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준이는 호놀룰루 땅에 내려섰다
1904년 11월 18일 오전 9시 태평양을 가로지른, 거대한 증기선코리아호(Korea)
가 2주 넘는 항해를 끝내고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맑았다. 항구엔 파도가 잔잔히 출렁였다. 조선에서 떠나온 112명의 이민자들에게 이 풍경은 자유의 상징이 아닌, 막막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양재준은 갑판 위로 천천히 올라섰다. 멀리 펼쳐진 야자수 숲과 해안선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피부를 찌르는 햇살, 땀을 부르는 무더운 공기, 이국의 냄새가 낯설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섬이구나… 정말 이곳이 하와이란 말이지..."
그의 눈은 먼바다 너머를 향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를 조선의 땅이 저 너머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선과 동시에 이민자들은 일렬로 줄지어 세워졌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환대가 아닌 번호였다. 관리들은 가족도, 연령도 고려하지 않고 등록번호 순서대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미군 군복을 입은 관리가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고, 검역관이 하나둘 이민자들을 불러 세웠다.
양재준은 왼손에 조선에서 발급받은 이민 계약서 사본을, 오른손엔 어머니가 싸준 말린 취나물이 담긴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타국의 땅에 발을 디딘 첫 순간에도, 그가 손에 쥔 것은 조국의 문서와 어머니의 손맛이었다.
"Open your mouth. Pull down your lower eyelid."
검역관이 영어로 외쳤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손짓을 따라가며 간신히 지시를 이해했다. 혀 밑을 보여주고, 귀 뒤를 만지고, 팔뚝과 등을 누르며 이상 유무를 확인받았다. 이곳에선 기침 한 번에도 격리소로 보내졌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침묵했고, 버텼다.
"Name?"
양재준은 멈칫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질문에, 그는 통역관을 바라보았다. 통역관이 다그치듯 물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성부터 말해."
"양.,.재준입니다."
검사관은 귀찮다는 듯 소리 나는 대로 종이에 적었다.
Yang, Chai Choon. 33, 기혼, 지산동, Korea호, 1904.11.18. No.376.
그날부터 그의 이름은 사라졌다. 누군가의 아들, 남편, 동포가 아닌, 376번이라는 노동번호가 그의 정체가 되었다.
검역을 마친 이민자들은 바로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창문엔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바닥엔 톱밥이 뿌려져 있었다. 침대라기엔 초라한 철제 프레임 위엔 낡은 담요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미국인가?" "감옥 같네..."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차디찬 물로 씻고, 익숙지 않은 음식에 속을 달랬다. 이민자들은 잠시도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모두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존재로 전락한 채, 이틀 밤을 그 집결소에서 보냈다.
셋째 날 아침,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호명 소리였다.
"Number three-seven-six! Yang, Chai Choon!"
양재준은 손을 들고 트럭에 올랐다. 오아후섬 북쪽 와이메나 사탕수수 농장에 배정되었다. 3년 계약, 월급 15달러,하루 두 끼 식사, 숙소는 가로 50cm, 세로 150cm의 좁은 나무 침상이다. 담요는 없었다.
트럭은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차창 밖으로 초록빛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언덕을 따라 까마득히 이어진 그 들판은 그에게 곡괭이질을 해야 할 바다처럼 보였다.
그날 밤, 그는 기숙사 침상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이 떠 있었지만, 조선에서 보던 북두칠성과 견우직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국의 별빛은 차갑고, 먼 조국은 아득히 멀었다.
"이름은 내 것이지만, 삶은 더는 내 것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겠다. 내 이름은 양재준이다. 내 고향은 조선 지산동이다. 나는 반드시 돈 벌어, 곧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 자료 발굴 ]
1904년 호놀룰루 항 검역소 실제 사진
하와이 초기 이민자 등록카드(노동번호) 실물 예시
와 이아나에 및 힐로 사탕수수 농장 배치 지도
집결소 및 기숙사 내부 구조
또는 대한인국민회 초기 기록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