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대구 지산동, 한 가난한 농가의 아들
'삶보다 먼저 찾아온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명치 5년, 1872년 3월 19일. 대구 동남쪽, 달성군 지산동 마을 끝자락의 구릉지에 초가집 한 채가 비바람에 막아주고 있었다. 봄이면 꽃샘추위의 매서운 바람이 창호를 흔들고, 여름이면 장맛비가 넘쳐 들어 마룻바닥을 적셨다. 겨울에는 북풍이 살결을 에이듯 스며들었다.
그날, 이 집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양재준. 그의 집안은 한때 대사헌 벼슬을 지낸 양반가의 후손이었지만, 지금은 댓 마지기 남짓한 밭 자락이 전부인 가난한 집안이었다.
보리와 좁쌀을 심고 가을이면 수확했지만, 그 곡식으로는 겨우겨우 겨울을 넘기는 것도 빠듯했다. 양식이 바닥나면 어머니는 봄마다 산으로 올라가 쑥과 머윗대를 캤다. 그것을 삶아 국으로 마시고, 밀가루 죽을 물에 풀어 끼니를 대신했다.
“애야, 오늘은 풀이라도 삶아보자.”
이 말은 부엌 앞에서 오가는 일상의 대화였다. 사형제들은 배고픔과 추위로 자주 병이 났었다. 집안에는 웃음이 적어지고 아이들은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학교? 그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초등 교육조차 사치였던 시절, 재준은 글씨보다 삽자루를 먼저 잡았고, 책 보다 지게를 먼저 졌다. 들에 나가 소먹이풀을 베고 소여물을 끊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장작을 해오고, 장에 내다 팔았다. 땔감 장사는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그것으로 가족들을 간수했다.
그의 마음속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었다. “열심히 돈 벌어, 가족들 배불리 먹여야지”
열여들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다. 그날부터 재준은 ‘가장’이 되었다. 마을을 넘어 이웃동내에 품팔이를 나가며, 그는 가족의 끼니를 이어갔다. 허기와 노동이 삶의 전부였던 어느 날, 동네 장터에서 낯선 소문이 떠돌았다.
“코쟁이 나라, 미국이란 데는 땅도 넓고 돈도 많다더라.”
누가 직접 다녀온 것도 아니었다. 풍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말은, 그에게 처음으로 '다른 삶’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 땅의 가난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떠날 수 있다"
그날부터, 재준의 시선은 남의 집 품팔이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수평선을 향하기 시작했다.
[역사 자료 ]
1872년, 조선은 최초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무렵 조선은 소작농 중심의 불균형한 지주제 구조와 반복된 흉작으로, 농민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