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오늘 저는 우리에게 '모비딕', 혹은 '백경'으로 잘 알려진 작가인 허먼 멜빌의 유명한 단편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아직도 모비딕의 첫 문장을 읽었을 때의 소름이 생생합니다.
call me Ismael.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여담이지만 저는 이 문장을 보고 영어 이름을 이슈마엘에서 따온 사미엘라로 지었습니다. 이슈마엘은 성경에 등장한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 추방된 떠돌이로 살아가는 인물로, 첫 문장을 읽은 독자들은 화자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을 형성하고 친근감을 느낍니다.
추방당한 자 이슈마엘은 고래와 맞서 싸우는 선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서사에는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인간 불굴의 의지와 저항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허먼 멜빌이라는 작가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의 본성과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결핍이 있고 존재의 위기를 겪습니다. 패배할지언정 수긍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해석들과 논쟁을 낳은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여운 바틀비의 일생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까요? 우리는 그의 난해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선 기본적인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 볼까요?
필경사 바틀비는 1인칭 화자를 취합니다. 화자는 월 스트리트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담보 대출, 부동산 소유권 이전과 같은 안전하고 위험성이 없는 업무들을 다루는 유능하고 나이 지긋한 변호사입니다. 작가는 이 화자의 시점을 사용하여 자신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게 된 '바틀비'라는 인물에 대해 서술합니다. 화자의 시선도 바틀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안전한 업무들만 다루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이며, 그는 자본의 중심인 '월 스트리트가'에 너무나 잘 적응한 사람입니다. 그는 두 명의 직원과 한 명의 사환을 두고 일손이 부족하여 필경사(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한 명을 더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틀비였습니다.
첫인상의 그는 창백하게 단정하고, 애처롭게 정중하며, 도리 없이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그는 엄청난 양의 필사를 해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바틀비는 화자의 말에 대해 놀라운 한 마디를 했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을 기점으로 바틀비는 극도로 일관적이게 반항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심부름을 무시하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그의 주된 업무인 필사조차 거부합니다. 안달이 난 화자가 그에 대한 가벼운 정보를 캐물어도 오직 위의 단 한마디만을 말하며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막다른 벽이 있는 창밖을 내다보거나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죠.
화자는 난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난감하고 골치 아픈 정도였으며 어느 정도의 연민도 있었지만 도가 지나치니 연민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원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기생충처럼 붙어있었거든요. 당장 경찰을 불러 쫓아내고 싶지만 화자의 명예를 생각해서도, 도의적으로도 그것은 옳지 못한 일 같았습니다.
결국 화자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떨어져 나오는 편을 택합니다. 바로 그의 사무실을 옮기는 이사를 하는 것이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꼴의 대처이지만 부드러운 그의 성격상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화자가 떠나고 나서도 사무실 터에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떠나지 않는 그에게 화자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까지 하지만 여전히 바틀비는 '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화가 난 새로운 세입자들에 의해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틀비를 면회하러 감옥에 간 화자는 그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의 눈을 감겨줍니다. 그리고 몇 마디의 속편을 덧붙이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 '속편'에는 바틀비의 죽음 이후 화자가 듣게 된 소문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소문에 따르면 바틀비는 원래 워싱턴 소재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정리 해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해고가 되어 상심이 컸나 보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화자는 이를 듣고 엄청난 감정들에 휩싸입니다.
그는 바틀비가 끊임없이 죽은 편지들을 처리하고 정리하며 원래도 예민한 그의 기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하였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소리칩니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p 108
줄거리를 나열했을 뿐인데 석연찮은 부분이 즐비합니다. 차례대로 같이 살펴보도록 하죠.
소설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는 바틀비가 왜 계속해서 자신이 할당받은 일을 ‘거부’하는가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는 어째서 스스로 일을 하러 들어와 놓고 모든 일을 거부하는 강도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는 반항심 때문에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비전이 있어서 자신의 상사에게 도전하듯 선포하는 것 또한 아니지요. 그저 그는 완벽하게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며 다시금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요.
하지만 소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는 바틀비를 대하는 화자의 태도입니다.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목각 인형 같은 바틀비를 당장 내쫓아도 모자랄 텐데 그는 굉장히 유약한 대처를 이어갑니다. 바틀비의 무엇이 그런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을까요? 바틀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작가는 이 기이한 일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요?
소설의 특성상 지금까지 매우 다양한 관점과 평론가들의 해석이 존재해 왔습니다. 저는 여러 해석을 읽고 제 생각과 부합하는 부분을 마음대로 취합해 저만의 결론을 내렸으니 개인의 해석일 뿐이라는 점을 미리 알립니다.
이 소설의 첫 번째 쟁점은 '화자'를 주인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화자의 밑에서 일하는 '필경사 바틀비'를 주인공으로 볼 것인지부터 시작됩니다. 제목이 가리키듯 바틀비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려 애쓸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 바틀비는 너무나 미궁에 싸인 존재입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고, 속편에 나온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의 어떠한 과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마저도 소문에 의한 것이기에 신뢰할 수 없죠.
그렇기에 우리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바틀비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을 감상해야 합니다. 그 이외에 답은 없으니까요.
화자는 바틀비와 다른 고용인(터키, 니퍼, 진저 넛)을 유용성에 따라 판단하고 때로는 도구처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전형적인 월스트리트 자본가의 모습이죠. 바틀비가 거부를 선언하자 그는 화자에게 필요와 유용성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명예를 위해 바틀비를 용인합니다.
이후 화자는 바틀비가 자신의 사무실에 몰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연민을 느낍니다. 이 연민은 한 걸음 나아가 '같은 인간으로서의 유대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연민과 유대는 '사업상의 무쓸모'를 이길 수 없었고 그는 바틀비에게 나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여전히 그는 나가지 않았고 화자는 살인 충동마저 들게 하는 분노를 느끼지만 '신앙심'을 상기하며 내면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 중 하나가 바틀비를 구원하기 위해 사무실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믿었죠. 하지만 화자는 그 마음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명예의 위기에 직면한 그는 사무실을 이사합니다.
이사하고 나서도 그는 이상하게 바틀비가 마음에 걸립니다. '본인의 집으로 가지 않겠냐'는 부탁을 할 정도로 말이죠. 그의 집은 '사무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공간일 것입니다. 감옥에 간 바틀비를 위해 그가 알지 못할 선의를 베풀기도 하나 그러한 그에게 위조범과 알고 지낸 적이 없냐고 묻는 교도소 급식 담당자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선의를 위조한 듯한 화자를 비꼬는 말은 아닐까요?
정리해 보면 화자는 바틀비를 고용한 '고용주'로서 쓸모를 판단하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바틀비를 대하며, '기독교인'으로서 품에 안는가 하면, '자선가'로서 자신의 명예를 높여줄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도 하고, 미약하나마 '연민과 유대'를 느끼는 순간도 있습니다. 언듯 보기에도 마지막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마르크스주의식 해석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화자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가 '자본가'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가 있는 월가의 사무실 역시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 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죠. 화자는 푸코가 묘사하는 '규율사회'에서 살아가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잘 알고 첨예하고 구분하여 완벽히 적응한 인물입니다.
바틀비는 그가 '해야 할 것'에 비록 수동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반항합니다. 규율사회에 반하는 인물, 자신과 대립되는 표상을 만난 화자는 당황스럽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그를 바틀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 그는 '자신'을 바틀비에게서 떼어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틀비가 화자의 일부, 화자의 어떠함을 나타낸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며 모질게 내치지 못하고 희미한 동질성을 느끼는 이유는 화자 그 자신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어서 소설의 결말 부분과 관련하여 바틀비를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약에서 말했듯이, 화자는 '소문'을 듣고 바틀비가 가졌을 감정들과 처지를 추측합니다. 바틀비에 대한 유일한 정보나 마찬가지인데 이 역시도 소문이고, 화자에 의해 매개된 정보이기에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소문에서 바틀비는 '배달 불능 우편물', 즉 '사서(死書)'를 다루는 역할을 맡았다는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앞선 질문을 다시 되짚어 봅시다. 화자는 이 정보에 왜 애달프도록 강한 감정을 드러냈을까요? 작가는 왜 굳이 '사서'라는 소재를 사용하였을까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나 저는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사서'는 바로 '바틀비'입니다. 그 죽은 우편물은 바로 '화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편물의 내용은 규율사회가 발전하며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귀하게 여겨졌던 관계성, 사랑, 슬픔, 연대와 같은 가치들을 포괄한 모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에게 전달된 편지인 바틀비가 그에게 전달되거나 납득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영원히 화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태워질 것이기에. 고귀한 가치들을 잃어버린 이 사회에 희망은 없기에. 변증법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종합은 없습니다.
저는 바틀비가 불복종을 통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가이거나 절대적인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너무 약하고 수동적이며 가엾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고, 땅의 왕들과 조언자들과 함께 누워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소설이 이렇게나 논쟁적인 해석들을 많이 창조해 낼 수 있다는데 놀라울 따름입니다. 모든 해석에는 타당한 부분이 있고, 필경사 바틀비는 수없이 많은 텍스트들 사이에서 몇 번이고 되살아납니다. 그렇지만 어떤 해석이든 '원문'에 기반하여야 의미가 있습니다. 원문과 멀어진 재해석은 더 이상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독서를 마친 직후 저는 바틀비에 대한 깊은 의문과 함께 변호사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거울에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저에게 닿지 못한 편지가 몇 통이나 불에 타서 바틀비 곁을 지켰을까요. 알지 못하고 다만 섬찟할 따름입니다.
덧 1, 해석의 많은 부분을 여러 참고 문헌들에서 따왔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특히 연관이 있는 줄 모르고 집었던 책인 한병철의 '피로 사회'라는 책에서 저와 의견이 일치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보물을 찾은 듯 기뻤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현대 사회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져,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덧 2, 서평의 결말부에서 이야기했듯, 저는 독서를 마치고 도저히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서평들을 찾아 읽으며 바틀비가 너무 가엽고 불쌍했다는 서평도 발견하였으나 그 또한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틀비'를 이해하려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러한 '바틀비'를 대하는 변호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변호사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바틀비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변호사와 대립항을 이루어야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죠. 바틀비가 이미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던 것도,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사무실의 주인 행세를 했던 까닭도 모두 그가 화자가 잃어버린 자아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아 인류여 ! 우리의 바틀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땅의 왕들과 조언자들, 자신을 위해 폐허를 재건한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을.
욥기 3장 14절
참고 문헌
허번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전유로서의 자선 서사- 구승본. 2020.
바틀비, 배달불능 편지- 이광진. 2015.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월가의 이야기에 나타난 바틀비의 저항 대상 연구- 이광진. 2015.
피로 사회- 한병철.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