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더딘 손끝,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와이메아(Waimea))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해가 지면 곡괭이는 쉬었지만, 그들의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젖은 고무신을 벗고 합숙소로 돌아온 사람들은, 마치 어린 시절의 저녁 공부처럼 작은 공책을 꺼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땀과 함께 번져 있었다.
"나-는-양-재-준-입-니-다."
그가 더듬거리며 읽자, 글 선생 김병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경도에서 신학교를 다니다 이곳까지 흘러온 병수의 목소리는, 언제나 기도처럼 낮았다.
벽에는 '가, 나, 다'가 쓰여 있었고,사람들은 그 글자를 따라 쓰며 자신만의 희망을 한 획씩 적어 내려갔다. 글을 배운다는 건 단순히 문자를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다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였다.
그날 밤, 병수는 누렇게 바랜 사전을 펼쳐 한 단어를 가리켰다.
"오늘은 영어 하나 배웁시다. 아주 쉬운 겁니다."
판잣집 벽에 새겨진 단어는 water, 물이었다.
"워, 터, 목마를 때 써보세요."
낯선 발음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며칠 뒤,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서 목이 타들어갈 때, 양재준은 용기 내어 그 단어를 외쳤다.
"워...터!"
루나 감독관이 고무통을 가리켰다. 그날, 그 한 마디가 그의 생명을 지켜 주었다.
그는 그 단어를 공책 한 귀퉁이에 적었다.
water: 물, 살아남기 위한 말, 이 땅의 첫 단어였다.
그날 이후, bread, sun, stop, sorry... 매일 밤마다 한 단어씩이 그의 생존 언어가 되었다. 낮에는 몸으로 버텼고, 밤에는 말로 버텼다.
그러나 글을 배운 진짜 이유는, 멀리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첫 편지를 썼다.
"어무 예, 잘 계시지요. 여보 임자,
나는 잘 있어요. 배 멀미는 이제 다 나았고, 돈 벌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원효와 애들은 잘 있는지요.? 나는 글도 배우고 있어요. 고향에 소식 전할 편지를 쓰기 위해서요."
종이에 번진 눈물 자국을 닦아내며 그는 이어 썼다.
"어무예, 이곳은 사탕수수밭입니다. 매우 덥고, 일은 힘듭니다. 그래도 건강히 잘 있습니다.
저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꼭 돈 벌어 돌아가
겠습니다."
어무예! 건강 잘 챙기시고 오래사셔야 합니다.여보! 원효, 지효, 운효 키우느랴 고생이 많소.애들을 안아보고,만져보고 싶군요.”
며칠 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봉투에 주소를 적었다. '코리아, 대구 지산동.'
정말 닿을까 하는 의문이 스쳤지만,그는 믿었다.
가족이 이 편지를 열고 고개 숙여 읽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날 저녁, 편지를 마친 사람들은 작은 찬송가책을 펼쳤다. 불빛 하나 없는 기숙사 한편에서 낮게 울려 퍼진 노래는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희망은 어둠 속에서 피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으며 종이위에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