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하얼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 이름.
자국의 영웅이나 가족의 비극을 초래했던 대쪽 같은 독립 의사.
‘안중근’의 개인적인 역사가 대가 김훈의 손 아래 예술로 재탄생했습니다.
이순신, 우륵 등 다수의 역사 소설을 집필했던 김훈 작가와 안중근의 조합이라니.
이미 두 키워드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차고 넘치는 소설 아닐까요?
그렇지만 제가 좀 홍대병이 있어서…
흥행된 직후에서 시간이 다소 지난 지금에야 책을 펼쳤습니다. 최근에는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관람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김훈의 다른 작품을 먼저 감상하려고 했는데, 요즘 시국이 시국이지 않습니까?
한국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최근에는 그것이 많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서열을 나누고 피아를 무시하며 무리를 지어 상대를 비난하는 데에 신물이 나서 애국심이 거의 동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안중근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 졌습니다.
끓는 피를 참지 못하고 내 나라의 하늘을 위해, 나아가 동양의 평화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 전부를 내건 영웅의 서사를.
소시민인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그의 이야기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객관적인 역사의 형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문학으로 적힌 바로 이 책으로 말이죠.
예상했던 대로 한국인 보편이 잘 알고 있는 역사에 철학과 서사와 생동감을 부여한 훌륭한 소설이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담담한 듯 비장미 넘치는 문체로 쓰여 더 의미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서술자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으며 단정적인 형용사로 문장을 끝내는 김훈의 문체는 단단하고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실제 사건에 철저하게 입각하는 역사 소설을 집필하기에 최적이며, 그가 소설에 쓰는 모든 문장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소설입니다. 안중근과 이토와 빌렘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 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유로운 현대에 사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추측할 뿐이죠.
그러나 김훈의 단정적인 어조와 힘 있는 문체 덕에 독자는 자연스레 그것조차 ‘실제’로 생각하게 되고, 작가는 객관적인 뼈대에 살을 붙여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 냅니다. 그리고 이는 독자에게 가닿아 독자는 더 이상 ‘역사’를 지난날의 기록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사건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평가를 내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 소설을 단지 고루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아닐까요?
현재에서 수없이 되살아나고 영향을 주는 과거는 우리의 미래에도 영향을 줄 테니 말이죠.
다음으로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을 이야기해 보자면, ‘다시점’을 꼽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중근의 시점에서 그의 활약상만을 늘어놓을 것 같지만『하얼빈』은 독특하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시점에서 소설을 시작합니다. 이후 '안중근'의 시점과 '이토'의 시점을 교차하며 사건을 전개합니다. 독자는 둘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긴장감을 높여갑니다.
두 시점이 끝이 아닙니다. 작가는 여기에 하나의 시점을 추가해 이야기를 다층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바로 '신부 빌렘'입니다. 안중근의 시점이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빌렘 신부를 만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안중근을 지켜본 빌렘은 그의 타고난 기질이 강하고 꼿꼿하여 세상을 못 견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끝내 그가 우라지(블라보스토크)로 간다고 했을 때 빌렘은 이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도마(안중근의 세례명)의 마음에 타오르는 잉걸불이 거친 대륙을 향하고, 이토를 불태우기 전까지 꺼지지 않으리라는 걸 말이죠.
하지만 살생을 거부하는 신부로서는 안중근의 행동을 지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무찌른 자리에는 악만이 남을 테니 말이죠. 이토를 죽인다 한들 조선의 처지가 판이하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요. 그렇지만 빌렘은 안중근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운명에 가까운 사명을 가지고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안중근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철인입니다. 그에게 나약함, 불안,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우고, 자신보다 국가를 위한 선택을 합니다.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차갑고 비릿한 쇠 냄새가 납니다. 총을 제 몸처럼 다루던 사내기 때문인가,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고 맹목적인 의지에 숨이 막힙니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습니다.
반면 안중근과 영원히 함께 불릴 그 이름, '이토'의 입장은 어떨까요. 그 역시 철인입니다. 통감 이토는 조선을 일본 제국 안으로 순입해 동양의 평화를 이루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지의 유신을 받들어 쇠로 된 철로로 길을 펼치고 위기에 처한 조선에 문명을 전파하리라는.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일을 해내는 유능한 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안중근. 그가 아니었으면 이토를 막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철길을 타고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질주하는 일본의 개화를 멈추려면 똑같이 쇠처럼 강인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우리나라에 이토록 강건한 자가 있었습니다.
이토의 시선에서는 조선의 개화가, 안중근의 시선에서는 이토를 멈추겠다는 의지가, 빌렘의 시선에서는 가엽고 뜨거운 안중근의 영혼이 보입니다.
셋은 뒤섞여 선과 악을 넘나듭니다. 이미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긴장하고, 기대하고, 마침내 가슴에 뜨거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를 쏘며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 이토의 장례가 치러지는 과정과 안중근의 사형 집행 직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보여줍니다.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은 헌병대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검찰관 미조부치는 안중근을 신문하며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내 이야기를 넌저시 흘려도, 아이 사진을 들이밀어도, 이토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 해도, 그는 끄떡없이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알려져서는 곤란한 정치적인 동기를 장대하게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입니다. 이토는 안중근을 생각할 겨를 없이 죽어 그가 죽은 이유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조선을 일본의 일부가 되게 할지에 대한 것뿐이었죠. 반면 신문에서 이루어지는 검찰관과 안중근의 대립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안중근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행위와 결과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미조부치의 질문들은 길을 잃고 허물어집니다.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는 안중근 앞에서 그들은 당당할 수 없습니다.
이토의 죽음에 황태자 이은은 상심했고, 24개의 훈장과 함께 이토의 영결식은 성대하게도 치러졌습니다.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독경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가 금빛 십자가를 들고 입장했으며, 같은 날 서울의 황실, 내각, 민간인들이 관민 추도회를 열어 그의 위패에 절했습니다.
안중근은 빌렘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3월 26일 부활 성야를 맞는 날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언으로 시체를 하얼빈에 묻어달라 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나열했을 뿐인데 울컥하는 마음은 저뿐일까요. 안중근은 단순 감정적인 이유로, 살생을 목적으로 이토를 해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토의 작용'을 멈추어 조선이 독립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고, 신앙에는 국경이 없었지만 땅에는 국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백성이었죠.
우리는 종종 '자유', 혹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행복'과 혼동합니다. 꼭 자유로워만 행복할까요? 우리 품에 안긴 반려 동물들은 자유롭지는 않으나 행복하지 않을까요? 최소한의 경제 수준도 갖추지 못한다면 허울뿐인 자유가, 투표권이 다 무슨 의미렵니까.
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자유'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볼까요? 정말 주권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초인이 우리나라에 등장한다면, 청렴하고 유능하며 권력을 잡아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런 자가 왕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홉스가 주장했던 강력한 통치자의 개념에 대해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국가의 존망을 맡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을 찾기는 너무나 어려울뿐더러, 통치를 맡겼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은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합니다. 자유 자체는 목적이 아닐지 몰라도, 행복의 필요 조건으로써 필요한 셈이죠. 일본에게 조선이 순입되었다면 그들이 우리를 사려 깊게 돌보았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자원과 인력이 약탈당하고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형장의 이슬로 스러진 독립 열사와 의사 분들은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더 큰 화를 피하기 위해 독립을 간곡히 주장하신 것입니다.
이후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았기 때문입니다. 타국의 속국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자신이 먹고살기 바쁜데 타국민을 도와줄 여유가 있을리가요.
자유는 자신이 존중받을 권리, 타인을 존중할 책임을 부여하는 가치입니다. 여러분도 남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기 바랍니다. 도망쳐 달아난 곳에 천국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았던 안중근의 영웅적인 면모는 우리에게 현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바람 앞의 등불인 우리나라는 다시 안중근과 같은 철인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이 목숨을 건 한 명의 영웅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유롭고 이성적인 판단 하나하나가 모인다면 쓰러지는 나라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일 테니 말이죠. 언론으로부터, 타인의 말로부터, 편파적인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선열들이 몸 바쳐 얻어낸 자유 속에서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봅시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236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으나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의 강론에서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p 283
덧 1,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를 준비했던 우덕순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네요. 이 인물 역시 범인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결정을 하기 때문이죠. 그는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의 장남인 안중근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인물입니다. 빈곤층에 불과한다고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뜻을 같이하여 함께 사진을 찍고 채가구를 지킵니다. (이토의 동선이 변경될 경우를 대비하여) 우덕순 역시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근심도 두려움도 없이 순수하게 이토를 쏘아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이를 다짐합니다. 국가가 그에게 해준 게 무엇이 있나 되짚어 보아도, 답은 없습니다.
덧 2, 소설 뒤편에 있는 후기와 주석은 소설 이후의 이야기,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부가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의견들이 대립됩니다. 뭐. 글쎄요, 저는 저에게 그들에 대해서 정죄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모습이 저와 훨씬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 의사의 항쟁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이죠. 소설은, 그리고 역사는 그가 얼마나 개인적인 욕망에서 멀어졌었는지를 보여주며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어떠함을 초월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다수의 사람이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감히 추측해 봅니다.
덧 3, 두 번째 인용문에 명시하였듯이 안중근의 거사는 80년 동안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하였지만 1993년 년 안중근 추모 미사가 진행되며 정당방위로 인정됩니다. 제가 가장 울컥했던 부분입니다. 도마 안중근의 대의와 사명이 늦게나마 인정되어 다행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