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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인천 제물포, 떠나는 사람들

밥을 찾아, 희망을 품고 배에 올랐다

by 영 Young

1904년 10월 중순, 양재준은 대구역 플랫폼에 혼자 서 있었다. 그의 손엔 낡은 보자기로 싼 보따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엔 어머니가 싸준 매운 고추장과 아내가 싸준 마른 나물 몇 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아들 원효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 한마디가 있었다. “아부지, 돈 많이 벌어서 꼭 돌아오세요.”


기차는 덜컹이며 북쪽으로 향했다. 호남선과 경인선을 갈아타고 새벽이 다 돼서야 인천에 도착했다. 제물포항은 이미 떠날 준비로 분주했다. 매캐한 탄내, 생선 비린내, 이민 중개업자들이 부르는 고함이 뒤섞여 있었다.

부두엔 낡은 보따리를 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가난한 농민, 건장한 장정, 고아 같은 소년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은 교회 소속이거나, 지방의 개화파 목사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희망과 불안, 그리고 체념이 얽힌 채였다.

그 속에 누비 두루마기를 걸친 양재준도 서 있었다. 달성 서 씨 부인이 마지막으로 챙겨준 겨울옷 한 벌, 그것이 전부였다.


“당신도 하와이 가는 사람이오?” 옆사람이 말을 걸었다. “예. 사탕수수밭에서 일한다 하더군요.”이름을 묻고, 고향을 말했고, 떠나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부두 옆 목조 사무소 앞에는 수십 명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재준도 그 줄에 섰다. 사무실 안, 낡은 책상 위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와이 이민 계약서, 미합중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근로계약서, 계약기간 3년, 임금은 월 15달러, 숙소 제공, 의료 혜택 있음.' 그러나 그 아래, ‘귀국 경비 제공 없음’이라는 작은 글씨는 번역되지 않은 채였다.‘돌아올 뱃삯’이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재준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떠난다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구나.”

그날 해질 무렵, 제물포항의 바닷바람은 유독 매서웠다. 그러나 그 누구도 떨지 않았다. 춥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넌다는 두려움보다, 고향을 떠나 가족을 볼 수 없다는 무거움이 더 컸다.


며칠 뒤, 1904년 10월 28일 그들은 드디어 코리아호에 승선했다. 붉은 선체의 증기선, 미국 태평양 운수회사 소속의 배였다. '출항일은 11월 1일, 탑승자 수는 112명.'양재준은 그중 48번째 승선자였다.

그는 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엔 집안 흙 한 줌, 아내가 말려준 무말랭이와 검은콩, 그리고 어머니가 손수 수놓은 손수건이 있었다.


배에 오르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바다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살아서, 반드시 돌아온다. 내 이름은 양재준, 가족을 절대 잊지 않는다.”


[ 역사 자료]

1903~1905년 대한제국-하와이 이민 기록: 인천 제물포에서 출항한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다수는 감리교/장로교 교인으로 구성됨.

하와이 노동이민 중개업자 명단: 박용만, 호놀룰루 소재의 노동 알선 회사, 일본계 중개인 등이 활동함.

코리아호 탑승자 명부(실제 일부 이미지 포함): 대한제국 정부의 최초 공식 이민, 코리아호 탑승자들은 대부분 경상도와 인천, 전라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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