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에서 10~20% 의무납부
“우리는 조국을 떠났지만, 조국을 버리진 않았다.”
1904년 겨울부터 시작된 노동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고역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강한 햇빛과 칼날 같은 사탕수수 잎 사이에서, 사람들은 마치 피를 토하듯 버티며 하루를 채웠다. 그러나 양재준은 단순한 생존자로 머물기를 거부했다.
당시 하와이 한인 노동자의 한 달 수입은 고작 15~20달러였다. 판잣집에서 몸을 눕히고, 허기를 달래며 살아가는 처지였다. 게다가 양재준은 고국을 떠나올 때 선주의 뱃삯과 경비로 300여 달러의 빚을 지고 왔다. 매달 이를 갚아 나가려면 손에 쥐는 돈은 7~8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모두가 같은 처지였다.
“한 달 15불을 벌었다. 그중 2불은 조국을 위하여였다.”
그 2불은 빚진 자의 고통을 키웠지만, 동시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작은 깃발이었다. 교민 사회는 모두가 무언의 약속이 약속이 있었다. “벌이의 10~20%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냈다.”
와이메아(Waimea)지방회 총무로 선임 되었다
1913년, 양재준은 오아후 섬 와이메아 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농사로 다져진 튼튼한 체구, 집안 종손으로서 쌓은 책임감, 마을청년회에서 길러낸 리더십이 그를 교민들의 중심으로 세웠다. 무엇보다 사람을 품는 붙임성이 신뢰를 모았다.
그의 손에는 늘 낡은 장부와 펜이 들려 있었다.
○회비 거출,납부
○송금 명부 작성
○독립신문 발송 관리
○질병자 구호비 통지
모든 기록을 손글씨로 정리하며, 그는 문서 끝마다 작게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언제나 희미하게 적혔다. 드러나는 순간, 고향의 가족들이 일본의 감시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선을 떠났지만, 그 이름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손에 낮.곡괭이를 쥐고, 피땀을 흘리며 이민자의 얼굴로 조국을 지켰습니다.”
1914년, 양재준이 남긴 결산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불빛 아래 사람들이 옹기종기모였다.
판잣집 숙소에 모여 열린 작은 회의다. 매주 한 번씩, 사람들은 수수깡 의자에 앉아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달의 독립자금은 ○○불입니다.”
“○○농장에서 새 노동자 세 명이 들어왔습니다.”
“○○ 동지가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모금이 필요합니다.”
재준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총무가 아니었다. 그는 흩어진 사람들을 묶어주었고, 지친 이민자들의 가슴 속에 꺼져가는 불꽃을 지켜내는 등불이었다.
만세의 날은 감동의 물결이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은 태평양을 건너 3월9일 늦게 전해졌었다.화와이교민 800여 명은 4월12일 한인기독 학원에 모였다.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중심에도 양재준이 있었다.
그날의 울림은 단순한 함성이 아니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 신문 광고 후원, 유학생 장학금 지원, 임시정부 후원까지… 교민 사회의 모든 움직임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미국 이민국 문서에는 Yang Chai Choon, Yong Chai Choon, 혹은 단순히 Yang이라 기록되었다. 발음을 제대로 적어주지 않은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를 지운 흔적이었다.
낡은 장부가 그 증거다
세월이 흘러 그의 행적은 거의 지워졌다.
그의 상세한 기록은 찾을수는 없지만,
오래된 장부의 사본이 일부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양재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납부된 독립자금 기록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75년 뒤, 그의 증손자가 뒤늦게 찾아낸 흔적이었다.
일부는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낡은 펜글씨는 그와 그의 이름없는 동지들의 흔적이다.
[역사 참고 ]
동지회 하와이지방회 활동기록 요약
하와이 노동자 월급 및 독립자금 납부 구조
실제 남아있는 독립자금 모금 명단 사진
양재준 총무 임명 보고서 문안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