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땀이, 하나의 간판이 되었다
1919년 가을, 쉰이 다된 양재준은 마침내 호놀룰루 외곽 와이메아 사탕수수밭을 떠났다. 휘어진 허리와 갈라진 손바닥, 남은 것은 상처뿐인 육신이었다. 가슴속에는 더 또렷한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생을 농장 인부로 끝내지 않겠다.”
그는 피로 모은 돈으로 호놀룰루 오하우섬 시내 중심부 쿠쿠이(Kukui)지역에 작은 세탁소를 열었다.
직접 쓴 종이 간판을 낡은 철문 위에 걸었다.
“Yang’s Laundry , 양 씨 세탁소.”
그 글씨는 단순한 간판이 아니라, 이름을 지켜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지조와 가족 사랑을 선택했었다.
동료들 중 많은 이가 사진 신부를 맞아 가정을 꾸렸다. 중매인들이 고국에서 처녀들의 사진을 보내오면, 농장 총각들은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정했었다. 이들은 수년간 모은 200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 , 신부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양재준은 그러하지 않았다. 고향에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그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외로움과 혈기를 꾹 눌러 담고, 그 힘을 조국과 가족 사랑으로 바꾸었다.
그가 모은 종잣돈은 결혼 비용이 아니라 세탁소의 자본이 되었다. 비록 크지 않았지만, 양철지붕 아래에서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물을 데우고 빨래를 비벼냈으며, 숯불에 달군 다리미로 양복과 와이셔츠, 한복과 군복까지 정성껏 다려냈다. 하루 수입은 쌀 몇 되대 값이면 다행이었지만, 그곳은 ‘조선인의 이름으로 세운 첫 보루’였다.
정직한 세탁과 다림질로 땀을 흘렸다.
처음에 이웃들은 그를 “농장 출신”이라며 곱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그의 세탁물은 한 점의 얼룩도 없었다. 정직한 손길은 결국 냄새로, 촉감으로, 옷을 입는 이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양 씨 세탁물은 말끔하고, 빳빳한 주름각이 최고네. 정성을 다한 마음을 다리네.” 입소문은 퍼져 나갔다.
간판 뒤의 칠판을 달아 글을 가르쳤다
세탁소 뒤켠에는 작은 칠판이 걸려 있었다. 고된 하루 끝에서 아이들을 불러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늦게야 겨우 글을 익혔기에 직접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고향 후배의 아내 이기주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자음과 모음을 더듬더듬 써 내려가면,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말은 잊지 말아야지.”
양재준은 이기주를 수양딸로 부녀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가족도 친혈육 같이 받아 드렸다. 그는 경제적·정신적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고, 외로움을 친부 같은 사랑으로 메웠다.
작은 가게이지만 공동체의 깃발을 세웠다.
하와이에서 ‘양재준’이라는 이름은 처음으로 사탕수수밭이 아닌, 물과 비누, 숯불 다리미 위에 새겨졌다. 작은 가게는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을 지키고, 사람을 모으고,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교두보였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는 점차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수양딸 이기주와 그녀의 남편에게 크고 작은 개인사를 부탁했고, 뒷일을 대비하는 문제까지 맡겼다.
1937년 7월 30일, 그는 이기주를 통해 오아후 공동묘지(Oahu Cemetery Assciation1) 4 구역 275번지의 묘지를 구입했다.
네 분을 모실 수 있는 넓이의 묘역으로, 훗날 그는 이기주 가족과 함께 그곳에 잠들었다.
남은 흔적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73년 뒤, 증손자의 추적 끝에 그 사실이 밝혀졌다. 묘지 소유권 서류, 등록카드, 당시 신문에 실린 장례식 광고. 모두가 그가 살아냈던 삶의 증거였다.
작은 세탁소의 간판에서 시작된 이름은 결국 그 땅에 흔적을 남기고, 그리고 사람들 속에 남았다.
한 사람의 땀은 하나의 간판이 되었고,
그 간판은 다시 사람들을 모으는 깃발이 되었다.
[자료확인]
묘지지분 구입 서류(묘지법인 보관)
매장 주소 등록카트(묘지법인 보관)
장례식 광고 (당시 현지신문 2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