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어둠이, 조국을 버리고 꿈까지 삼켰다'
1890년대 초. 양재준은 스물두 살 청년이 되어 있었다. 매일 밭을 갈았고, 여전히 가난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어느 봄날, 마을 어귀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경복궁이 불탔다 하오.”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대요.” “이젠 일본 군복 입은 놈들이 대구 장터에까지 왔다 하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가에서, 장터에서, 점점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준은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우리 같은 백성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 무렵, 강원도에서 돌아온 먼 친척이 장터에서 그에게 말했다.
“요즘 하와이라는 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간다고하는구나 . 머슴도, 농사꾼도 다 받아준다네. 미국 땅이라 카더라.”
하와이 !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바다 건너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그리고 1904년 겨울, 그는 대구 장터로 나갔다. ‘정부 인가를 받은’ 이민 알선업자들이 누런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거기엔 이름, 나이, 고향을 쓰라고 되어 있었다.
“하와이에 가면 한 달에 돈 여섯 냥이나 준다 하오.”
말 한마디에 장터 분위기가 술렁였다. 사람들은 진심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날 밤, 재준은 똘망 똘망한 아이 셋이 잠든 방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꾹꾹 눌러 적었다.
“양재준. 나이 서른셋. 조선 농부. 계약 노동 희망자.”
그 순간, 그는 ‘조선의 농부’가 아닌, 떠나는 자가 되었다.
[역사 자료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기 민중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조선은 일본의 영향 아래 급속히 침몰했다.
1902년, 대한제국은 미국과 공식 이민 계약을 체결했고, 1903년부터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민자 다수는 농민, 교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