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셈 싱의『더 폴』
내 영혼을 구해주려는 거니?
한 젊은 남성이 병원 침대에 누워 어린아이에게 성채를 받으며 말합니다.
여자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그 옆에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라기에는 다소 어색해 보이고, 오빠라기에는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무슨 관계일까요?
마법 같은 이야기로 조각난 마음을 보듬는 다정한 영화
오늘 소개해 드릴 영화의 제목은『더 폴』입니다.
우리가 즐기는 대중 예술은 매체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영상', '그림', '글'이 있습니다.
영상은 현대인이 가장 즐기는 것으로, 실제 인물과 장소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수천 장의 그림을 이어 붙여 움직이는 것처럼 만드는 '애니메이션'등의 장르가 영상을 매체로 삼는 예술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그림 매체를 활용한 예술로는 만화나 웹툰 같은 것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글'을 매개 삼는 예술에는 '소설'과 '시'가 있습니다. 이렇듯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예술을 표현하는지에 따라 독자에게 와닿는 감상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더 폴』은 영화가 아니라 소설로 발간되었더라면 절대 영화만큼의 감동을 성취하지 못했을 대표적인 영화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우선 많은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이 작품의 특출 난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영상미'입니다. 전 세계 18개국 26개의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고, CG처리 하나 없이 폭발 장면,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이 나는 장면들을 연출하였다는 점에서도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영상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이를 돋보이게 하는 영화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 영화는 여타 소설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는 '액자식' 구성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소설에서는 많이 사용되는 전개 방식이지만 영화에서는 실제 사건의 전개에 시청자들이 집중하는 면이 있다 보니 거의 사용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자칫하면 정신이 없어지고 외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액자식 구성'은 외부 이야기인 '외화'와 외부에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내부 이야기인 '내화'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대개 외화를 들려주는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짤막한 '내화'를 들려주고 그것이 끝나면 외화의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위의 보셨던 두 인물은 '외화'에 있는 인물들로, '내화'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들이 만들어 나가는 '내부 이야기'는 한계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로이의 상상 속에서 나온 이야기니까요. 상상은 무한의 경계를 따라 가없이 뻗어나갑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능력이든 취할 수 있으며, 누구든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허구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엄청난 영상미를 자랑하는 장면들을 일말의 제약 없이 선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현실적이며 기이하고 아름다울수록 꿈의 환상은 환상다워집니다. 다채로운 색감과 강렬한 빛, 광활한 자연들을 배경으로 웅장한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내화'는 관객들에게 극한의 시각적인 쾌락을 제공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에 나오는 배경 중 어느 것도 허상으로 만들어낸 것이 없다는 점이죠. 허구의 서사시가 전개되는 배경이 모두 지상에 존재한다니. 감독의 탁월한 심미안에 감탄할 뿐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배경에서 전개되는 서사시의 이야기에 대해 말해볼까요. 우선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첫 번째 사진에 나왔던 어린아이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편의상 렉시라고 부르겠습니다.), 젊은 남성의 이름은 '로이'입니다. 둘은 병원에서 만납니다. 렉시는 오렌지를 따다 떨어져 팔이 다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로이 또한 스턴트맨 역할을 하다가 다리 위에서 떨어져 척추가 다치고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로이는 이야기로 렉시를 유혹해 모르핀을 가져오게 하려 합니다.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스턴트맨에게 누가 더 이상 일을 맡기려 할까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로이의 전처도 떠나간 듯합니다. 이 시점에서 렉시를 꾀어내기 위해 로이가 지어낸 내화의 서사시,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 시작됩니다.
내화는 전형적인 '영웅과 모험'의 서사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서사시는 절대 악으로 표상되는 '오디어스 총독'에 의해 추방된 5명의 영웅이 복수를 위해 힘을 합치며 시작됩니다. 그중에서도 '블랙 밴디트'라는 인물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들을 이끌죠. 악당을 무찌르러 가는 과정에서 영웅들은 가족을 잃고, 조력자를 만나 합류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구출하고, 결혼식을 올리지만 배신당하고, 마침내 최종장으로 향합니다.
로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까요? 해피엔딩일까요, 세드엔딩일까요?
그전에 이 영화가 '영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가질 수 있었던 예술적인 특성 두 번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띄고 있으며, 외화와 내화를 번갈아가며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구성을 채택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로이가 지어내어 들려주는 것이지만 화면은 렉시의 '상상'을 보여줍니다. 5살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실존 인물을 이야기로 끌어들입니다. 분명 허구적인 영웅들이지만 렉시가 현실에서 만난 사람의 모습을 갖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렉시는 '블랙 밴디트'라는 주인공의 모습에 '아빠'의 모습을 넣어 상상합니다. 사실 렉시는 자신의 아버지를 폭도들에 의해 잃었습니다. 과수원을 하고 있던 렉시의 집은 다 타버리고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 렉시를 위해 로이는 아버지를 '블랙 밴디트'에 넣어 상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렉시는 이를 거부하고, 주인공을 눈앞에 있는 '로이'로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로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내용이 소설로 전개되었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화면을 통해 같은 배우가 '로이'와 '블랙 밴디트'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자연스레 로이를 영웅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는 상상하는 렉시와 창조하는 로이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이제 이들은 이야기에 자신의 서사를 투영합니다.
그렇기에 로이는 전형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그릴 수 없습니다. 삶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현실이 버젓이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렉시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렉시는 로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흐름과 이야기를 바꾸기도 하고, 스크린이 렉시의 상상을 보여주기에 렉시와 연관된 소재도 여럿 등장하며, 종내는 본인이 등장해 구원자를 자칭합니다.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의 시선은 따뜻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며 이야기의 끝에서 영웅은 환하게 웃어야 합니다. 추락한 로이에게도 그럴 날이 올까요?
영화의 제목에도 나온 '추락'은 영화 전체에서 굉장히 많은 순간에 등장합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는 장면부터 로이와 렉시가 병원에 있는 이유, 영웅 중 한 명이 죽는 장면, 렉시가 또다시 다치는 장면 등 많은 부분에서 나오는 모티프이죠.
로이의 배역을 한 번 떠올려 볼까요? 다치기 전의 로이는 위험한 일들을 도맡았던 스턴트맨이었죠. '추락'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추락하는 자'가 단 한 번의 '추락'으로 인해 더 이상 '추락'하지 못했을 때 비로소 그의 삶의 '추락'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네요. 그 절망 가운데서 똑같이 '추락'한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편지의 '추락' 덕분이었고요.
내화 안에서 영웅들은 절대악의 '오디어스'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어딘가를 올라갑니다.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그를 만난 '블랙 밴디트', 아니 '로이'는 렉시의 애정에 못 이겨 비로소 악당을 극복하고 그가 나온 영화를 감상하며 '추락'을 직시합니다.
이 영화는 추락한 자들의 욕망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살기 위해 이야기했던 세헤라제드와 반대로 죽기 위해 이야기하는 로이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씁쓸하고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그의 불행은 영화가 발전하기 위해 빚져야만 했던 것이죠.
'오디어스'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한 상황들, 추락, 어쩌면 '삶'그 자체입니다. 이상과 환상에는 한계가 없지만 우리의 삶에는 절대 타파할 수 없는 벽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많은 문들은 우리를 향해 닫혀 있고, '추락'의 순간들은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잔인한 현실에 허구적인 상상이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나의 불행과 대조되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왜 우리의 선조들이 팍팍한 생활 속에서 영웅 소설을 쓰고 읽으며 울고 웃었을까요. 어차피 다 허구일 뿐인데요. 현실에는 어떠한 마법도, 비현실적 능력도, 영웅을 구원하는 다정한 신도 없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야기는 그러한 삶을 품에 안습니다. 서사는 우리의 욕망을 풀어냅니다. 주인공과 함께 고뇌하고, 기대하고, 사랑하고, 추락하고, 추락 속에서 희미한 빛을 찾아냅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독자의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미적인 즐거움은 추락한 인간을 구원하거나, 어쩌면 '추락'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부여합니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타인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욱 의미가 크겠지요. 죽어있던 허구의 이야기는 렉시와 로이를 통해 숨을 토해내고 되살아나 현실에 영향을 끼칩니다. 렉시가 과연 로이를 구원했을까요?
분명한 건 렉시와 로이의 이야기가 로이의 분신인 '블랙 반디트'를 구원했다는 것이겠네요. 되짚어 생각하면 '추락'은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사를 창출하고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며 다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 되니까요. 로이가 스턴트맨으로서 수십 번 뛰어내릴 때, 그는 분명 빛났을 것입니다. 렉시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