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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나의 나머지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by 책 읽는 쿼카

책상은 책상이다


made by CHAT GPT


A는 A이다. 동어 반복은 언제나 진실인 명제죠. 지식의 확장을 부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으나 같은 정보를 같다고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명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고 쓸데없는 서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왜 이런 제목을 지은 것일까요?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없나요? 왜 우리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를까요. 안경을 안경이라고,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신 적이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껍질이 있는 몸통에 잎과 가지가 달린 큰 식물을 나무라고 부르기로 ‘약속’하였기에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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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어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회가 공통으로 정한 약속을 배우는 것이 바로 언어를 배우는 것이고,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실제 사물을 가리키며 몸짓으로 대화해야 하기에 굉장히 비효율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동물들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죠.


하지만 약속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 같이 다른 단어를 사용하기로 약속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프린들 주세요 원서 표지


어렸을 때 다들 한 번씩을 읽었던 책일 것 같은데, 혹시 ‘프린들 주세요’라는 책을 기억하시나요? 이 책에서 무료한 학생이었던 주인공은 어느 날 ‘만년필’을 새로운 단어인 ‘프린들’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해 소통에 오류를 겪었지만 주인공이 계속해서 ‘프린들’이라는 단어로 만년필을 지칭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만년필’이라는 단어 대신에 프린들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언어에 ‘공공성’이 부여되어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가 사회적으로 생성된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은 사회적인 언어는 사회 전반의 인식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것과 그렇기에 과감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을 시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 전반에 새로운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 대신 본인이 속한 집단의 결속을 다지고 타집단을 배척하려는 의도로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MZ세대의 신조어나 은어가 그렇죠. 법조인, 의학계 등과 같은 전문집단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요. 다시 말하면 공의성을 특정 집단에게 선택적으로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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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범위를 좀 더 좁혀서, 개인을 위한 언어는 어떨까요? 우리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사고’를 할 때도 언어를 사용하죠. 일기나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고요. 이럴 때 개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요?


만약 ‘프린들 주세요’ 책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이 단어를 말하지 않고 본인 혼자서만 사용한다면 아무도 주인공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지만 스스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편선에 나온 주인공 역시 늘 똑같은 일상에 질려 자신만의 언어로 공용의 단어를 바꾸어 사용합니다. 모든 사물을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책상’은 ‘양탄자’로, ‘침대’는 ‘사진’이라고, ‘의자’는 ‘시계’라고... 이렇게 바꾸어 스스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책상은 책상이다 책 일러스트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너무 우스웠습니다. 본인의 사진을 다른 사람은 ‘침대’라고, 그의 시계를 다른 사람들은 의자라고 부르니까 그가 파악한 의미와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들리기에는 터무니 없었겠죠.


그러나 그는 점점 자신만의 언어만을 사용하며 타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소통이 불가한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것이죠.


책상은 책상이다 책 일러스트


책의 제목을 다시 상기해 볼까요? 사실 ‘책상’은 ‘책상’이다. 라는 문장의 두 ‘책상’이라는 단어(기표)는 다른 의미(기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전자는 실제 ‘물건’을 가리키고 후자는 ‘책상 이라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기의와 유리된 기표는 공허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의 기표는 자신만의 기의를 가져, 그의 기의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의사소통의 부재에 휩싸인 특이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편집증 환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죠. 사회적 동물인 우리 대다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타인에게 보이는 부분만 존재하나요? 타인이 모르는 여러분의 나머지, 여러분 자신도 모르는 여러분의 나머지가 있지 않나요?


우리 각자는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자신의 일부분을 모두 일정 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 인터넷 사회를 살펴보면 우리는 거의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비난하고 배척하고 본인이 속한 집단과 타인의 집단 사이에 선을 가르기 바쁘죠. 소통의 좌절을 예감하고 이제 소통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을 타인과 함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외롭고, 고독한 순간들을 많이 마주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쓸쓸하고 공허하며 불안함을 느낍니다.


made by CHAT GPT


그렇지만 혼자서만 해야하는 것, 성취할 수 있는 것, 사유하여 밝혀내고 명확히 할 수 있는 것들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아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고독을 겪어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깊은 사유에 빠져야만 개인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죠.


같은 맥락으로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이때의 고독은 쓸쓸하지 않죠. 치열하고 열렬합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저항 정신이 보이는 시를 좋아해 이 시도 마음에 듭니다. 전문을 감상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작품을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마지막 작품에 등장하는 작품인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주인공은 정말 말 그대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숨만 쉬어도 정보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날씨가 어떤지, 스위치 불을 어떻게 켜는지,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 일러스트


그래서 무언가를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더는 삶에 바라는 것이 없고 새로운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기에 알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아내가 말한 “당신은 ‘좋은 날씨’를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잖아요.”라는 말에 꽂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죠. 중국어를 마스터 하자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이 명확해야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싶은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다른 학문들을 하나 둘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by naver


그러다 다시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어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끝’을 원합니다.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원하지 않고 삶에 기대할만한 것도 없기에 어쩌면 이대로 삶이 끝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면 죽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삶을 끝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도리어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by naver


철학은 위대한 사상이나 학문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끝을 생각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도 알지 못했던 본인의 모습을 알 수 있을지 모릅니다.


책상은 책상이다 표지


이 책은 중고등학교 추천 도서일 정도로 가독성이 좋고 메시지도 비교적 명료합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독자의 경험에 비추어 사유는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고 다양한 해석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왜 작가가 소외된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해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기이한 점을 부각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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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마치고 차차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비춤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과 결핍의 근원을 추론하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그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 자신의 경험과 연관짓는 것이 작가의 목적이라 생각하면 꽤나 다정합니다.


책장을 넘기며 여러분 마음 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골방을 발견하고, 그곳을 닦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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