也 君曰 善哉 言乎

<해설>

때에 유위자(有爲子-국자 사부)가 묘향산에 운둔하며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나를 위해서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되「도의 대원(大原-근원)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입니다.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경우)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이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은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틀(機)은 내 마음의 기틀에서, 땅의 모양은 내 몸의 모양에서, 사물의 주관(宰)은 나의 기(氣)의 주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인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불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서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사람(人三)이 나무를 살게하는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라고 하니, 임금께서는「옳을시고 그 말씀이여!」하시더라.


4.고조선 마한 수도의 위치와 역대 왕의 치적

마한의 초대 왕(부단군): 웅백다

檀君王儉 旣定天下 分三韓而管境 乃封熊伯多爲馬韓 都於達支國 27

亦名曰白牙岡也 登馬韓山祭天 天王下詔 曰人視鏡則姸醜自形 26

民視君則治亂見政 視鏡須先視形 視君須先視政

馬韓 上箚 曰聖哉 言乎 聖主 能從衆議 故道大 暗君 好用獨善 故道小 可無內省而不怠乎

<해설>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평양, 월月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밝은 언덕)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馬韓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가로되,「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治亂)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라고 하니 마한(馬韓-부단군 웅백다)은 글을 올려 가로되,「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聖主-훌륭한 임금)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1) (지금의 강화도에)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다.

檀君王儉五十一年 天王 命雲師倍達臣 築三郞城于穴口

設祭天壇于摩璃山 發江南民丁八千人以助役 辛酉三月 天王 親幸摩璃山祭天

熊伯多薨 在位五十五年 子盧德利立

盧德利薨 子弗如來立 是檀君扶婁十二年壬子

秋十月 以命頒七回曆于民 明年春三月 始敎民種柳于白牙岡 作都亭

丙辰 刻立三一神誥碑於南山 庚申 作稻田 己亥 立蘇塗 施三倫九誓之訓 治化大行

<해설>

단군왕검 51년(무오 B.C.2283)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을 혈구(穴口)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머리산)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B.C.2280)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 지냈다. 

웅백다(熊伯多)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盧德利 : 2대)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弗如來 : 3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부루 12년 임자(B.C.2229)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七回)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듬해(계축년 B.C.2228)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평양)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B.C.2225)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우게 했다. 

경신년(B.C.2221)에 도전(稻田-벼를 재배하는 논)을 일구고 기해년(B.C.2182)에 소도를 세우고, 그 옆에 경당을 만들어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2) 삼세 가륵단군의 중도일심中道一 心 정신에 대한 성훈

 檀君嘉勒三年 弗如來 薨 子杜羅門立 乙巳九月 天王勅 曰

天下大本 在於吾心之中一也 人失中一 則事無成就 物失中一 則體乃傾覆

君心惟危 衆心惟微 全人統均 立中勿失然後 乃定于一也

惟中惟一之道 爲父當慈 爲子當孝 爲君當義 爲臣當忠

爲夫婦當相敬 爲兄弟當相愛 老少當有序 朋友當有信

飭身恭儉 修學鍊業 啓智發能 弘益相勉 成己自由 開物平等 以天下自任

當尊國統 嚴守憲法 各盡其職 獎勤保産於其國家有事之時 捨身全義

冒險勇進 以扶萬世无疆之運祚也

是朕 與爾國人 切切佩服而勿替者也 庶幾一體完實之至意焉 其欽哉

<해설>

단군 가륵(3세, 기해년 B.C.2182~계미45년 2138) 제3년(신축 B.C.2180) 불여래(弗如來)가 죽고 아들 두라문(杜羅門 : 4대)이 즉위했다. 을사년(B.C.2176)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천하의 큰 근본은 내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어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를 성취할 수가 없으며,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기울어져 엎어지게 되나니, 임금님의 마음은 위태로워지고 뭇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질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잘 통찰하여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을 것이며, 이를 어기지 않은 후에야 마침내 한결같음을 얻으리라.

중심이 잡힌 한결같은 도<惟中惟一之道>란, 아비는 자애롭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롭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스럽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하며,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함이다.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배움을 닦고 업을 익히며, 지혜를 열고 능력을 드러내어 널리 유익케 하고, 서로 근면하여 나를 이루어 스스로成己自由 자유롭고 만물을 열어 평등케 함이다.

천하를 맡음으로써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고 나라 법을 준수하며, 각기 그 맡은 바 직책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장하여 산업을 보전함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시에는 몸을 던져 의(義)를 온전하게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나아가 만세 무강한 복을 도움이다. 

임금과 나라 사람 모두가 이를 적절히 새겨 변함없도록 할 것이로되, 모두가 완전하게 이루고자 하는 지극한 뜻이니 공경할지어다.」라고 하였다.


(3)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함

杜羅門薨 子乙弗利立 乙弗利薨 子近于支立 乃檀君烏斯丘乙酉也

庚寅 遣民丁三十人 造船舶于薩水 乃辰韓南海岸也

壬子 韓以命入常春 助祭三神于九月山 十月 起離宮於牧丹峰中麓

爲天王巡駐之所 

<해설>

두라문(杜羅門)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乙弗利 : 5대)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近于支 : 6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을유년(B.C.2136)이다. 경인년(B.C.2131)에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지금의 개주시 대청하)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년(B.C.2109)에 한(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늘봄, 지금의 장춘)에 들어가 구월산(주성자)에서 삼신님께 제사 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 (淸川江) 절대 아닙니다.)


조의 하사下賜와 가관 의식

每當三月 命馬韓 閱武佃獵 十六日

祭天麒麟窟 賜瑋衣加冠之禮 仍歌舞百戱而罷 

甲寅 近于支薨 子乙于支立 乙于支薨 弟弓戶立

弓戶薨 無嗣 杜羅門之弟杜羅時曾孫莫延 以命入承馬韓

戊申 檀君于西翰 巡駐白牙岡 命劃田授土 四家作區 區出一乘 分守鄕衛

<해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閱兵)하도록 하고 사냥하게 했다. 3월16일(삼신상제께 제사 지내는 날)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皂衣)를 하사下賜하여 가관(加冠)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B.C.2107)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乙于支 : 7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弓戶 : 8대)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杜羅門)의 동생인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 : 9대)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B.C.1993)에 단군 우서한(于西翰)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區)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一乘-수레)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4) 십사세 단군 때 환도 문명이 번성함

신교의 제도화로 환도 문명이 번성

檀君魯乙壬寅 莫延薨 弟阿火立

時 檀君道奚 方銳意開化 平等爲治 以命建大始殿于大聖山 作大橋于大同江

三忽爲佺 設句堂 定七回祭神之儀 講三倫九誓之訓 桓道文明之盛 聞于域外

夏主媚 遣使獻方物 丁巳阿火薨 子沙里立 檀君阿漢乙卯 沙里薨 弟阿里立

檀君古弗乙酉 阿里薨 子曷智立 曷智薨 檀君代音戊申 子乙阿立

<해설>

단군 노을(魯乙10세단군)제의 임인년(B.C.1939)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阿火 : 10대)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道奚)가 바야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3고을)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애,례,도 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 나라의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B.C.1864)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沙里 : 11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阿漢)의 을묘년(B.C.1806)에는 사리가 죽었으니 동생 아리(阿里 : 12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古弗帝)의 을유년(B.C.1716)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曷智 : 13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代音帝)의 무신년(B.C.1633)에 갈지의 아들 을아(乙阿 : 14대)가 즉위하였다.


참성단塹星壇의 제천 행사에 참여한 탐耽나라 신하

己酉 耽牟羅人 獻馬三十匹 

乙阿薨 檀君余乙辛未 子豆莫亥立 

壬申三月十六日 親幸摩璃山 祭三神于塹城壇 殷主外壬 遣使助祭 

豆莫奚薨 戊寅 子慈烏漱立 薨 己丑 子瀆盧立 瀆盧薨 檀君固忽庚午

子阿婁立 阿婁薨 戊午 弟阿羅斯立

<해설>

기유년(B.C.1632)에 탐모라(耽牟羅-탐라-제주) 사람이 말 30 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餘乙帝)의 신미년(B.C.1550)에 아들 두막해(豆莫奚 : 15대)가 즉위하였다. 임신년(B.C.1549) 3월 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은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B.C.1472)에 아들 독로(瀆盧 : 17대)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固忽帝)의 경오년(B.C.1371)에아들 아루(阿婁 : 18대)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B.C.1323)에 동생 아라사(阿羅斯 : 19대)가 즉위하였다. 


고조선 전삼한 시대의 대전환점

고등의 반역사건

是歲 高登 叛據開城 抗命天王 馬韓 方擧兵討之 到紅石嶺界

聞天王許高登 爲右賢王 乃止 乙未 天王 

欲讓禪于海城褥薩徐于餘 馬韓 諫不可而不允 

及索弗婁之立 而馬韓 整師躬率 往戰于海城 戰敗不還

<해설>

이 해(단군세기에는 BC1289년)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장단경아사달-개원)에 웅거 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B.C.1286)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색불루(索弗婁)가 즉위(B.C.1285)하니 마한(아라사)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馬韓世家 下 마한세가 하


삼한에서 삼조선 시대로 전환

우현왕 색불루의 대권당

檀君索弗婁 承祖父功 手握重兵 辰韓自潰 二韓亦未一勝而敗滅 

前帝 使人傳玉冊國寶以讓 新帝 相都於白岳山 諸褥薩執不可 

黎元興蓋天齡等 奉詔諭之 於是 諸褥薩畢服 

<해설>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할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馬韓)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해 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지금의 장춘)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지방관)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1.이십이세 색불루단군,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천도遷都

丙申元年正月 遂卽位于鹿山 是爲白岳山阿斯達也 

三月下詔 曰 邇者 阿斯達 使人傳玉冊國寶以讓 前帝 

今雖襲號以尊 而其海內山川 旣歸名帳 祭天之禮 當在國典 不可濫也 

必須徵古實 以達誠敬者 今當祭迎 前往擇齋 審掃神域 潔備牲幣 用答三神 

於是 帝擇齋七日 授香祝于黎元興 至十六日早朝 敬行祀事于 

三韓大白頭山天壇 帝親祭于白岳山阿斯達 

<해설>

병신원년(B.C.1285)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백악산 아사달)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이때 소태단군은 송화가 아사달(하얼빈)에 있었다고 함) 소태단군이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 19대-마한부단군)에게 내려 주었다. 3월16일(대영절-단군천제)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색불루단군)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其白頭山誓告之文 曰 

朕小子檀君索弗婁 拜手稽首 自天帝子之修我以及民 必自祭天以敬

皇上 受三神明命 普恩大德 旣與三韓五萬里之土境

共享弘益人間 故遣馬韓黎元興 致祭于三神一體上帝之壇 神其昭昭 體物無遺 潔齊誠供

降歆黙佑 必能賁飾新帝之建極 世保三韓千萬年无疆之祚業

年穀豊熟 國富民殷 庶昭我聖帝空我存物之至念

<해설>

그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 들여 바쳐 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 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2.국제를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개편

五月 改制三韓 爲三朝鮮 朝鮮 謂管境也

眞朝鮮 天王自爲 而地則仍舊辰韓也 政由天王 三韓 皆一統就令也

命黎元興爲馬韓 治莫朝鮮 徐于餘爲番韓 治番朝鮮 總之名

曰檀君管境 是則辰韓 史稱檀君朝鮮 是也 

<해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친히 다스리니 그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이다. 삼한(三韓)이 모두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단군조선)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다. 


대동강의 왕검성을 막조선의 여원흥이 주재主宰함

元興 旣受大命 鎭守大同江 亦稱王儉城

天王 亦以每年仲春 必巡駐馬韓 勤民以政 於是 藉供厚斂之弊 遂絶

先是 有詔 曰惟朕一人之養 煩民以斂 是乃無政也 無政而君何用哉 嚴命罷之

戊子 馬韓 承命入京師 諫以寧古塔遷都爲不可 從之

元興薨 己丑 子阿實立 阿實薨 弟阿闍立 

<해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가로되「생각건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영고는 만주어로 6, 영고제를 지내는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에 아들 아실(阿實 : 21대)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阿闍 : 22대)가 즉위했다. 


기자의 은둔隱遁 생활

己卯殷滅 後三年辛巳 子胥餘 避居太行山西北地 莫朝鮮聞之 巡審諸州郡 閱兵而還 

阿淞薨 庚戌 子阿火只立 阿火只薨 丙戌 弟阿斯智立 阿斯智薨 檀君摩休丁亥 兄之子阿里遜立 阿里遜薨 子所伊立 所伊薨 丁亥  子斯虞立 

<해설>

기묘년(B.C.1122)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20) 자서여(子胥餘-기자)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31)에 아들 아화(阿火 : 22대)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B.C.995)에 동생 아사지(阿斯智 : 23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摩休)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 : 24대)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所伊 : 25대)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B.C.934)에 아들 사우(斯虞 : 26대)가 즉위했다. 


3.압야후陜野侯가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함

戊子 周主宜臼 遣使賀正 斯虞薨 甲辰 子弓忽立

甲寅 命陜野侯 率戰船五百艘 往討海島 定倭人之叛 

弓忽薨 子東杞立 東杞薨 檀君多勿癸酉 子多都立 多都薨 壬辰 子斯羅立

斯羅薨 子迦葉羅立 迦葉羅薨 甲寅 子加利立 

乙卯 隆安獵戶數萬叛 官兵 每戰不利 賊遂迫都城甚急 加利亦出戰 中流矢而薨 

<해설>

무자년(B.C.933)에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갑진년(B.C.737)에 아들 궁홀(弓忽 : 27대)이 즉위하더니 갑인년(B.C727)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東杞 : 28대)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多勿)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에 아들 사라(斯羅 : 30대)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迦葉羅 : 31대)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加利 : 32대)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에 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4.고조선의 함락-우화중于和冲의 대역모와 기후箕詡의 반란

丙辰 上將丘勿 遂斬獵戶頭目于和態 移都藏唐京 先以加利之孫典奈 

入承莫朝鮮 自是國政益衰 典奈薨 子進乙禮立 進乙禮薨 乙卯 子孟男立 

戊戌 須臾人箕代 兵入番韓以據 自稱番朝鮮王 燕遣使 與我共伐之 莫朝鮮不從

癸亥 檀君高烈加 遂棄位入阿斯達 眞朝鮮與五加從政 終未復而終焉

<해설>

병진년(B.C.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44세)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3번째 수도, 지금의 요령성개원시)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내(典奈 :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이때부터 삼조선의 병권을 나눠가짐) 전내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 : 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孟男 : 35대)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王)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녹산이나 구월산)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에게 맏기었으나 5년 동안 공화정으로 이어오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番韓世家 上 번한세가 상


1.요순은 단군조선의 제후

요임금이 양위譲位 한 배경

蚩尤天王 西征涿芮 南平淮岱 披山通道 地廣萬里

至檀君王儉 與唐堯幷世 堯德益衰 來與爭地不休

天王 乃命虞舜 分土而治 遣兵而屯

約以共伐唐堯 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於是 舜之父子兄弟 復歸同家 盖爲國之道 孝悌爲先

<해설>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탁록, 섬서성 예성현)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태산)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요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효제(孝悌)가 먼저이다. 


2.구년 홍수를 다스리기 위한 도산塗山 회의會議 

及九年洪水 害及萬民 故檀君王儉 遣太子扶婁

約與虞舜 招會于塗山 舜遣司空禹 受我五行治水之法 而功乃成也

<해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황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건설부장관)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천자 단군왕검을 알현한 제후 순

於是 置監虞於琅耶城 以決九黎分政之議 卽書所云 東巡望秩 肆覲東后者 此也

辰國 天帝子所治 故五歲巡到琅耶者一也 舜諸侯 故朝覲辰韓者四也 

<해설>

 이에 우(虞 : 舜)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려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멀리서 산을 보며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동쪽의 왕<東后>을 찾아 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巡狩)하는데 낭야에 한 번씩 이르렀다. 순(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씩이었다. 


3.초대 번한 왕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

於是 檀君王儉 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해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요수潦水 일대에 쌓은 십이성 

蚩頭男 蚩尤天王之後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 卽拜爲番韓 兼帶監虞之政

庚子 築遼中十二城 

險瀆令支湯池桶道渠庸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是也

頭男薨 子琅邪立 是歲庚寅三月 改築可汗城 以備不虞

可汗城一名琅邪城 以番韓琅邪所築 故得名也

<해설>

치두남(蚩頭男 :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B.C.2321)에 요중(遼中-지금의 난하)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번한의 수도)․용도․거용․ 한성․개평․대방․백제(百濟-대륙 백제(하북성)에서 와서 백제라 했을것)․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야(琅邪 : 2대)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야에 세워진 때문이다. 


태산과 회수淮水 사수泗水 지역 삼신신앙의 유래

甲戌 太子扶婁 以命往使塗山 路次琅邪 留居半月

聽聞民情 虞舜亦率四岳 報治水諸事 番韓 以太子命 

令境內大興句堂 幷祭三神于泰山 自是三神古俗 大行于淮泗之間也 

갑술년(B.C.2267)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야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안위성) 사(泗-산동성) 지방(회수淮水 와 사수泗水)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4.오행치수의 묘법 전수

太子 至塗山 主理乃會 因番韓告虞司空 曰予北極水精子也 汝后請予

以欲導治水土 拯救百姓 三神上帝 悅予往助 故來也 

遂以王土篆文天符王印 示之 曰 

佩之則能歷險不危 逢凶無害 又有神針一枚 能測水深淺 用變無窮 

又有皇矩倧寶 凡險要之水 鎭之永寧 

以此三寶授汝 無違天帝子之大訓 可成大功也 

於是 虞司空 三六九拜而進 曰勤行天帝子之命 佐我虞舜開泰之政 

以報三神允悅之至焉 自太子扶婁 受金簡玉牒 盖五行治水之要訣也 

太子 會九黎於塗山 命虞舜 卽報虞貢事例 今所謂禹貢 是也

琅邪薨 癸卯 子勿吉立 勿吉薨 甲午 子愛親立 愛親薨 子道茂立

道茂薨 癸亥 子虎甲立 丁丑 天王 巡到松壤 得疾而崩 番韓遣人治喪 分兵戒嚴 

虎甲薨 檀君達門己丑 子烏羅立 甲午 夏主少康 遣使賀正

烏羅薨 丙戌 子伊朝立 伊朝薨 檀君阿述丙寅 弟居世立 

居世薨 辛巳 子慈烏斯立 慈烏斯薨 乙未 子散新立 散新薨 戊子 子季佺立 

庚申 以命設三神壇于湯池山 徙官家 湯池 古安德鄕也 

<해설>

태자는 도산(절강성 소흥시 회계사)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구종(皇矩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이지역에 사는 고구려 사람)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勿吉 : 3대)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B.C.2187)에 아들 애친(愛親 : 4대)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道茂 : 5대)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B.C.2098)에 아들 호갑(虎甲 : 6대)이 즉위하였다. 정축년(B.C.2084)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達門)의 기축년(B.C.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신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B.C.2015)에 아들 이조(伊朝 : 8대)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阿述)의 병인년(B.C.1975)에 동생 거세(居世 : 9대)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B.C.1960)에 아들 자오사(慈烏斯 : 10대)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B.C.1946)에 아들 산신(散新 : 11대)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B.C.1893)에 아들 계전(季佺 : 12대)이 즉위했다.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地山-번한의 수도옆에 있던 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였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이곳이 바로 안시성이다)


5.번한番韓 십오세 왕 소전少佺, 성탕成湯을 도와 하夏나라 폭군 걸桀을 정벌함

薨 丁巳 子伯佺立 伯佺薨 乙未 仲弟仲佺立 薨 辛卯 子少佺立 

甲午 遣將蚩雲出 助湯伐桀 乙未 遣墨胎 賀湯卽位 少佺薨 甲戌 子沙奄立 

薨 弟棲韓立 薨 丁丑 子勿駕立 薨 辛巳 子莫眞立 

薨 丁卯 子震丹立 是歲 殷主太戊 來獻方物 薨 癸酉 子甘丁立

薨 子蘇密立 癸巳三年 以殷不貢 往討北紬 其主河亶甲 乃謝

蘇密薨 子沙豆莫立 薨 季父甲飛立 薨 庚申 子烏立婁立 薨 子徐市立

薨 戊申 子安市立 薨 己丑 子奚牟羅立 

薨 檀君蘇台五年 以雨師小丁 出補番韓 盖高登 每彈其智謀出衆而勸帝出補 

時 殷主武丁 方欲興兵 高登聞之 遂與上將西余 

共破之 追至索度 縱兵焚掠而還 西余 襲破北亳 仍屯兵于湯池山

遣刺客 殺小丁 幷載兵甲而去 

<해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B.C.1864) 아들 백전(伯佺 : 13대)이 즉위했고, 백전이 죽은 뒤 을미년(B.C.1826)에 중제(仲弟) 중전(仲佺 : 14대)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少佺 : 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단군조선이 중국 하나라 멸망, 은나라 건국에 깊이 관여함을 알 수 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B.C.1727)에 아들 사엄(沙奄 : 1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棲韓 : 17대)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B.C.1664)에 아들 물가(勿駕 : 18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B.C.1660)에 아들 막진(莫眞 : 19대)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B.C.1614)에 아들 진단(震丹 : 20대)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甘丁 : 21대)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蘇密 : 22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何亶甲)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沙豆莫 : 23대)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甲飛 : 24대)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B.C.1441)에 아들 오립루(烏立婁 : 2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徐市 : 26대)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B.C.1393)에 아들 안시(安市 : 27대-안시성의 유례인가?)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奚牟羅 : 28대)가 즉위(B.C.1352)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素胎) 5년(B.C.1333) 우사(雨師)의 소정(小丁 : 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 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番韓世家 下 번한세가 하

1.색불루단군이 국가 제도를 개편하고 혁명가 서우여를 번한 왕에 임명함

檀君索弗婁 初幷三韓 大改國制 殷主武丁 遣使來約貢 

先是 廢徐于餘爲庶人 徐于餘 潛歸坐原 與獵戶數千 謀起兵

蓋天齡 聞卽往伐 敗沒于陣 帝親率三軍 往討之

乃先遣勸降 約封爲裨王 再諭以聽 至是 命徐于餘爲番韓 

<해설>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요화의 서쪽, 고구려 명림답부 좌원대첩 장소)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 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갑천령(蓋天齡-색불루단군의 수하장군)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색불루단군)께서는 몸소 삼군(12,000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椑王-번조선 부단군)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徐于餘 : 30대)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1)고조선의 팔조八條 금禁법

四年己亥 眞朝鮮 以天王勅文 傳曰爾三韓 上奉天神 接化群生 

自是敎民 以禮義田蠶織作弓矢字書 

爲民設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爲其家奴 女爲婢 毁蘇塗者禁錮 失禮義者服軍 

不勤勞者徵公 作邪淫者笞刑 行詐欺者訓放 

欲自贖者 雖免爲公民 俗猶羞之 嫁娶無所璥 

是以 其民 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 貞信不淫 闢其田野都邑 飮食以 阡豆 

有仁讓之化 辛丑 殷主武丁 因番韓上書天王 獻方物 

丙申 徐于餘 薨 丁酉 阿洛立 薨 丁丑 率歸立 薨 甲子 任那立

辛未 以天王詔 築天壇于東郊 祭三神 衆環舞擊鼓以唱 曰

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祝壽爲世

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任那薨 丙申 弟魯丹立 北漠入寇 遣路日邵 討平之 薨 己酉 子馬密立 薨

丁卯 子牟弗立 乙亥 置監星 牟弗薨 丁亥 子乙那立 甲午 周主瑕 遣使朝貢

<해설>

4년 기해(B.C.1282)에 진조선(색불루단군)은 천왕의 칙문勅文를 전하였는데 가로되「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팔조금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1.상살상살相殺償殺-사람의목숨을 귀히 여김),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2.상상곡상相傷穀償-사유재산이 있었음), 남의 것을 도둑질盜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3.상도자相盜者: 男->노奴 女->비婢-노예제도있었음),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4.금고禁錮),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5.복무服軍),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6.徵公),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7.笞刑)으로 다스리고, 사기 치는 자는 스스로 속죄하게 하고 훈계 방면하나 공표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어, 백성들은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8.사기치는 자는 訓放하나 결혼도 못하고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힘들었을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제(武帝)가 번한(당시 서우여부단군)을 거쳐 천왕(당시 색불루단군)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B.C.1224)에 아락(阿洛 : 31대)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B.C.1184)에 솔귀(率歸 : 32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B.C.1137)에 임나(任那 : 33대)가 즉위하였다. 신미년(B.C.1130)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 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정성으로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을 축원(축수)하세.

황운(皇運-단군조선의 운수)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魯丹 : 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B.C.1092)에 아들 마밀(馬密 : 35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B.C.1074)에 아들 모불(牟弗 : 36대)이 즉위했다.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별을 관측)을 두었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B.C.1054)에 아들 을나(乙那 : 37대)가 즉위하였다.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소련과 대련 형제를 군자로 섬긴 번한

삼년상 풍속의 기원

乙那薨 丁卯 子麻維讀立 薨 己巳 弟登那立

李克會 啓請建少連大連之廟 定行三年喪 從之 薨 戊戌 子奚壽立

壬寅 遣子勿韓 往九月山 助祭三聖廟 廟在常春朱家城子也

奚壽薨 己未 子勿韓立 薨 己卯 子奧門婁立 薨 丁卯 子婁沙立

戊寅 入覲天朝 與太子登面 少子登里 閑居別宮 乃獻歌太子兄弟 曰

兄隱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跛勿爲午

馬度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雁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

<해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B.C.1014)에 마휴(麻庥 : 38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1012)에 동생 등나(登那 : 39대)가 즉위했다. 이극회(李克會)가 말씀 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삼년상의 기원)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B.C.983)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에 제사 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의 주가(朱家-고주몽과 연관)의 성(고구려의 수도가 이곳에 생김)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B.C.942)에 아들 오문루(奧門婁 : 41대)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B.C.894) 아들 누사(婁斯 : 42대)가 즉위하더니 무인년(B.C.883)에 천자를 찾아뵙고는, 태자 등올(登屼)과 작은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이두법 노래)를 바쳤다.

兄隱伴多是 弟乙愛爲古(형은반다시제을애하고)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제는맛당희형을공경하을지니라)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라.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跛勿爲午(항상호모지사로서 골육지정을상피물하소)

항상 터럭 같은 작은 일로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마오.

馬度五希閭 同槽奚西食爲古 雁度亦一行乙作爲那尼(말도오희려동조해서식하고 안도역일행을작하나니)

말(馬)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이루나니,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내실예서비록환락하나 세언을량신청물하소서)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자잘한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2.삼한 전역에서 시행된 왕문의 사독법

사독법의 창시자 왕문

婁沙薨 乙未 子伊伐立

丙申 漢水人王文 作吏讀法以獻 天王嘉之 命三韓 如勅施行

<해설>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B.C.866)에 아들 이벌(伊伐 : 43대)이 즉위하였다. 병신년(B.C.865)에 한수(漢水-대릉하)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주周 격퇴擊退와 휸노匈奴의 조공

己未 遣上將高力合 與淮軍敗周 伊伐薨 辛酉 子阿勒立

丙寅 周二公 遣使獻方物 阿勒薨 己丑 子麻休立 一云麻沐 薨 丙辰 子多斗立

薨 己丑 子奈伊立 薨 己未 子次音立 薨 己巳 子不理立 薨 乙巳 子餘乙立

薨 甲戌 奄婁立 戊寅 匈奴 遣使番韓 求見天王 稱臣貢物而去

奄婁薨 子甘尉立 薨 戊申 子述理立 薨 戊午 子阿甲立

庚午 天王 遣使高維先 頒桓雄蚩尤檀君王儉三祖之像 以奉官家

<해설>

기미년(B.C.842)에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파견, 회(淮-패수)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당시 주나라 10대 여왕)를 무찔렀다. (敗周-폭군 여왕은 산서성으로 도망감)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B.C.840)에 아들 아륵(阿勒 : 44대)이 즉위했다. 병인년(B.C.835) 주나라의 이공(二公-주공과 소공 두 재상이 주나라를 다스림)이 사신을 보내와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B.C.836)에 아들 마휴(麻休 혹은 麻沐 : 4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B.C.785)에 아들 다두(多斗 : 46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축년(B.C.752)에 아들 나이(奈伊 : 47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B.C.722)에 아들 차음(次音 : 4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676)에 아들 불리(不理 : 49대)가 즉위했고, 그도 죽고 을사년(B.C.676?)에는 아들 여을(餘乙 : 50대)이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B.C.647)에 엄루(奄婁 : 51대)가 즉위했다. 

무인년(B.C.643),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甘尉 : 52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B.C.613)에 아들 술리(述理 : 53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B.C.603)에 아들 아갑(阿甲 : 54대)이 즉위하였다. 경오년(B.C.591)에 천왕은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3.노자는 풍이족 혈통

阿甲薨 癸酉 固台立 薨 丁亥 子蘇台爾立 薨 乙巳 子馬乾立

薨 丙辰 天韓立 薨 丙寅 子老勿立 薨 辛巳 子道乙立

<해설>

아갑이 죽고 계유년(B.C.618)에 고태(高台 : 55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蘇台爾 : 56대)가 즉위(B.C.574)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556)에 아들 마건(馬乾 : 57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B.C.545)에 천한(天韓 : 5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인년(B.C.535)에 아들 노물(老勿 : 59대)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B.C.520)에 아들 도을(道乙 : 60대)이 즉위했다. 


노자는 순수한 동이족 혈통-남방 문화권에 전수된 한 사상

癸未 魯人孔丘 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 西出關 由內蒙古而轉至阿踰豹 以化其民 道乙薨 丙申 子述休立 

薨 庚午 子沙良立 薨 戊子 子地韓立 薨 癸卯 子人韓立 薨 辛巳 子西蔚立

薨 丙午 子哥索立 薨 庚辰 子解仁立 一名山韓 是歲 爲刺客所害

<해설>

계미년(B.C.518)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복희씨 후손)의 사람이라, (후세에 제자 윤희 라는 사람이 노자의 도덕경을 씀)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阿踰佗-섬라(태국) 또는 서역(인도))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道乙)이 죽고 병신년(B.C.505)에 아들 술휴(述休 : 61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B.C.471)에 아들 사양(沙良 : 62대)이 즉위하였고, 사양이 죽고 무자년(B.C.453)에 지한(地韓 : 63대)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B.C.438)에 아들 인한(人韓 : 64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B.C.400)에 아들 서울(西蔚 : 65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B.C.375)에 아들 가색(哥索 : 6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解仁 : 67대)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4.칠십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

辛巳 子水韓立 壬午 燕倍道入寇 攻安寸忽 又入險瀆

須臾人箕代 以子弟五千人 來助戰事 於是 軍勢稍振

乃與眞番二韓之兵 夾擊大破之 又分遣偏師 將戰於機城之南 燕懼 遣使乃謝 以公子爲質

<해설>

신사년(B.C.340)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임오년(B.C.339)에 연나라가 사람의 도를 져버리고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번한의 수도)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하북성 창려현)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산동성으로  추측)의 사람 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韓)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연나라의 수도, 북경의 서남쪽)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번조선의 왕통 단절과 연의 강성

戊戌 水韓薨 無嗣 於是 箕代以命 代行軍令 燕遣使賀之

是歲 燕稱王 將來侵未果 箕代 亦承命正號 爲番朝鮮王 始居番汗城 以備不虞

<해설>

무술년(B.C.323년)에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箕詡 : 69대, 수유족)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5.기비箕丕의 도움으로 해모수(북부여시조)가 대권을 잡아 고조선을 계승繼承함

箕詡 薨 丙午 子箕煜立 薨 辛未 子箕釋立 是歲 命州郡 擧賢良 一時被選者 二百七十人 己卯

番韓親耕于郊 乙酉 燕遣使納貢 箕釋薨 庚戌 子箕潤立

薨 己巳 子箕丕立 初 箕丕 與宗室解慕漱 密有易璽之約 勤贊佐命

使解慕漱 能握大權者 惟箕丕其人也 箕丕薨 庚辰 子箕準立

丁未 爲流賊衛滿所誘敗 遂入海而不還

<해설>

기후箕詡(70대)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 : 71대)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B.C.290)에 아들 기석(箕釋 : 72대)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州)와 군(郡)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B.C.282)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箕潤 : 73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232)에 아들 기비(箕丕 : 74대)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箕丕)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대단군의 후세)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 은 생각컨대 기비(箕丕)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 : B.C.221-같은해 진시황이 통일한 해)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위만은 도적,강도, 무단침입자 이며, 잠시 침범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위만정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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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의 삼 단계 도읍시대 

1.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蘇台)(B.C.2333~1286:1048년간) 

2. 백악산 아사달(農安․長春) 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860년간) 

3.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188년간


자료출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1~6강 / 윤창열 교수 (대전대)

https://www.youtube.com/watch?v=b_XAPKFdt10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1강 한민족 최초의 국가 신시배달ㅣ안병우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9XXSqn4aO98

환단고기 원전강독/태백일사 신시본기 (4회차) | 안병우

https://www.youtube.com/watch?v=AivtcgsVvEc

다음까페 한류아카데미

https://m.cafe.daum.net/chunbooi/_rec 

가생이닷컴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200565&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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