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ayyj 소설
프롤로그
지각(20년 여름)
가늘게 뜬 실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 나는 본능적으로 지각임을 직감했다. 너무나도 맑은 정신에 불안한 나머지 어디엔가 있을 신에게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제발... 제발 아니어라...’
아까보다 조금 더 가늘게 눈을 뜨고 본 핸드폰은 당연하다는 듯 내가 지각임을 알리고 있었다.
‘하... 망할.’
“이재 오빠! 나 왜 안 깨웠어?”
온전히 내 잘못됨을 알면서도 밀려오는 짜증은 스스로를 막을 새도 없이 오빠를 향했다.
“왜? 어디가?”
“나 개강이잖아 오늘.”
어제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을 주워 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몰랐어 아무 말 없길래...”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은 없다. 다시 한번 내 탓임을 인지한 나는, 격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대충 입고 거실로 나와 커피나 타고 있는 오빠를 보니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금방 준비했네? 이거 마시고 가.”
지금 몇 시인데 속 좋은 소리를 하느냐,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냐, 왜 이렇게 무심한 거냐 등등. 내 기분을 대변하는 말들이 속사포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밀어 넣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해질 때 즈음. 커피 냄새가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평범한 커피 냄새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내 코를 헤집어놓았고, 난 속으로 코는 기분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창은 내 기분도 들쑤셔 놓았으니 말이다.
“이 더운 날에 무슨 뜨거운 커피를 아침부터 준비했어. 아 몰라 나 다녀올게.”
더 있다간 정말로 화를 낼 것만 같아 거의 다 내려진 커피 향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찝찝한 기분에 휩싸였다. 커피를 준비하다가 봉변을 당하고 벙 쪄있을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사과하고 기분을 풀어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각에, 땀은 나기 시작했고, 버스는 꽉 차있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오빠의 기분을 생각하는 게 사실은 귀찮다.
‘이게 권태기라는 건가?’
버스 정류장으로 서둘러 발을 옮기며 서로에게 무감각해진 게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이 사람이 곁에 없는 건 상상은 안 되지만 설렘 없는 만남이 약간은 지겹다. 항상 똑같고 항상 편안하다. 편안한 건 분명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상대방이 편해진 순간 ‘편안함’만 있다. 편안하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이고,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익숙함이 결코 좋은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권태기 따위 나는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남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엉망진창이다. 마치 내 기분처럼.
첫 만남(18년 여름)
“야... 사람한테는 각도를 잘 맞춰서 찔러야 들어간다니까?”
손 끝에 느껴지는 차갑고 묵직한 느낌 때문에 나는 이것에 푹 빠져버렸다.
“알겠어. 다시 해볼게. 잘 안되네...”
“그래! 그렇게 찔러야 다리가 길어 보이잖아.”
혜림이는 항상 이상한 말들로 사진 찍는 법을 알려준다. DSLR을 산 이상 사진에 대한 태도는 진지해야 한다나. 그저 동아리 친구인 내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처음에는 말투 때문에 식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는 으슥한 골목에서 사진 연습을 하는데, 자꾸 찔러라. 들어갔다. 이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근처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던 일도 있었다. 나중에 조금 친해지고 나서 물어봤더니 ‘찌르다.’는 ‘셔터를 누르다. 사진을 찍다.’이고, ‘들어갔다.’는 ‘좋은 사진이 나왔다.’ 라던가. 본인만의 비속어가 남들에겐 살벌하게 보인다는 것은 신경을 전혀 안 쓰는 듯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알려줄게.”
“그래 오늘도 고마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홱 하고 가버렸다.
‘혜림이는 참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혼자 더 찍어봐야지.’
오늘의 피사체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중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있는 한 사람이 내 시선을 끌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길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 고양이도 그가 좋았는지 손에 얼굴을 갖다 대며 비비적거리고 있다. 저 모습이 귀여워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양이를 만지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앞에서 보니까 은근히 잘 생겼네...’
생각보다 훈훈한 외모에 넋 놓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너무 오래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미처 다 들기도 전에 당황스러워하며 얼굴이 빨개진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인지 홍시인지 점점 익어가는 얼굴이 이제는 곧 터질 것만 같다.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길을 물어보는 척이라도 할까? 아니면 시선을 피해야 하나?
내가 고민하는 동안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골목 깊숙이 도망치듯 가버렸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아있었다.
‘아하하... 괜히 미안해지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든 죄책감을 뒤로한 채 오늘은 고양이라도 찍기로 마음먹었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자 야속한 고양이는 내가 절반도 채 가기도 전에 저만치 더 도망간다. 아까는 그렇게 애교가 많더니 나에게서 멀어지는 고양이가 얄미워져 쓸데없는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내가 쟤 잡고 만다.’
고양이는 이런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여유롭게 털을 정리 하며 비웃는듯했다.
‘집사 놈 귀찮게 군다 냥’이라고 하는 것 같달까.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히 고양이를 따라가면 저만치 멀리 도망가고, 다시 천천히 다가가 카메라를 들면 잽싸게 나를 피한다. 저 녀석의 콧대를 꺾어놓고 싶은 마음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고양이는 귀찮다는 듯이 순식간에 벽을 타고 올라가 배를 깔고 엎드렸다.
‘헤헤 너도 힘들지?’
이 추격전의 결실을 위해 사진의 구도를 잡기 시작했는데 고양이가 올라간 간판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Cafe... Now?’
새하얀 바탕에 세련되어 보이고 싶었는지 필기체로 쓰인 간판과 잿빛 벽을 분위기 있게 넝쿨이 둘러싼 카페였다.
‘인테리어는 잘해놓고 가게 이름은 저게 뭐야 허접해.’
속으로 사장님의 작명 센스를 신명 나게 비웃었다. 허접해서 웃긴 이름 때문일까, 고양이가 길을 안내해준 것 같은 오묘한 기분 때문일까. 어느새 내 발은 카페로 향했고, 문을 열자 느껴지는 산뜻한 커피 향이 나를 반겨주었다.
두 번째 만남
오늘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가장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커피를 준비할 때 맡는 여유로운 향과 혀를 감싸는 씁쓸한 맛은 나만의 소소한 행복이다.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고집하는 나만의 철학이랄까.
“지 이이이 잉”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마음속으로 이어지던 아무 말 대잔치가 커피가 나왔음을 알리는 고철덩어리로 인해서 와장창 끝나버렸다. 커피를 받아와 한쪽 눈을 감고 카메라를 눈 가까이 가져다 댔다. 커피가 놓인 테이블과 카페를 한 장. 왼편에 장식된 작은 화분들을 중심으로 한 장, 전체 배경을 잡고 한 장, 아까 본 남자와 직원을 한 장. 응? 아까 본 남자?
“어!!?”
‘헙’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고는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못 들었으려나... 는 무슨 망할.’
제발 듣지 못했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해지게 이미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있나? 있기야 하겠지. 내가 고양이를 따라왔으니까.’
당황한 나머지 한쪽 입술을 깨물고 점점 뜨거워지는 얼굴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스토커라고 생각하려나... 왜 저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부담스럽게.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떡하지 그냥 눈을 피해버릴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 것을 진정시킬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때, 내 본능은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냥 몸이 이끄는 대로 밖으로 나가 그렇게 멀리, 자연스럽고 빠르게 가게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향했다. 가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었을 때, 멈춰 서서 정신을 차리고 본 내 얼굴은 아까 남자의 홍시 같은 얼굴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빠르게 걸어서, 숨이 차서 얼굴이 달아오른 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보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화끈거리는 느낌이 자꾸만 떠올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하... 젠장.’
사과(세 번째 만남)
그날 이후 수도 없이 이불을 걷어차며 혼자 생각했다. 왜 그 카페를 들어갔을까. 무슨 생각으로 들어간 걸까. 심지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상황을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바보같이 서있다가 왜 뛰쳐나갔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수십 번이나 침대에서 동동 굴렀다. 어차피 안 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기억에서 지우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기어코 가게 건너편까지 와서 전전긍긍하는 내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가면 민폐는 아닐까?’
작게나마 남은 양심이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건 아니고?’라고 하자 발은 거기에 수긍이라도 하듯 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이 타들어갈 정도로 쨍한 날씨에 점점 흐르는 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들어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저기... 뭐하세요?”
신호등에 박다시피 기댄 머리를 떼고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가 있었다.
“예? 아... 아니 뭐가요?”
“저희 가게 오시려는 거 아니세요?”
남자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닌데요? 무슨 소리세요.”
“그래요? 그럼 저는 출근 중이었어서 먼저 가볼게요.”
“저기 잠시만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후회할 것만 같은 생각에 자리를 뜨려는 남자를 불러 세워 장황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니 이 가게가 있었고... 그냥 커피나 한잔 하려고 들어갔는데 사진이나 찍으려고 카메라를 드니까 아니 그쪽을 찍으려던 건 아니에요! 그쪽이 갑자기 나왔어요. 제가 스토커나 뭐 이상한 그런 게 아니고요...”
“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요.”
남자는 작게 웃던 모습과는 다르게 침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미안해요.”
“골목에서 빤히 본거랑, 가게에서 제가 사진 찍는 타이밍에 우연히 마주친 거. 제가 잘 말씀드렸어야 되는데 이상한 여자로 보실까 신경 쓰여서요.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음... 그럼 저희 가게 매출이나 올려줄래요?”
순간 무슨 말이지 싶었다.
“오늘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서요.”
“네... 네 그래요.”
일단은 대답부터 하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는데 어서 오라는 남자의 말에 그를 따라 길을 건넜다. 함께 들어간 카페는 반갑지만은 않은 커피 향이 나를 맞아주었고, 그 향기가 오히려 나를 약간 긴장하게 만들었다. 낯선 장소에 가서 맡는 냄새가 주는 긴장감과 비슷하달까.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만들어 드릴게요.”
“어... 제가 사라는 말 아니었어요?”
“맞아요. 근데 만드는 건 제가 해야죠.”
“아... 그럼 전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릴게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에게 말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애초에 이상하게 생각도 안 했으려나?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싶어 작게 한숨을 뱉었다.
“차가운 걸로?”
“뜨거운 거요.”
바리스타용 앞치마를 꺼내 입더니 편하게 앉아 있으라는 그의 말에 첫 출근한 인턴처럼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었다. 이미 마음이 불편한데 어떻게 편히 있으라는 말인가.
“근데 이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네요?”
내 쪽으로 다가와 커피를 탁자에 올려두며 남자가 물어보았다.
“네 그냥 저는 뜨거운 게 좋아요.”
능청스럽게 물어보는 자연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미안하다고요. 아까 제대로 듣긴 한 거예요?”
“뒤에서 보고 계셨던 건 약간 부끄럽긴 했는데... 괜찮아요. 깊게 생각 안 했거든요.”
또 남자 특유의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진지하게 얘기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그 표정 되게 얄미운 거 알아요?”
내가 말하자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그쪽이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요. 아까 처음에 얘기하실 때부터 줄곧 그러셨는데, 그거 엄청 얄미워요.”
“푸핫. 음... 되게 솔직하시네요?”
“할 말은 해야죠.”
“그럼 저도 궁금한 거 몇 개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모른 척해도 되는 일인데 굳이 사과하러 오신 이유가 뭐예요?”
“그냥... 혼자 있을 때 계속 생각이 나서요. 약간 내성적인 편이라 바보같이 뛰쳐나갔던 거, 계속 마음에 남거든요.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왔어요.”
“음... 할 말 다하는 거 보면 내성적인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장난치지 마시고, 또 있어요?”
“그럼 뜨거운 커피만 마시는 이유는요?”
“뜨거운 게 향도 좋고, 오랫동안 씁쓸하게 감도는 맛이 좋아요. 뜨거운 것만 마시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도 마시고 계시길래요. 근데 이 여름에 뜨거운 것만 드신다고요? 더운 날에는 차가운 게 낫지 않아요?”
“와 진짜 뭘 모르시네. 커피는 원래 따뜻하게 마시는 거예요.”
“저는 카페 사장인데요?”
또 저렇게 생긋 웃는다. 훈훈하지만, 얄밉게.
“아오 얄미워. 아무튼, 커피는 뜨겁게 마시는 거예요.”
“하하하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남자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뭔지 궁금해서 들어 볼게요. 말해봐요.”
“저랑 앞으로 세 번 만나요. 만나는 동안 그쪽이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 제가 이기는 거고, 안 마시면 제가 지는 거죠.”
“그래서 그걸 하면 저한테 좋은 건 뭔데요?”
“음... 소원 들어주기? 너무 진부한가? 그럼 우리 가게 한 달 이용권은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한 달 동안이요? 아무 메뉴나 상관없이?”
“네 상관없이. 그렇다고 가게 접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럼 제가 마시면 어떻게 되는데요?”
“음...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죠?
내게 왜 이런 내기를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깃한 제안이긴 하다. 내기에서 질 것 같지도 않고, 무조건 안 마시면 되는 거잖아?
“좋아요. 해요.”
내기_1
‘띠링’
‘오늘 시간 돼요?’
내기를 수락하고 삼일 정도 지났을까. 평화로운 주말에 집에서 뒹굴고 있는 나에게 문자가 왔다.
‘음...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럼 저녁 여섯 시까지 우리 가게 앞으로 와요.’
뭐야 내가 나오라면 나가는 사람인가 차암나. 하며 툴툴대고 있을 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아 참 옷은 편하게 입어요. 갑자기 나오라 했다고 욕하고 있는 건 아니죠?’
정곡을 찔렸다.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묘하게 내가 다 읽히는 느낌이 든달까.
‘욕은 안 했어요. 이따 봐요.’
정말 욕은 한 적 없으니까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편하게? 공식적으로는 나름 첫 만남인데 운동복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배려해서 한 말이겠거니 하며 옷장을 뒤적거렸다. 편하게 입고 오랬는데 과하게 꾸미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정말 대충 입는 건 아닌 거 같고, 막상 옷장을 뒤져보니 입을 건 또 없다. 아니 이걸 내가 왜 고민하는 거지? 대충 옷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크롭 청바지를 꺼내 흰 티를 집어넣고, 검은색 모자를 눌러쓴 채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집을 나섰다.
“일찍 왔네요?”
항상 슬랙스에 셔츠 차림이었던 이전과 다르게 무릎이 살짝 찢어진 청바지 차림에 캐주얼한 느낌의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대각으로 멘 슬링백이 포인트가 되어 편한 차림도 의외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싶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오늘 같은 날씨에 가야 되는 곳이라.”
“가요? 어딜?”
“따라와 보면 알아요. 이상한 곳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이상한 곳 아니라는 말이 내 촉을 쎄하게 만들었다. 누가 ‘나 이상한 곳 데려갈 거예요’라고 하겠느냐 하고 투덜거리며 남자를 따라간 곳에는 가게에서 십 오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등산로 입구였다.
“가자는 곳이 산이었어요?”
“네.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우린 내기도 있잖아요?”
“하하... 산은 좀...”
“그럼 가볼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목을 잡더니 앞으로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남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기... 손은 놔주실래요?
“아 미안해요. 힘들면 말해요. 끌어줄게요.”
그렇게 남자를 따라 십분 정도 산을 오르다 보니 숨이 차기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이라는 일 년에 삼백 번 정도 하는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급히 나오느라 물 한잔 안 마시고 나왔는데 우린 내기도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싶다.
“혹시 물 있어요?”
“음... 물은 없는데 시원한 커피는 있네요.”
남자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꺼내어 흔들며 슬며시 건네주었다.
“와 진짜 이러려고 산에 올라가자 한 거였어요? 엄청 치사한 사람이었네.”
한 걸음 내딛을수록 점점 숨이 차올라 그의 유혹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그런 건 아닌데, 커피 안 마실래요? 안 마시면 집어넣고.”
“됐어요. 목마를 때 커피 마시면 더 안 좋은 거 몰라요?”
턱 끝까지 차 오른 숨을 내쉬며 남자를 째려보고 말했다.
“그럼 계속 가요. 얼마 안 남았어요.”
살짝 웃더니 편안하게 걸어 올라가는 그를 보며 체력도 좋다 싶었다. 아니 내가 저질체력인가.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산책하듯 걷는 그의 배려심에 고맙다가도, 여기 데려온 사람이 저 인간이라는 점에서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말하고 싶지만 자존심 하나 때문에 꾸역꾸역 올라가는데, 더 가다가는 당장 내일 신문에 내가 실리겠다 싶어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기... 헉 헉... 저 좀 끌어줄 수 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게 건넨 손을 잡고 따라 올라간 곳엔 탁 트인 정상에 별처럼 빛나는 건물들, 은하수처럼 흐르는 다리 위의 자동차들을 보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놀라기는 이른데, 하늘도 한번 봐봐요.”
그가 뻗은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내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이 많은 별과 크고 밝은 보름달이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어때요. 따라온 보람이 조금 있으려나?”
“네. 완전요.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너무 예뻐요. 하늘도, 도시도.”
오늘 같은 날씨에 가야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사진기를 가져왔어야 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제 비밀 아지트 같은 장소예요. 마음이 답답하거나 힘들 때마다 여기 오고는 하거든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냥 내기에서 이기려고 끌고 온 치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하하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얄미운 사람인가 내가?”
“네. 엄청요. 아까 차가운 커피 내밀 때는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어요.”
손을 들어 올려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성적이라더니... 미안해요. 그래도 따라와 보니까 어때요. 아름답죠?”
익살스럽게 장난을 치는 그가 밉지만은 않다.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줘서 그런 것일까, 서울에서 보기 힘든 내 머리 위로 쏟아질 듯이 많은 별들과, 탁 트인 도시의 야경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네 정말 아름답네요. 힘든 게 다 사라질 만큼. 꿀밤은 봐줄게요, 여기 자주 와야겠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요즘 조금 답답했거든요.”
“무슨 고민 있어요?”
“그냥 조금 답답해요. 성적에 맞춰 전공이랑 학교를 골라서 입학했는데, 막상 와보니까 적성에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답답한 마음에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 그때는 즐거운데, 막상 집에 오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우울해요.”
강물처럼 흘러가는 자동차의 불빛을 보면서,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얘기했다. 학교의 교수님이 짜증 나고, 화나게 하는 동기가 있으며, 수업은 너무 어렵고 졸리다고. 그렇게 계속 한풀이하는 동안, 그는 내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고개만 끄덕거릴 뿐.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보통 이렇게 말하면 공감해준다던지, 그게 뭐가 힘드냐 더 힘든 사람도 많다고 핀잔을 준다던지 하잖아.”
“그냥 많이 힘들겠다... 싶어서요. 내가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것보다, 들어주는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잖아요. 지금이 그런 상황인 것 같아서.”
왜 이럴 때 저 잘생긴 얼굴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거야 부끄럽게. 생긋생긋 웃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진지한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오늘... 이래 저래 고맙네요! 제 얘기도 잘 들어주고, 좋은 곳에 데려와주고. 고마워요. 우리 이름도 모르는데, 이름이 뭐예요?”
‘아... 횡설수설해버렸다. 당황한 티 났으려나.’
“이재 에요. 서이재. 그쪽은요?”
당황한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한다.
‘아... 다 들켰구나.’
“저는 우리예요. 나우리! 그리고 그렇게 귀엽다는 듯이 웃지 말아 줄래요?”
“하하 그렇게 웃은 적 없는데? 본인이 귀여운 줄은 아나 봐요?”
“아니거든요! 그쪽 표정이 그래요 표정이!”
“알겠어요. 우리, 이름 예쁘네요. 이제 내려갈까요 우리 씨?”
“그러든가 말든가요!”
화끈거리는 두 볼을 감싸고 고개를 돌려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 빨개졌겠구나. 으으으 짜증 나. 왜 저 사람이랑 있으면 항상 말리는 거야.’
내기_2
‘오늘 술 한잔 할래요?’
‘갑자기요?’
‘내기도 있고, 오늘 날씨도 좋잖아요.’
‘좋아요.’
‘그럼 7시까지 밥 먹지 말고 여의나루 역으로 와요. 카메라도 챙겨서.’
참 뻔뻔한 사람이다. 싫지만은 않지만.
“어서 와요. 술이랑 안주는 내가 미리 사 왔어요. 오뎅탕이랑, 닭발이랑, 주먹밥.”
“이건 좀 통하네요? 커피 취향은 별로였는데, 소주엔 오뎅탕이랑 닭발이죠.”
“하하 좋아한다면 다행이네요. 앉아서 한 잔 받아요.”
“좋죠.”
잔을 부딪히고,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고, 약간 알딸딸해지는, 그런 분위기. 한강의 벤치에 앉아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야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거. 술 마시고 먹는 커피가 진국인 거 알죠?”
가방에서 이재 씨가 커피를 꺼냈다.
“설마 또 차가운 커피예요?”
“우리 씨 줄 뜨거운 커피도 있어요. 하하하 저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니랍니다?”
“웬일이래. 치사한 사람 아니었어요?”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약간 취해서 기분 좋을 때 맡는 은은한 커피 향과 속을 녹여주는 따뜻함, 씁쓸한 맛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근데 카메라는 왜 들고 오라고 했어요?”
“오늘은 사진 찍는 날 이거든요. 여기 경치가 좋아요, 강물도, 다리도, 공원도 전부.”
“이재 씨도 카메라 있었어요?”
“네. 그럼요. 여기.”
“와 저 그걸로 한 번 사진 찍어봐도 돼요?”
“그래요. 그럼 제가 우리 씨 카메라로 찍을게요.”
꽤나 고급 모델로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강의 야경, 어두운 공원 속에 빛나는 가로등들, 63 빌딩까지, 오늘따라 아름답게 찍히는 사진 때문일까, 취해서일까. 신나게 사진을 찍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쪽팔려... 카메라는 괜찮나...? 헉’
“괜찮아요? 다친데 없어요?”
이재 씨가 쓰러진 나를 일으켜주며 말했다.
“전 괜찮은데... 카메라가...”
카메라의 렌즈와 화면이 전부 깨져버렸다. 어떡하지 비싸 보이는데, 박살난 카메라를 본 그의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보다 아픈데 없어요? 우리 씨 옷 다 더러워졌네.”
“전 정말 괜찮아요.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제가 꼭 새 걸로 사드릴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이재 씨의 굳어있는 얼굴에 술이 다 깨버렸다.
“괜찮다고 말하기엔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선물 받은 거예요?”
“네. 카메라를 갖고 싶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선물해주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근데 정말 괜찮아요.”
“정말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더 조심히 다뤘어야 하는데...”
두 손을 모아 연신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준 카메라를 부수다니. 하 멍청이... 오늘 나보다 큰 잘못을 한 사람은 없을 거다 진심으로.’
“정말 괜찮아요. 그냥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네요. 저번엔 우리 씨 얘기 들어줬으니까, 오늘은 내 얘기 들어줄래요?”
“네! 네. 얼마든지요.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술부터 한 잔 받아요.”
이재 씨는 아련한 표정으로 술을 받아 고개를 돌려 마셨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생일 선물로 받았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제가 취미로 사진을 찍고 다닌다는 말을 기억 하셨더라고요.”
“그 생일날,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께 걸렸대요. 참 쓰레기 같은 사람이죠. 아들 생일날 바람을 피우다니. 걸리지나 말던가.”
“그렇게 충격받으신 어머니는 쓰러지시고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지내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물론 마지막도 같이 못 있어 드렸고요. 많이 후회해요. 울고 불고 해서라도 휴가를 나갔어야 하는데, 그냥 말로 해서는 절대 내보내 주지 않더라고요. 규정이 그렇다나.”
항상 웃던, 그렇게나 밝은 사람이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고, 나는 두 손을 뻗어 그의 고개를 돌린 후 놀라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그대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차가운 커피는 그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흘러 들어왔고, 입을 떼고 난 그 커피를 삼켰다.
“우리 씨?”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냥...”
“우리 씨 방금 차가운 커피 마셨네요. 소원 말해도 되죠?”
“네? 아 네...”
“다시 해줘요.”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이재 씨의 말을 듣고 벙 쪄 있었을 때, 그는 뭐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린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세상에 둘만 있다는 듯이. 그리고 아까 삼킨 커피와 함께, 이재 씨는 내 인생에 스며들었다.
다시 20년 여름(연애 2년 차)
강의가 다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일 년 전에 함께 자주 갔던 단골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 아웃해서 집으로 향했다.
‘오빠, 오빠 왜 요즘 뜨거운 커피만 마셔? 예전엔 안 그랬잖아.’
‘그냥. 요즘 뜨거운 커피가 좋네? 너를 향한 내 뜨거운 마음이랄까? 사랑하면 닮는다잖아.’
‘참나 어이가 없네요. 일 년 전엔 오늘같이 더운 날에는 차가운 커피 마셔야 된다면서 나 꼬셨잖아. 오빠, 카페 이름도 이름이 이재라서 Cafe. Now라고 지은 거지? 처음에 보고 작명 센스 진짜 없는 사장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빠였네 크크.’
‘뭐? 카페 이름이 뭐 어때서 좋기만 하고만. 내 가게에서는 힘든 과거도, 걱정되는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향긋한 커피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있어. 이 순간만큼은 근심 걱정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거지’
‘그런 뜻도 있었다니 우리 오빠 조금 멋있네? 일루와 오빠 뽀뽀해줄게. 오랜만에 우리 처음 했던 커피 키스나 한번 할까 오빠?’
이런 시절도 있었는데, 서로 얼굴만 봐도 꿀이 흘러나오던 시절. 나는 남들과는 다르게 우리가 영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애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가면서, 다른 연인들처럼 매일같이 연락하던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적어졌고, 다른 연인들처럼 매일같이 만나던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다. 점점 싸우는 횟수는 많아졌고, 점점 바빠지는 일상 속에서 나는 지쳤다. 오빠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고, 크게 변한 점도 없는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집에 도착해서 식탁을 보니, 아침에 오빠가 준비해둔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은 채로 남아있었다.
‘내가 안 마셨으면 자기가 마시던지, 치우지 그냥 그대로 놓고 갔네. 화났으려나.’
컵을 들고 싱크대로 가서 커피를 쏟아 버리는데, 컵 바닥에 남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커피는 제대로 젓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얼룩이 생긴다고 오빠가 알려줬었다. 그대로 놔두고 간 걸 보면 화난 게 맞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오빠 생각과 함께 잔에 묻은 얼룩을 씻어 내렸다.
‘아 몰라. 오늘은 화해 안 할래. 얘기하면 또 싸울 거고 오늘은 너무 힘들어.’
‘띠링’
‘우리야 뭐해? 오늘 한 잔 할래?’
나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학교 선배다. 기분도 꿀꿀한데 한번 만날까. 오빠가 알면 화낼 텐데.
‘그래요 우리 동네로 와요.’
생각과 다르게 손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심술쟁이 손은 술을 갈구했다. 아니, 나는 술을 핑계로 새로운 설렘을 원했다. 편안함만 있는 연애에 지쳤다.
집 앞 포차에서 선배를 만나 소주를 두 병 정도 마시고, 나는 취한 것 같다. 세상은 돌고, 혀가 꼬이는 것 같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대시하는 남자도 있고 말이야.
“아니 그래서 요즘 매일 싸운다니까요 오오오오.”
“남자 친구 분은 왜 그러셔? 헤어지지 그냥.”
“뭐라고요오오오?”
‘털썩’
“야 우리야 일어나 너 집에 가야지. 아 이거 정말 골아떨어졌네.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마지막 그리고 이별
무언가 떨어지는 큰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바닥에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가 떨어져 뒤섞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선배와 나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한 침대에 있었고, 커피 잔의 로고를 보니 오빠가 다녀 간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오빠는 없었고, 심하게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천천히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오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보세요. 오빠. 오해야 내가 설명할게 오빠.”
“...”
“그냥 어제 학교 선배랑 술을 마셨고, 속상한 마음에 조금 많이 마셔서 기억이 없어. 저 사람이랑 바람피운다거나 한 거 아니야. 정말 실수야.”
“...”
수화기 너머로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필사적으로 우는 소리를 참고 있는 오빠였다.
“오빠.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정말 실수야.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다시는 안 그럴게 주변 남자들이랑 술자리도 안 가질게. 제발.”
“우리야. 그만하자...”
“오빠. 다시 한번만 생각해줘 응? 나 오빠 없으면 안...”
전화가 끊겼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내도 오빠는 답장이 없었다. 이제야 내가 사고를 쳤다는 게 실감이 나 그 자리에 주저앉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오빠는 변하지 않았었다. 매일같이 먼저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서로에게 관심이 적어진 게 아니라 내가 관심이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줄인 건 나였다. 피곤하다는 말로 만남을 줄인 건 나였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건 나의 예민한 기분과 식은 감정이었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에 끊임없이 눈물이 흐른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한 방울, 아버지의 외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남자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두 방울, 그렇기에 지금 이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무섭도록 차가운 현실에 세 방울. 그는 항상 흰 셔츠를 입었다. 세탁이 불가능한 커피를 쏟은 셔츠처럼, 그의 상처도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계속해서 눈물이 흐른다. 꽃 다운 스무 살을 빛내 준 그이기에,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첫 번째 사람이기에.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배는 이미 집을 나간 후였고, 집 안 바닥에는 오빠가 쏟은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가 뒤섞여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에필로그(25년 여름)
‘띠링’
‘우리 씨 xx카페에 자리 잡아놨어요.’
‘소개팅남’이라고 저장한 사람의 문자를 받았다. 절대 소개 안 받는다고 말했는데 기어코 친구가 소개팅을 잡아 놓고야 말았다.
‘네 거기로 갈게요.’
“우리 씨! 여기에요!”
“아... 안녕하세요.”
소개받을 생각도 없는데 대충 하고 가야겠다.
“날씨가 많이 덥죠. 일단 마실 것부터 시킬까요? 시원한 아메리카노는 어떠세요?”
“아... 저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려요.”
“네! 근데 이 더운 날씨에 땀을 그렇게 흘리면서 오셨는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드시네요?”
주변 사람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 행동에 이 남자 또한 질문을 건넸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 네... 뭐 그냥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