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멀어지고, 온몸은 파도에 흔들렸다
1904년 11월 1일, 인천 제물포항이었다.
새벽안개가 뿌옇게 부두를 덮을 무렵, 증기선 코리아호가 커다란 기적 소리를 울렸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 너머로, 천천히 배가 바다를 향해 밀려 나갔다.
양재준은 갑판 위에 서서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가을빛에 젖은 산등성이 너머로, 지산동 어귀의 풍경이 아직 그의 눈앞에 선했다. 어머니 경주 최 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재준아, 밥은 꼭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돌아오너라.”
그 말이 바닷바람에 섞여 사라질 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배는 조선 땅을 점점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선실로 들어서자, 현실은 빠르게 그를 덮쳤다.
코리아호의 지하 3층 선실 안에는 112명의 조선 이민자가 좁은 공간에 함께 뒤엉켜 있었다. 구획도 없이 연결된 나무 뱃바닥 위에서 사람들은 짐 보따리를 베고 누웠다.
햇빛은 닿지 않았고, 공기는 눅눅했다. 매캐한 석탄연기와 비린내, 땀 냄새가 섞인 공기는 질식할 듯했다. 물은 하루 한 바가지, 식사는 묽은 보리죽에 김치 몇 줄기뿐이었다.
“밥 좀 더 줄 수 없소.?” 재준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지만, 일본인 선원은 비웃듯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배 위의 삶은 시작부터 굴욕이었다.
항해 3일째 되던 밤, 재준은 뱃멀미에 쓰러졌다. 속은 텅 비었지만, 그는 끝도 없이 구토를 반복했다. 열이 올랐고, 몸은 식은땀에 젖었다.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그는 중얼거렸다.
“지금 죽으면, 여기는 조선도 아니고, 하와이도 아니야.”
고향에 두고 온 장남 원효와 두 아들, 막내는 아직 겨우 세 살, 그 아이들이 이 고생을 알기나 할까.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되뇌었다.
“아버지는 꼭 살아서 돌아간다. 원효야, 아버지는 반드시.”
밤이 되면 사람들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선실 어귀에 모였다. 모닥불 하나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 조용히 “아리랑”을 부르면 다른 이들도 따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래는 곧 울음이 되었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한 청년은 손가락을 입술에대고 피리 소리 냈다. 또 다른 이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양재준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가냘픈 민요를 목이 터져라 함께 불렀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
출항 2주째가 지난날 밤, 한 사내가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하다 쓰러졌다. 이름도 몰랐던 그 사내는 다음날 아침, 백포에 싸여 수평선 너머로 던져졌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음은 어느새 배 위에서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양재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뱃멀미로 넘기지 못하던 죽 한 그릇을 억지로 삼켰다.
“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04년 11월 18일 새벽.
갑판 위에서 외침이 터졌다.
“하와이다! 저기가 미국땅이다. Honolulu!”
먼 수평선 너머로 야자수 나무가 눈에 들어오며 희미하게 섬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하와이다! 저기가 미국땅이다. Honolulu!”
먼 수평선 너머, 야자나무가 희미하게 보이는 섬 위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양재준은 누런 솜저고리 위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기가 하와이냐.”
그는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 아내가 싸준 마른 나물, 말린 무말랭이, 그리고 고향 흙 한 줌이 들어 있었다.
손에 흙을 꼭 쥐고, 그는 가슴에 대고 말했다.
“나는 이제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내 뿌리는 조선이고 고향은 지산동이다.”
[역사 참고 자료 ]
1904년 코리아호 항해 일지
태평양 횡단 항로 및 당시 기후 기록
하와이 이민자들의 선상 사망 통계 및 처우
1904.11.18 하와이 도착 조선인 이민자들의
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