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봉투 안에 담긴 조국의 희망
양재준은 매달 한 장의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땀이 밴 달러 지폐 몇 장과,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간 이름들이 들어 있었다.
“양재준(Yang Chai Choon), 김기백, 이사국, 양봉성, 이기주…”
이름은 곧 약속이었고, 그들의 약속은 조국의 숨줄이 되었다.
세탁소 수입에서 쌀값과 석탄값, 집세를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은 고작 몇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양재준은 그 돈을 ‘여윳돈’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롯이 ‘의무’였다.
“우리가 보내는 건 단순한 돈이 아니야. 이건 조국이 우릴 잊지 않도록 하는 약속이야. 우릴 조선사람으로 붙잡아주는 끈이지.”
그렇게 모인 돈은 대한인동지회를 거쳐 상해 임시정부와 미주 독립단체, 그리고 국내 비밀결사로 흘러갔다.
때로는 [신대하], [공립신보] 같은 신문 제작비로,
때로는 독립운동 인쇄물 제작비로,
때로는 수감된 독립운동가 가족의 생활비와 변호비로 쓰였다.
하와이 교민들의 삶에는 이미 ‘독립금 모금’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품삯에서 10센트, 20센트를 떼어냈고, 장사꾼들은 장부에 ‘독립금’ 항목을 따로 두었다. 큰돈을 낼 수 없는 이들도 쌀 한 줌, 밀가루 한 줌을 덜어 모았다. 그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늘 양재준이었다. 그는 언제나 먼저 봉투를 내밀었고, 교민들을 독려하며 맨 앞에서 모금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미군이 전쟁 국채를 발행했을 때도 기꺼이 동참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시기 하와이 교민들은 적극적으로 전쟁 국채를 구입했다. 양재준은 교민들과 함께 100달러짜리 국채를 샀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미국의 요구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한인들의 신뢰를 쌓고, 독립운동의 외교적 기반을 마련하는 길이라 믿었다.
양재준의 봉투에는 언제나 돈만 들어 있지 않았다. 짧은 편지 한 장이 함께 담겨 있었다.
“조국이여,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 뜨거운 땅에서도, 당신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어느 날, 세탁소에 답신이 도착했다.
“당신들의 후원금은 상해의 김 모 선생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양재준은 그 편지를 오랫동안 내려놓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땀과 노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값진 증거였다.
독립자금 영수증의 흔적이다.
대한인동지회 등에서는 모금할 때마다 장부에 기록하거나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독립금은 ‘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교민들 대부분은 장부 기록이나 영수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재준 역시 자신이 바친 ‘증거’를 따로 보관해야 한다는 개념이 희박했다.
그러나 1943년, 미국에서 발행된 한 장의 영수증은 그의 이름을 선명히 남겼다.
“RECEIVED FROM Yang Chai Choon THE SUM OF $100 for the Pacific War Fund.”
일부 영수증에는 도장이 찍혀 있었고, 또 다른 종이에는 붓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본 금액은 조국 독립을 위한 성금으로 접수하였음.”
적은 금액일지라도, 그 흔적은 조국을 향한 가장 순결한 맹세였다. 그리고 먼 훗날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우리가 나라 없는 백성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남았다.
양재준은 알았다. 태평양 너머 조선 땅에서, 자신이 낸 독립금이 불씨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았다. 직접 밟을 수 없는 고향 땅이었으나, 작은 성금 하나로 그는 조국을 지켜내고 있었다. 모든 교민들 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봉투는 세월을 넘어 후손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조국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우리가 흘린 땀과 희생 위에서만 미래가 자란다. 그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 자료]
○ 주 하와이 한국영사관에 따르면, 당시 하와이 교민들이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었다. 이 돈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최대의 자금줄이었다.
○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와이 현지 교회에서 약 140장의 영수증과 납부자 명단이 발견된 것이다. 이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겹게 번 품삯의 일부였다.
이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 확인된 것일 뿐 실제로는 전 교민이 참여했었다. 이들의 기부는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의무금’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졌다.